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6월 29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카버스토리로 "페미니즘"의 변화를 다루었다. "페미니즘은 죽었는가?"라는 제목의 분석기사에서 페미니즘의 정치적 약화를 선언하였다.
"타임"지 분석의 의도성을 떠나서도 지금 서양의 현실적인 정치적 상황을 보면 "페미니즘"의 운동성은 그 위치가 매우 약화된 것이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약화된 서구 사회의 흐름은 인정하지만 캐서린 맥키논으로 대표되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주장은 어느 정도 지지하고자 한다.
맥키논처럼 "남성지배 권력"으로 보면 그것을 타도한다고 해서 인간성이 원초적으로 회복될지에 대해서는 나는 의문한다.
맑스의 계급타파가 실패한 바를 보면 더욱 그렇다.
우리 인간사회는 권력관계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맥키논의 주장이 실현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에서 예견한 바와 같이 지배권력만 바뀔 뿐이지 인간관계의 평등성과 인격성은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의 남성중심적 지배구조에서 발생하는 비인간적 권력문제의 심각성을 타파하기 위한 지도성으로써 맥키논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고 본다.
캐서린 맥키논은 섹슈얼리티의 구성은 남자와 여자의 구획이며 이는 섹스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라 설명하였다. 그녀의 의견으로 성희롱의 개념을 보면 성적 harassment는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맥락에서 성적인 요구를 부과하는 것이다.
"Desire and Power: AFeministPerspective" 에서 "우리는 성에 의한 구분을 이해하지 않고는 매일의 삶을 말할 수 없고 남성 지배의 형태를 이해하지 않고는 헤게모니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맥키논의 급진적 페미니즘의 견해를 그녀의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주장과 그 소송에 대한 것을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맥키논은 포르노를 남성 지배의 극단적 표현으로 인식한다. 포르노그라피를 통해서 남성 지배를 자연 스러운 것으로 이해하게끔 침투시키는 것이라고 그녀는 본다. 포르노그라피가 가부장제를 계속적으로 강화시키고 여성을 무력화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키논의 주장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 논문이 있던데 여기에 카피해 올린다.
오늘 맥키논의 책을 일견했는데 그녀의 책에서 일부 스캔해 올린다.
그녀의 저서 "Are women human?"에서 맥키논은 주장한다.: women are still treated more like "things" than people.
"[T]he fact that the law of rape protects rapists and is written from their point of view to guarantee impunity for most rapes is officially regarded as a violation of the law of sex equality, national or international, by virtually nobody."
“아직도 여성들이 인간인가? 여성들이 인간이었다면 컨테이어네 실려 타이에서 뉴욕의 사창가로 운송되는 물건이 되었을까? 언제쯤 여성들은 인간이 될 것인가? 언제?"
맥키논의 이런 주장에 내가 궁극적으로 제기할 질문 하나는 이거다: 맥키논은 버지니아 울프의 한계를 넘어설 것인가?
(***오늘 도서관에서 맥키논 책을 보니 지난 시절 공부할 그 때가 생각나서 일견해 본 거다. 아무튼 맥키논 주장을 요약하고 있는 한국의 논문 일부를 카피해 여기에 올려둔다. 몇 달 전엔 성노예 재판 (jury)을 방청했었는데 오늘 읽은 책 "fear"에서 논한 것과 같이 우리 현재 사회가 리스크 문화 abuse 문화를 심각하게 생각해 본다.)
"여성이 짐 나르는 짐승이나 성적 노리개로 취급 받던 시대는 끝났다. 바야흐로 여성 리더들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시대가 도래했다. 여성의 지위 향상이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실로 엄청나다. 정부 당국은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는 정책들을 펼쳐야만 한다. 머지않아 성 노예, 명예 살인, 염산 테러도 전족의 악습처럼 기억에서 희마하게 사라질 것이다. 그러한 변혁이 얼마나 오랫동안 진행될 것인지, 또 변혁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납치되어 사창가로 끌려가느냐가 문제이다. 역사적 흐름에 동참하느냐 방관자로 머무느냐는 우리들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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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변화하고 있는 정보기반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든지 간에, 우리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구분은 계속 변화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점점 더 서로 얽히는 현상은 20세기 서구사회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국가가 "사적인” 영역으로 계속 침투해 들어가고, 더욱 극적으로 시장이 "사적인' 영역에 지속적으로 침투할 뿐 아니라, 반대로 "사적인” 문제들이 정치영역을 압박해 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성(gender)과 관련된 문제에서 매우 분명히 드러나며, 페미니스트들이 이러한 문제를 가장 열심히 분석하고 있다.
