솔로몬 재판-아이 바꿔치기 의혹 친자 확인
양육권 소송
친자 확인소송은 현재 같으면 DNA 테스트로 간단히 끝날 과학의 영역으로 간단한 사실 확인의 문제 즉 법의 판단영역이 아니라 사실 판단에 해당한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런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으므로 사실 판단도 법의 판단 영역만큼 쉽지 않는 영역에 속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구하는 지혜 “a heart with skill to listen”를 갖출 수 있기를 간구했다.
솔로몬의 판결에 대한 비판적 이해
근대 사회에선 제 아무리 국왕이라고 해도 사람을 죽이겠다고까지 하며 소송 당사자를 협박하고 위협하여 판결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지만, 역으로 어떤 측면에서는 아이를 죽이겠다고까지 하는 재판관의 협박과 법정에서의 극심한 충격적 상황 속에서도 situation of extreme distress and coercion 국왕의 강박을 이겨내며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피고인 두 번째 여인이 보다 현대인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를 위해서 최선의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현대적인 법률 해석의 가장 기초적인 골격- 즉 “the best interest of the child”의 원칙을 고려한다면 솔로몬왕의 재판 모습은 어떤 시사점을 주지 못할 것이다. 부모 가운데 “낳은 정 기른 정”의 양부모 adoptive parents 친부모 natural parents의 두 부모 케이스[1]가 있고, 또 만약 성경에 기록된 두 창녀가 한 집에서 기거한다고 했는데 오늘날 동성애 부모라면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그리고 오늘날은 친권이나 양육권 문제에서 다툼이 일어나면 솔로몬의 협박을 정말 그대로 실행하여 반반씩 50:50 쪼개는 원칙이 법원칙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볼 때 솔로몬 왕 시대, 원나라 시대의 “회란기” 소설[2], 브레히트의 희곡[3]에 나타난 러시아에서의 판결의 결과와는 다르게, 조건이 일정한 경우 어느 한 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게 되는 판결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
아이가 직접 증인 당사자가 되면 아니된다
아이를 놓고 어른의 마음을 테스트할 수는 없을 것!
동양의 “회란기”의 희곡 기록을 보자.
남편의 첩이 아들을 낳자 이를 질투한 정실부인이 남편을 독살해 버리고 첩의 낳은 아이를 자기 아이라고 하자 첩이 억울해서 재판을 청구하자 재판관 포청천은 땅바닥에 석회로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게 하고 두 여인에게 원 안의 아이를 밖으로 끌어내는 쪽을 친모로 인정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법적 아내는 아이의 팔을 힘껏 잡아 당긴 반면 첩은 아이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잡았던 팔을 놓아 버리며 양육권을 차라리 포기해 버리는데 판관은 이를 친모의 동기를 살필 수 있는 증거로써 여긴다는 판결을 내린다. 어째 인간의 탈을 쓰고 그렇게 모질게 할 수 있겠어?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의 행위에 대한 동기나 그 사람의 진면목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가? “視其所以,觀其所由,察其所安,人焉廋哉!人焉廋哉!”[4] 사람의 행동의 동기를 들여다 보고, 그 행위가 어디로 향하는지 경로를 관찰하고, 그의 내심에 들어있는 속내가 무엇인지를 고찰해 낸다면, 그가 어떻게 숨길 수가 있겠는가? 사람이 어떻게 숨길 수가 있겠는가? 공자의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의 내면적 동기는 그 사람의 행동에서 포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이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서 팔을 놓아 버리는 사람이라면 어떤 측면에서는 아이가 위급에 처했을 때 구해낼 강심장이 없는 사람으로 해석될 수가 있을 것이며, 비록 원나라 시대 희곡이니 당시 시대 사정상 정실부인보다 소외된 첩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결과가 관중들의 환호를 받을 것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아이의 팔을 아프도록 끌어당겨서 재판관의 숨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외부로 발표한 액면 그대로의 선언을 믿고서 자기 자식으로 만들려는 시도의 정실부인에게 양육권을 주는 것이 아이를 위해서는 보다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오늘날의 재판 결과는 명판관 포증의 판결과는 달리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1]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 원 The Caucasian Chalk Circle”(1948년 상연)에서 줄거리는 공산 소련의 식민지 총독 부인은 형제반란이 일어나자 자기 자식마저 내팽개치고 급하게 도망을 쳐버리는데 그 집 식모가 아이를 양아들로 삼고 키우게 되는데 반란이 진압된 후 생모가 와서 데려가려 할 때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판관은 “기른 정”의 양모에게 손을 들어준다. 양모가 아이의 생명을 걱정해 준 것으로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브레히트의 희곡에서 나타난 판결처럼 성장중심 경제하에서 환경중시 전통보다는 개발주의자의 논리가 득세할 것이며 이념정권하에서는 개인의 사적 재산권은 지켜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국가 법정에선 브레히트의 희곡에서 내린 판결하고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 거의 분명하다. 왜냐하면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법관이 강제적으로 떼놓을 수가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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