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저서--------/문무왕릉비문-투후 제천지윤-한국의기원원

프라이버시 보호 가치와 프라이버시권리의 법률적 의미

by 추홍희블로그 2013. 5. 1.

대통령이 바뀌어도 영원하게 바뀌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검찰과 재정부 이 두 곳입니다. 권력이 미쳐서 칼날을 휘두르고,, 돈을 헬리콥터로 뿌려도 어느 누구 하나 경고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혹시나 말 한다미 했다가는 자기자신에게 해가 닥치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에 지배당하기 때문에 침묵하는 사회가 됩니다.

 

마땅히 입을 열어야 할 비판적 지식인도 침묵하고!!! 돈있는 자도 침묵하고!! 어리석은 자도 침묵하고!! 모두가 침묵하고 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적 위기에선 모든 선량한 국민이 피해자가 됩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옆에서 쓰러져가는 전우의 시체를 밟고 지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남이야 죽든말든 자기 혼자만은 살아나고자 하는 이기적 생존본능일 것입니다.. 위기에선 모두가 침묵하게 되는 것은 그것만이 생존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극한적 생존본능의 상황에서는 윤리도덕이 어디에 쓸모가 있습니까? 그러나 생각을 제대로 해봅시다. 인류의 윤리도덕은 내가 아니라 우리의 자손이 살아 남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가장 단순하고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단 하나 진리가 있다면 인간은 누구라도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자기자신만은 “살아 남아야 한다”는 생각은 바로 잘못된 것입니다.

 또 썩은 환부는 즉시 수술해야 합니다.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썩은 고름은 도려내야 합니다.

국민이 들고 일어나기 전에 직언을 고하고 고견을 말하는 충신과 참정치인이 한 명이라고 나타나길 기대합니다. 이 나라 고위관료는 인간쓰레기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장삼이사도 말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불법권력을 감시하는 것은 대단한 탐정 역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남의 불법을 찾아내는 “벽에 붙어 있는 파리”가 아니어도 알 수 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는 있어도 “자신이 당할 것”이라는 보복이 두려워서 앞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는 때는 누구도 정확히 예측해 내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민란도 혁명도 한 순간 우연적 계기로 폭발되고 세상천지가 바뀌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개인적 분노가 공적 분노로 폭발하는 것은 순간적 기회입니다. 혁명은 재판 끌듯이 예고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고되었다면 역사상의 혁명은 없었을 것이며, 수없이 나타난 정권교체가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내 하나가 공고한 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가 있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주저하는 사람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위에 계란 던지기라고 비난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 한방울이 모여서 바위를 뚫습니다. 6백년된 참나무도 작은 겨자씨 하나에서 출발했고, 모든 역사는 단 한 사람의 생각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태어나듯이 인류 역사의 시작과 변화는 한 사람 부터 출발합니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는 참된 세상이 되어야 하고 다함께 행복을 나누는 에덴동산을 가꿀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검찰은 권력을 쥔 고위공직자들의 비리는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국민의 투명한 감시와 비판을 막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힘없는 일개 국민들의 개인사생활에 대해서는 샅샅이 뒤져서 낱낱이 밝히는 이런 부당하고 불법적인 검찰의 수사 방법은 관행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용서하고 넘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검찰은 법률을 집행하는 기관이기에 오로지 법에 의해서만 수사를 해야 합니다. 법을 다루는 검찰이기에 헌법이 정한 국민기본권을 더욱 보호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습니다. 권력행사는 정해진 헌법과 국민의 동의에서만 그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국민들의 마음속과 머리 속을 어떻게 족쇄를 채울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만은 어떤 독재자도 파고들 수 없는 순수한 자기 성곽과 같습니다. 몸은 빼앗길지언정 인간의 마음은 절대로 강간당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정권의 흉기로도 사람의 생각하는 머리속을 파고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국민 대다수는 사생활의 비밀과 통신의 비밀은 지켜져야 할 이유를 잘 아시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검찰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이런 논리를 펼칠지 모릅니다. 즉 “잘못한 것 없고 죄지은 사람이 아니라면 메일을 검열한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이런 논리를 영어로는 "nothing to hide"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불가피한 경우 이메일을 열람 공개하여 사생활의 비밀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 검찰의 반박논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프라이버시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대 다니엘 솔로브 교수는 그의 책 “UNDERSTANDING PRIVACY, Daniel J. Solov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8)에서, “숨길 것이 하나도 없다 (nothing to hide)”는 논리에 숨어있는 핵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권력기관이 개인을 감시하고 개인 통신 수단을 검열하는 것에 대해서 “숨길 것이 하나도 없으니 나는 괜찮다”라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반응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내가 죄를 지은 잘못이 없다면 권력기관이 나를 뒤져도 괜찮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를 일만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권력기관이 검열을 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이 무사할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프라이버시라는 것은 무슨 나쁜 일을 감추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너무 많이 양보해 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프라이버스 즉 사생활 보호의 주제가 “무엇을 숨기는 것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옮겨가게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프라이버시(사생활보호)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냐? 무언가 감추어야 할 비밀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게 될 잘못이 있습니다.
 