물론 페미니스트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정치적, 지적 스펙트럼을 망라한 성분이 다양한 집단이다. 단순화한다면, 이러한 다양성은 보통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와 급진적 페미니스트로 양분된다. 이러한 이분화는 공적/사적 분열에 관한 몇 가지 입장을 논의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수용한다. 그들은 절차적 평등(법 앞에서의 평등)과 평등한 권리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며, 페미니즘의 목표는 성차별을 없애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공적 영역은 남성 지배적이었으며, 여성은 투표를 할 수 없었고 오직 가정 일에만 헌신하도록 기대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비판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전체 구조를 파괴하지 않고서도 공적 영역의 성적 편견이 교정될 수 있다고 본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게는 그러한 희망이 순진하게 보인다. 그들은 사실상 부르주아 공적 영역이란 개념은 그 기원이나 지속의 과정에서 남성 지배에 의존해 왔다고 주장한다(Benhabib, 1987; Fraser, 1992; Pateman, 1989). 공적인 차원의 남성간 평등은 사적인 차원의 남성 지배에 기초하고 있다. 남성들이 동동한 시민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가정의 군주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계선이 전통적으로 남성적인 것과 전통적으로 여성적인 것 사이의 경계선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같은 적절한 이름 붙이기는 가부장제의 주요한 장치 가운데 하나이다.
로크, 루소, 제퍼슨 등 17세기와 18세기의 사상가들이 여성을 배제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만들어졌다"고 하는 경구는 남성들에게만 적용되었다. 매리 울스톤크래프트처럼 자유주의 이론이 안고 있는 이같은 결함을 수정하고자 노력했던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무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단지 여성들을 끼워주기만 하면 해결되지 않겠는가?
반대로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이렇게 할 경우 여성이 배제되고 있는 사실을 깨닫기가 더욱 어려워질 뿐이라고 주장한다. 공적 영역에서 성적 편견을 없애는 것은 표피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사적 영역에서의 불평등이 항존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인종적 및 민족적 소수집단에 대한 억압과는 달리 사적인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발생한다. 그렇다면 사적인 문제를 공개적 토의에 부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기구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억압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절차적 권리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여기에 대응한다. 하나의 분리벽이 종교를 국가로부터 보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gender)과 성애(sexuality) 주위에 하나의 장막을 둘러쳐야 한다. 성공적으로 인정을 받고 힘을 얻게 된 집단은 개인 자격으로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피부 색깔, 언어, 소득 등 그들의 집단적 특성을 사적인 영역에 맡김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사적인 영역은 종교가 이미 포함되어 있는 공간이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가정적 상황(예컨대 편모라든가 하는)이 차별을 위해 이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편모의 이해관계가 공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성이 여성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하는 것은 공장주가 제조업자집단의 이익을 증진시키려 하고, 농부가 농민집단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정당하다.
자유주의적인 페미니즘과 급진적인 페미니즘 간의 불화는 매체와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에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특히 포르노그라피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캐서린 맥키논(MacKinnon, 1993)에 의해 대표되는 일군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게 포르노그라피는 남성 지배의 극단적 표현으로 보인다. 포르노그라피는 남성 지배를 마치 그것이 자연 스러운 것인 양 사적인 배경 속에 제시한다. 그렇게 하면서 그것은 여성을 침묵시키며, 『목구멍 깊숙이(Deep Throat)』에서처럼 여성이 무대에 등장할 때에도 아무런 발언을 하지 못하도록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프라이버시권에 근거하여 포르노그라피 규제를 반대하는 주장을 맥키논은 거부한다. 포르노그라피가 단지 개인적 관심거리일 뿐이라는 변명은 포르노그라피가 계속 가부장제를 강화시키고 여성을 무력화시키는 등 그것이 수행하고 있는 주요한 기능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포르노그라피의 작용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호소에 의해 신비화된다고 맥키논은 주장한다. 포르노그라피는 사실상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다. 그리고 보통 무제한적으로 함께 나눌 수 있다고 생각되는 표현과는 달리, 권력은 영(zero-sum) 게임[한 사람이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이 적게 가질 수밖에 없는 식의 게임이다. 한 개인이나 집단은 오직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희생 위에 권력을 소유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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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2.] 음란물 또는 포르노그래피 소고
조국 [서울대학교 法學 제44권 제4호 : 141∼162
I. 들어가는 말
1980년대 초 미국에서 전개된 급진적 여성주의는 강간, 성매매와 함께 포르노그래피를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음란물’의 규제와 처벌문제를 헌법 수정 제1조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freedom of expression)와의 길항관계를 고려하며 판단해왔고, 미
국 사회의 도덕적 우파,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연방대법원의 “진보적” 기준에 대해 불만을 갖고 ‘음란물’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옹호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전혀 뜻밖의 원군을 얻게 된 것이다. 보수주의와는 거의 모든 면에서 대척적(對蹠的) 위치에 서 있는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이 포르노그래피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현행 법체제는 ‘음란물’(淫亂物) 처벌을 위한 법률을 구비하고 있으며,1) 이러한 법률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는 이른바 “하드 코어(hard-core) 포르노그래피”는 물론이고, “소프트 코어(soft-core) 포르노그래피” 역시 처벌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처벌은 종종 문학, 예술의 자유 등 ‘표현의 자유’(freedom of
expression)를 침해하는 양태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근 급진적 여성주의에 입각한 포르노그래피 반대운동의 문제의식이 우리나라에도 수입되기 시작하였다고 보인다.2) 즉, 포르노그래피를 성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로 파악하고 이에 대한 단호한 법적 개입을 강조하는 입
장이 한국 여성주의 내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음란성’ 판단기준이 안착된 미국 사회에서 등장한 급진적 여성주의의 포르노그래피 반대운동의 문제의식이, ‘표현의 자유’를 무시․경시하는 ‘음란성’ 기준이 안착된 한국 사회에서는 어떻게 수용되어야 하는 가를 검토하기로 한다. 이하에서는 ‘음란성’에 대한 한국 법원의 판단기준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급진적 여성주의의 문제의식과 문제점을 검토한 후, ‘표현의 자유’의 보장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를 고려할 때 음란물 또는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어떠한 법적 태도가 필요한지 의견을 제시하기로 한다.
………….
Ⅲ. 급진적 여성주의의 반포르노그래피 운동의 의의와 문제점
이상에서 도덕적 엄숙주의에 의거한 ‘음란물’ 판단과 처벌은 필연적으로 문학․예술의 자유의 위축을 초래할 수밖에 없음을 보았다. 그런데 1980년대 초 미국에서 등장한 급진적 여성주의는 전혀 다른 관점에 서서 음란물 또는 포르노그래피와의 투쟁을 전개해오고 있다. 포르노그래피를 여성에 대한 억압과 성차별
의 일환으로 보는 이러한 입장의 의의는 무엇이고, 또 그 문제점은 무엇인가?
1. “남성지배의 성애화(性愛化)”인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비판
― 드워킨과 맥키넌의 입장을 중심으로
급진적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포르노그래피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논자는 안드레아 드워킨과 캐써린 맥키넌이다. 이들은 포르노그래피를 선과 악을 논하는 “도덕”이 아니라 권력과 종속을 논하는 “정치”의 관점에서 분석․비판한다. 즉, 기존의 ‘음란성’ 판단은 여성의 종속과 비하의 문제는 고려하지 않고 남성의 성욕
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폐기되어야 하며, 포르노그래피는 그에 따라 침해받고 종속되는 여성의 입장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38)
그리하여 급진적 여성주의는 포르노그래피를 여성을 비하․성적 대상화하고 여성의 비인간화․종속을 성애화하여 여성의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남성권력의 실천으로 파악한다. 작가인 드워킨의 정의를 빌자면, 포르노그래피는 “성적 파시즘과 성적 테러리즘의 선전”,39) “여성에게 선포하는 전쟁이며, 인간의 존
엄이나 자아 그리고 인간적 가치에 대한 끝없는 공격”,40) “남성의 권력과 증오․소유권․계급제도․새디즘․우월성이 성욕으로 표현된 것”41)인 것이다. 그녀의 굳건한 동지이자 법학교수인 맥키넌 역시 포르노그래피를 “강요된 성교의 한 형태”이며 “성적 불평등의 제도”라고 파악하며, “성매매와 함께 남성지배(male
supremacy)를 제도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42) 맥키넌은 말한다.
“포르노그래피는 강간, 폭행, 성희롱, 성매매 그리고 아동학대를 성애화(sexualize)하고, 그럼으로써 이러한 행위들을 축하, 조장, 승인, 정당화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포르노그래피는 이러한 행위 모두의 동적인 공통점(dynamic common)인 지배와 복종을 에로틱하게 만든다.”43)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급진적 여성주의는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강력한 제재
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시한다. 이는 특히 맥키넌에 의해 이론화되는데, 그녀는
먼저 포르노그래피를 특정 사상이나 견해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기존
의 법적 해석을 거부한다. 그녀는 포르노그래피는 그 자체가 성적 학대이므로 그
본성은 “표현”이 아니라 “행위”이고 따라서 헌법적 보호의 대상이 아니며, 포르
노그래피는 성폭력을 조장․야기하는 해악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포르노그래피에서 여성들은 윤간 장면을 찍기 위해 윤간 당한다. 여성들은
윤간이라는 생각에 의해서 윤간당하는 것이 아니다. 섹스영화를 만들려고 여성
을 폭행하고, 성기를 삽입하고, 사지를 묶어 재갈을 물리고, 옷을 벗기고, 음부
를 벌려 래커와 물을 뿌리는 것은 포르노그래피 때문이지 거기에 담긴 사상 때
문이 아니다. … 포르노그래피를 보고 만들어진 남성, 포르노그래피를 보고 바
뀐 남성, 포르노그래피를 보고 충동을 느낀 남성들이 여성을 공격한다.”44)
그리고 맥키넌은 표현의 자유에 기초하여 포르노그래피의 제작, 판매, 시청을
허용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남성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여성에 대한 차별과 복속
이 용인될 수는 없다고 비판한다. 맥키넌은 반문한다: “수정헌법 제1조의 이름으
로 보장되는 남성의 이익과 쾌락에 반대하기 위하여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성들
의 몸뚱아리가 더 쌓여야 된단 말인가?”45)
이상과 같은 급진적 여성주의의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비판은 반포르노그래피
입법운동으로 전개된다. 맥키넌과 드워킨은 상술한 ‘Miller 판결’의 “지역공동체”
기준을 활용하여 포르노그래피를 금지하기 위하여, 전국적 차원의 법률이 아니라
특정 지역을 규율하는 시조례(Ordinance) 제정운동의 전략을 택하였다. 이들의 입
장이 반영된 ‘반포르노그래피 시조례’는 1983년 미네아폴리스에서 최초로 만들어
졌으나, 이 조례는 시장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입법화되지 못하였다.46) 그러나 1984년 인디애나폴리스에서는 조례 제정이 성공한다. 두 시의 조례는 대동소이하
므로, 입법화되고 이후 법원에서 위헌 여부가 다투어진 인디애나폴리스 시조례의
내용을 보기로 하자.