따라서 프라이버시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라이버스란 개념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각자 개인에 대한 정보를 사용하는 것에 관련된 사고체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개인 사생활 정보를 보호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비난하는 것에 사용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생활정보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사생활 보호가 있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숨쉴 공간이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함께 부딪히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자기만의 숨쉴 공간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도 대부분 숨이 막혀서 질식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개인간의 마찰과 충돌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회 생활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침해에서 자유로운 개인적 공간을 얻게 해주는 것이 프라이버시인 것입니다.

따라서 프라이버시가 존중되지 않는 사회라면 숨통이 막히고 결국 질려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라이버시가 보호되지 못하는 사회에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상의 설명이 솔로브 교수 주장의 요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의 프라이버시 개념은 서구선진제국과는 아직도 많은 차이가 나고 크게 뒤떨어져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검찰의 이메일 공개로 인해서 정치사회적으로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프라이버스라는 것은 "무언가 감출 것이 있다"고 생각하여 "무언가 나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프라이버시는 무언가 숨겨놓을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즉 보물 창고하고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생각을 정리해 기록한 개인적인 일기장이나 이메일은 후대에 가면 역사적 보물이 됩니다. 가보를 깊숙이 보관해 온 우리 선조들의 생각을 한 번 보십시요. 보물은 무엇인가 나쁜 것이어서 가보로 감추고 보호저장해 온 것이 아닙니다. 보물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보물을 감출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고 여기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한 사회라면 질식사할 것 같아서 아마도 모두가 벗어나려고 할 것입니다. 저도 이메일에 어떠한 범죄혐의가 될만한 내용은 아직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검찰이 제 이메일을 뒤진다고 해도 두려워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이메일 검열/공개하는 것을 반대하는 근거는 사적인 공간 확보는 인간의 “내적 자유”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생활 침해의 우려가 있는 곳에서는 내적 자유가 형성될 수가 없습니다. 남이 내일기장을 훔쳐 본다고 한다면 제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아마도 질식사 하기 전에 이 나라를 탈출하고 망명하고자 할 것입니다.

 

검찰의 편집증적 개인사생활 침해의 불법행위로 인해서 많은 국민들이 외국 서버 이메일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최소한 3개이상의 이메일 주소를 가지고 있고 이메일은 통신수단으로서 가장 필수적인 사항이 된 오늘날 사회에서 국민들이 통신수단의 자유로운 이용이 제약당하는 이런 현상이 말이 됩니까? 검찰의 불법행위로 인해서 선량한 국민들은 내적 자유를 파괴당하고 인간 사회 형성의 가장 기본 구조가 파괴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 사생활을 침해하고 자유스러운 개인 행복 추구를 크게 위협한 검찰의 개인 사생활 이메일 공개의 부당성에 공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높은 권력을 행사하는 고위공직자들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는 현실은 추악한 모습이 아닌가요?.

권력은 투명하게 작동되어야 하고 권력은 “견제와 균형”으로 절제되어야 합니다.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법격언을 기억합시다. 잘못된 권력은 비판받아야 마땅하고, 고위공직자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추상같이 일벌백계로서 다스려져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고위층의 부패가 난무하면 밑으로부터 국민 혁명

이 일어 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In retrospect, all revolutions seem inevitable. Beforehand, all revolutions seem impossible.” “뒤돌아 생각해 보면, 모든 혁명은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모든 혁명은 불가능하게 보인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조지 오웰의 경고를 다시 한 번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In a time of universal deceit, tell the truth is a revolutionary act. – George Orwell- "거짓과 사기가 판치는 세상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혁명적인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