먼저 인디애나폴리스 ‘반포르노그래피 시조례’는 포르노그래피를 “이하의 요소
중 하나 이상을 포함하고, 그림 또는 문자로 표현된 것으로 그래픽 방식으로 그
리고 성적으로 명백한 방식으로 여성을 종속시키는 것”47)이라고 정의한다. 즉,
(i) 여성이 고통이나 수치(humiliation)를 즐기는 성적 대상(sexual objects)으로
묘사된 경우,
(ii) 여성이 강간당하면서 성적 쾌락을 느끼는 성적 대상으로 묘사된 경우,
(iii) 여성이 묶여있거나 옷이 찢기거나 절단되거나 신체에 상해를 입은 상태에
서 성적 대상으로 묘사된 경우,
(iv) 여성이 물건이나 동물에 의해 삽입되는 것을 묘사한 경우,
(v) 여성이 모욕, 상해, 고문의 시나리오 속에서 저질․저급(filthy or inferior)
하거나, 피 흘리거나, 타박상을 입거나, 또는 상처를 받도록 묘사되며, 이
러한 상황이 성적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경우,
(vi) 여성이 지배, 정복, 폭행, 착취, 소유, 또는 사용을 위한 성적 대상으로 묘
사되거나, 노예, 성적 복종 또는 전시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 등.48)
이상의 여섯 가지 요소에서 여성 대신 남성, 아동, 성전환자가 사용되는 경우
도 동일하게 포르노그래피로 정의된다.49) 맥키넌은 이상의 요소가 없는 성적 표
현물은 “에로티카”(erotica)로 인정될 수 있다고 보지만,50) 드워킨은 “에로티카”도
“포르노그래피의 하위범주”라고 보고 있다.51)
동 조례는 이상과 같이 정의된 포르노그래피를 제작, 판매, 전시, 반포하는 행위, 포르노그래피적 연기, 포르노그래피의 강요, 포르노그래피를 원인으로 한 폭
행 등을 불법으로 규정한다.52) 그리고 “여성의 복종에 반대하는 여성으로 행동하
는” 여성과 포르노그래피로 여성이 입힌 만큼 피해를 입었음을 입증한 남성에게
포르노그래피의 금지를 신청할 권한이 있으며,53) 이러한 신청에 대하여 법원은
행정당국으로 하여금 금전적 배상 또는 포르노그래피의 배포를 금지하는 가처분
이나 명령을 내릴 수 있다.54) 이 조례 자체에는 형사법규는 아니지만 “포르노그
래피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성차별에서 구제되길 바라며 고소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놓은 것이다.55)
한편, 이러한 “여성파괴적 포르노그래피”는 물론이고, 이 보다 정도가 약하다
할지라도 여성을 조금이라도 비하, 대상화, 왜소화하는 것은 모두 금지시켜야 한
다는 입장도 존재한다. 이들은 센티멘탈한 연속극, 로맨스 소설, “마초”적 스파이
영화 등도 여성의 종속과 남성의 지배를 전파하는 것이므로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56)
2. 의의와 문제점
이상과 같은 급진적 여성주의의 포르노그래피 비판은 그 이전의 ‘음란물’ 판단
에서 누락되어 있었던 여성의 종속의 문제를 전면화하였다는데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자유주의자는 포르노그래피를 관능을 금지에서부터 해방시키는 자유의
문제라고 정당화하지만, 다수의 포르노그래피는 남성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지고, 그 속에 여성은 철저하게 종속적인 존재, 학대와 굴욕을 즐거워하는
존재로 설정되며, 제작과정과 소비과정에서 여성은 고통과 모욕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하여 급진적 여성주의는 처절한 고발을 행한 것이다. 사실 다수의
포르노그래피가 이른바 “강간신화”(rape myth)57)에 기초하여 만들어지고, 또한 이를 조장하고 있음은 쉽게 확인될 수 있다. 요컨대, 급진적 여성주의가 기존의 ‘음
란물’ 판단기준에는 남성중심의 호색적 흥미가 중심이 되어 있고 여성에 대한 착
취와 모멸의 문제는 탈락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여성의 기본권 침해라는 구체적
인 금지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급진적 여성주의의 입장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포르
노그래피 일반이 성폭력을 조장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로빈 모간은 “포르노그래피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다”58)라고 단언하고
있지만, 많은 학자들의 실증연구와 국가 차원의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해악성(害
惡性)에 대한 연구는 폭력적 “하드 코어 포르노그래피”나 아동포르노그래피의 경
우는 성폭력과의 인과관계가 인정되지만, 그 외의 포르노그래피와 성폭력을 인과
적으로 연결시킬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59) 그리고 포르노그래피를 합법
화한 덴마크, 스칸디나비아 국가, 독일의 경우 합법화 이후 강간발생율이 오히려
떨어졌음이 확인되고 있기도 하다.60)
요컨대, 포르노그래피와 성폭력간의 인과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메타포” 수준
의 “통속적 인과관계”(folk causation)를 말하는 것 뿐으로 보인다.61) 그러나 오정
진의 지적처럼, 포르노그래피를 보면 성적 흥분이 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흥분이 바로 성폭력으로 직결된다는 볼 수 없으며, 성폭력 근절은 포르노그래피
와 성폭력을 연계시키는 사회적 조건 ― 예컨대 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존중의 결여 등 ―을 종식시키는 것이 진정한 해결이라 할 것이다.62)
둘째로, 급진적 여성주의가 도덕적 보수주의자와 동맹을 맺고 있다는 비판이
다.63) 급진적 여성주의의 포르노그래피 금지요청은 “여성을 희생자인 동시에 성
욕이 없는 존재로 묘사하고, 궁극적으로 성전반의 억압을 유도”64)하는 것이며,
여성을 피해자의 지위로 고착시키고 성문제에 있어서 여성의 수동성을 강화한다
는 것이다.65) 실제 급진적 여성주의는 이성간의 성교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
하고 있다. 드워킨은 자신의 소설 성교 (Intercourse)에서 이성간의 성교는 “여성
을 심리적으로 열등하게 만드는 수단”이며, 열등함 속에서 성교의 쾌락을 즐기는
여성은 “협조자”(collaborator)라고 낙인찍고 있으며,66) 맥키넌도 “성교의 쾌감은
자신의 복종을 즐기는 것”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67)
포르노그래피에는 분명 남성지배를 성애화하는 측면이 강하게 존재하지만, 또
한 “전통적 성적 습속을 경멸하고 성적 위선을 조롱하며 성적 욕구의 중요성을
강조”68)하는 측면도 있는데, 이 속에 여성종속의 요소가 있다고 하여 무차별적으
로 전면 금지하는 것은 “여성은 단지 희생자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
고, 성을 욕망하고, 추구하고, 즐기는 행위자”69)임을 무시하고 있다. 요컨대, 급진적 여성주의는 “모든 여성이 포르노그래피에 대해 동일하게 비판적인 입장을 가
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 포르노그래피를 여성억압의 중심에 둠으로써 다른 페
미니스트 의제를 쓸어버리고 새로운 도덕적 순결운동을 창출했다”는 비판은 수
긍이 간다.70)
이상의 두 가지 비판점은 사회학, 범죄학이나 여성학의 영역이므로 보다 상세
한 논의는 필자의 능력 밖이지만, (형)법학의 관점에서 필자가 특별히 주목하고
자 하는 것은 급진적 여성주의의 포르노그래피 비판을 수용할 경우 필연적으로
문학․예술의 자유의 침해가 예상된다는 점이다. 물론 맥키넌은 “여성이 종속되
어 있다면 그 작품이 다른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 왜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
는가?”71)라고 강하게 반발할 것이다.
그렇지만 “맥키넌 식의 검열체제(censorship regime)에 내재해있는 해석문제”72)
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상술한 인디애나폴리스 시조례식의 포르노그래
피에 대한 규제․처벌의 기준에 따르면, ― 남녀간의 “평등한” 성행위를 묘사하
는 “에로티카” 이외에는 ― “하드 코어 포르노그래피”, “소프트 코어 포르노그래
피”는 물론, 여성비하․차별적 성적 표현이 들어 있는 상당수의 문학․예술작품
이 포르노그래피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다. 맥키넌이 용인하는 “에로티카”의 모습
이 불분명하고, 반포르노그래피 조례가 사용하는 “성적 대상”, “성적 복종”, “수
치”, “저질․저급”, “지배”, “정복” 등의 용어 자체가 추상적이므로 국가권력의
남용이 예상되는 것이다. 인디애나폴리스 시조례 자체는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형
사처벌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급진적 여성주의의 시각을 한국 현실에 적용
하게 되면 바로 ‘음란물’ 처벌을 규정한 형법의 동원을 초래하는 것이기에 각별
한 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2002년 개봉되어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은 김기덕의 영화 <나쁜 남자>를
예로 들어보자. 이 영화에서 깡패가 평범한 여대생을 창녀로 만드는데, 이 여성
은 남성이 부여한 자기정체성을 수긍하고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남성을 도리어
측은하게 여기는 모습이 묘사되었던 바, 국내 여성주의 진영에서는 이 영화가
“모든 여성에게 가해지는 ‘공적 테러’”73)이라고 강력한 비판을 가하였다. 대표적으로 주유신은, 김기덕의 영화는 “여남간의 불평등과 적대성, 여성의 성과 신체
에 대한 극단적인 공격과 침해를 끈질기게 정당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타자들
에 대한 어떤 성찰도 갖고 있지 않은 무책임한 사회적 배설 행위”이며 “페니스
파시즘”의 소산이라고 맹공을 가한 바 있다.74) 생각건대, 상술한 인디애나폴리스
시조례에 따르자면 이 영화는 적어도 상술한 (i), (v), (vi)의 요소에 해당되어 반
여성 포르노그래피로 규정되고 영화제작자, 감독, 상영관 업주 등은 각종의 제재
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상술한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와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 도
포르노그래피로 규정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심청이 겪은 ‘매춘의 오디세이’를 통
해 남성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헤쳐 나가는 그녀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한 황석영
의 신작 심청 도, 망가져가는 남창(男娼)의 삶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를 통하여
우회적으로 남성지배 사회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 신이현의 신작 잠자는 숲 속
의 남자 도 포르노그래피의 낙인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외국의 예를 들자면, 여성에 대한 강간과 성폭행의 세계를 상세히 묘사하여 독
자로 하여금 폭력적 이미지가 바로 여성에게는 성적 현실이 되는 세상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도록 하였다는 평가를 받는 카렌 핀리(Karen Finley)의 작품, 실제
발생한 합동강간(gang rape)을 기초하여 만들어진 여성주의 정치활동가 수 코
(Sue Coe)의 작품 등도 반여성적 포르노그래피의 혐의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75)
그리고 여성의 외음부를 꽃처럼 묘사한 죠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작품,
여성의 성기를 은유적으로 묘사한 접시를 전시한 쥬디 시카고(Juddy Chicago)의
작품 <디너 파티>(Dinner Party) 등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전락시킨 반여성적
포르노그래피의 낙인을 받을 위험성이 있을 것이다.76)
또한 역설적이지만 이 기준에 따르면 급진적 여성주의의 여걸인 드워킨의 소
설도 포르노그래피로 판정될 수도 있다는 실험결과가 나온 바 있다.77) 그녀의 소
설 얼음과 불 (Ice and Fire, 1986)에는 여성이 자신의 남편에게 자신을 고문하
도록 가르치는 장면이 나오고, 자비 (Mercy, 1991)에는 여성이 강간당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 카나다 연방대법원은 1992년 ‘Regina v. Butler 판결’78)
에서 카나다 형법상의 음란물처벌조항79)의 합헌성을 인정하면서 포르노그래피가
여성에 해악을 끼친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여80) 급진적 여성주의로부터 찬
사를 받았으나,81) 이 판결에 따른 법집행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이 판결
에 의거하여 수사기관이 압수한 표현물에는 여러 여성주의적 표현물 ― 레즈비안
잡지와 드워킨의 저작을 포함한 ―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82)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인디애나폴리스 시조례의 위헌성을 검토하였던 미국
연방항소법원은 여성종속의 묘사가 그 종속을 영구화하게 된다는 이 조례의 문
제의식에는 일정하게 동의하였지만,83) 이 조례에서 정의된 포르노그래피의 정의
가 명확하지 않고,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반대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서서 동 조례의 위헌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상술한 1992년의 ‘Butler 판결’도 (i) 문학적․예술적 또는 그와 유사한
목적의 성표현물은 ‘음란물’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하고, (ii) 포르노그래피의 사
적인 소유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던 바, 이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
다.84)
Ⅳ. 맺음말
‘음란물’ 또는 포르노그래피의 핵심은 여성이 억압, 대상화, 비인간화되는 속에
서 남성지배가 성애화되는 것이라는 급진적 여성주의의 통찰은 탁월하며, 기존의
성도덕 중심의 ‘음란성’ 판단의 남성중심성과 추상성의 문제점을 여지없이 드러
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급진적 여성주의의 시각이 일체의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규제와 검열, 나아가 형사처벌을 요구하는 쪽으로 전개된다면 필연적으로 문학․예술의 자유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음란물’ 또는 포르노그래피의 문제를 성도덕 수호의 문제로 보는 도덕
주의적 입장에 반대하지만, 또한 남성지배와 여성종속의 표현 여부를 기준으로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규제․처벌을 추구하는 급진적 여성주의의 입장에도 반대
한다. 각 입장은 서로 간에는 판이한 잣대로 대상물에 대한 규제․처벌 여부를
결정하지만, 서로 공통된 점은 각각의 잣대에서 어긋나기만 하면 “하드 코어 포
르노그래피”, “소프트 코어 포르노그래피”, 문학성․예술성 등을 세밀히 따지지
않고 일률적으로 ‘음란물’ 또는 포르노그래피라고 규정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때 형벌권을 휘두르는 국가로서는 각 입장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으며, 어느 입
장을 원용하건 간에 처벌의 폭을 넓힐 수만 있다면 만족할 것이다.
필자는 (i) 강간, 고문, 폭행, 상해 등을 포함하는 “폭력적 성표현물”, (ii) 시체
와의 성교, 동물과의 성교 등 폭력은 행사되지 않지만 인간의 지위와 품위를 저
하․손상시키는 성표현물, 또는 일방의 성을 다른 성의 종속적 대상으로만 묘사
하는 성표현물, (iii) 아동 포르노그래피 등 인간존엄 내지 인간성을 왜곡하는 “하
드 코어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형사처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85) “하드 코어
포르노그래피”도 ‘표현의 자유’의 일환일 수 있겠으나, 그 자유가 헌법상 최고의
기본권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제10조)를 침해하면서까지 보장될 수는 없는 법
이다. 사실 급진적 여성주의의 요청은 이상의 부류의 성표현물을 처벌해야 한다
는 주장으로 흡수될 수 있다.
그러나 급진적 여성주의와 필자의 차이는, 필자는 포르노그래피 여부를 판단하
는데 있어 당해 성표현물의 예술성․사상성에 대한 판단이 선결되어야 하며, 그
판단은 급진적 여성주의가 독점할 수는 없고, 그 성표현물의 예술성․사상성이
인정되면 설사 그 성표현물 속에 포르노그래피적인 요소가 들어 있더라도 (형)법
적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급진적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볼때 반여성적 요소가 있는 문학․예술도 분명 문학․예술이며, 그 반여성적 성격
에 분노하여 문학․예술 자체에 대한 금압을 시도해서는 안된다. 문학․예술에 대하여 ― 영어식 표현을 사용하자면 ―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작품만을 만들라고 강제할 수는 없는 법이며, 해당 작품의 반여성성에 대한 해결은 (형)법 동원이 아니라 논쟁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86) 이러한 맥락에서 필
자는 다음과 같은 ‘미국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회장인 네
이딘 스트로센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
“여성은 자유와 안전, 언론과 평등, 존엄과 섹슈앨리티 각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서는 안된다. 여성은 우리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성적 존재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안전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성교의 흥분과 성적 표현을 즐길 자격이 있다. …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는 여성에게, 빅 시스터는 빅
브라더 만큼 환영받지 못한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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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外大語文論集 第14輯
섹슈얼리티의 영화적 진실 15
+
섹슈얼리티의 영화적 진실*
최 춘 식**
I.
오늘날 섹슈얼리티1)의 문제는 섹스와 페미니즘, 동성애는 물론 이를 둘러싼 권력과 정치, 그리고 욕망의 이론과 결합되어 현대성의 한 단층을 형성하고 있다. 프로이드나 라깡의 정신분석학과 푸코의 담론과 결합되어 1960년대 이후 윤리적 정치적 거대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섹슈얼리티는 이제 인간의 성이란 사회적 힘이 제한해야 하는 하나의 충동도, 자연적 본능도 아닌 권력의 전이 지점이며 더 이상 사회 문화적인 억압과 검열의 장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넘어서려는 유혹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권력과 욕망의 접점이자 금기의 제거와 그 위반으로 해석되는 포르노그라피를 다룰 때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외에도 섹슈얼리티는 섹스와 젠다와 관련된 복잡한 논의와 해석을 낳고 있어서 그 개념의 증식과 확산은 담론의 경계를 지워나갈 정도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이 섹슈얼리티라는 용어는 원래 서구에서 19세기말에 대두된 성과학과 정신분석학과 더불어 프로이트에 의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현대적 의미의 사용은 푸코의 연구로 촉발되고 이를 통해 성에 대한 전통적 인습과 인간의 성을 억압하는 권력 내지 그 지배 형식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가능해 졌던 것이다. 푸코가 밝혀낸 성의 역사에 의하면 섹슈얼리티는 사회구조와 그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에 의하면 근대권력은 피지배자의 의식적 동의나 합의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별 신체에 새겨지는 규격화 내지 개별화를 통해 지배구조를 강화해 왔다. 예컨데 부르조아 계급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건강한 성, 정상적인 성을 규정하거나 강제함으로써 스스로를 권력화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의 그물망이자 사회적 구성체로서 '마냥 불확실하고 은밀한 것'만 아니라 바로 사회학적인 권력의 문제와 연결되는 함의를 갖고 있다.
이 사실은 인간의 섹슈얼리티가 문명의 발달로 갈수록 억압받고 있으며 그 표현 또한 사회문화적인 맥락속에서 통제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소위 푸코적 억압가설에 따르면, 현대의 제도들은 그것이 제공하는 혜택만큼 인간은 어떤 대가, 곧 억압의 증대를 지불하도록 되어있다. 인간의 문명은 기율을 의미하고, 기율이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세운 여러 제도 내부에 내재되어야 한다. 기율권력은 감옥과 수용소의 특성일 뿐 아니라 나아가 기업, 학교 혹은 병원과 같은 조직의 특성이다. 이 기율권력은 순종적 육체, 곧 충동의 유발에 따라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보다는 통제되고 규제받는 육체를 생산한다. 권력은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제한하는 힘이다. 또한 권력은 쾌락을 생산하는 도구이며 단순히 쾌락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섹슈얼리티는 사회가 물리적으로 그 힘의 행사를 제한해야 하는 본능적 충동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특별히 조밀한 권력의 전선이자, 그 권력과 융합됨으로써 발생되는 에너지를 통해서 사회통제의 핵심으로도 이용될 수 있다.2)
그러나 또 한편 섹슈얼리티는 인간으로 하여금 실재하는 존재로 체험케 하는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정념과 몰입감의 바탕을 이루는 섹슈얼리티는 남성과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정상과 비정상과 같은 정체성과 자아의식을 부여한다. 푸코의 말처럼, 섹슈얼리티는 우리 존재의 진리일 수 있다.3) 그리고 이런 섹슈얼리티는 제프리 윜스에 의하면 두가지의 주요한 관계의 축들이 접합하면서 만들어진다. 그 하나의 관계축은 우리의 주체성과의 관계 즉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인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와의 관계축이다. 이 두가지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이유는 양자 모두가 그 한가운데에 육체와 그 잠재성을 위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4)
여기서 우리는 특별히 인간의 육체가 제기하는 문제, 더 나아가 남성/여성이라는 성적 차이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의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 또는 그 차이는 섹슈얼리티의 물리적인 입구이자 동시에 출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를 둘러산 계급의식의 생산 거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역사적으로도 육체가 자율적이고도 자의식적인 대상으로 전환되거나 점차 세속적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는 시점에서 부르조아 사회의 내부에서 이 섹슈얼리티 문제는 아주 심각한 것이었다. 푸코조차도 섹슈얼리티라는 관념은 부르조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부르조아들은 18-19세기를 경과하며 하층민 사이에 만연된 부도덕함과 귀족의 타락에 맞서, 성을 자기 계급을 정의하는 한 측면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는 자신의 형상에 따라 정치를 재주조하고자 했던 식민적 신념체계에 다름아니었다.5) 그리고 이들에 의해 발전된 성계급 의식은 남성/여성으로 이분화되고 이렇게 분화된 성의 세계는 숱한 지배와 예속의 구조 속에 놓이게 된다. 그 중에서도 남성/여성이라는 성적 차이는 각종 공식적인 교육과 제도를 통해 정교하게 조작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여성을 억압하는 강력한 요인으로 부각되었을 뿐만 아니라, 섹슈얼리티를 포함한 성이란 남녀사이의 권력관계의 반영임은 물론 그 권력관계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관건이라는 주장이 여성해방론자를 중심으로 유포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여성의 성적 유형은 남성권력의 억압과 범주화 작업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된 것이다.6)
이런 주장의 바닥에는 빅토리아왕조(1837-1901)시대의 엄격한 윤리의식에 대한 비난이 항상 따라붙는다. 즉, 이 시대의 여성은 성적인 욕망을 가져서는 안되고 오히려 남성들은 여성의 욕망을 억압하도록 공적인 교육을 받았다. 심지어 결혼한 부부라도 성교의 기회를 줄여 여성들의 성적인 욕망을 통제하려 함으로써 전통적인 윤리강령에 의한 남녀의 구분을 철저하게 강요했던 시대였다. 특히 이 시대의 남성들은 언제나 독립적이고 독단적이기를, 또한 슬픔이나 감정이입과 같은 약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되도록 길러지는가 하면, 반대로 여성들은 남성들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굴종하도록 사회화 되었다. 그 결과 여성들은 결혼생활 내에서만 성관계를 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반면, 남성들은 어느 상황에서나 마음대로 성관계를 할 수 있는 이중적인 기준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성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사회학적 생물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서구사회에는 1920년부터 인간의 성행동의 변화가 찾아온다. 말하자면 이전의 남/여 간의 이분법적 권력관계가 도시화, 산업화의 영향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보다 안전한 성생활을 위한 피임법의 광범위한 유포와 교육, 그리고 여성의 평등사상 대두및 대중매체를 통한 성의 자유사상 고양 등이 결정적으로 기여했었다. 그 결과 오늘날 적어도 사회적 외양으로는 남/여간의 또는 섹슈얼리티 상의 차별이나 구별이 거의 없는 건강한 사회의 모습을 갖췄다고 평가하는 것이 대중들의 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적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은 남/여의 성적 불평등과 억압은 여전히 잔존해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 즉, 가부장적 사회를 지향해 왔던 근대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 사회와 인간 무의식의 저 깊은 곳에 성적 불평등이나 억압구조가 너무 심화되거나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화는 상당히 힘든 것으로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참여와 권리가 신장되었다고 하더라도 남/여간의 섹슈얼리티상의 권력관계는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주장들이 아직도 여성운동가들 사이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비록 20세기 초 프로이트에 의해 이 성적 억압이 깨뜨려졌다고 서구사회는 믿지만 말이다.
Ⅱ.
포르노그라피는 바로 이 남/여간의 성관계, 즉 섹슈얼리티의 발화에 있어서 남성 지배적인 불평등하고도 억압적인 권력관계를 가장 노골적이고도 직접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여성운동가들이 맹렬하게 공격하는 쟝르다. 또 포르노가 보이고 있는 이런 비윤리성이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제재나 금기를 강화시키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포르노가 이토록 비난과 제재를 받는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남성의 성적 욕구가 동물적이며 폭력적인 것으로 묘사되거나 그것으로 넘쳐나게 하는데 있으며 이를 여성에 대한 지배와 억압으로 장식하고 있는 데 있을 것이다.
포르노를 남성의 지배 권력이 여성에게 행사되는 장으로 규정한 안드레아 드워킨7)의 주장은 많은 여성운동가들의 시각을 대변한다. 그들은 포르노가 섹스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향한 폭력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여성의 파편화 내지 물신화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까지 훼손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다. 드워킨에 의하면 포르노는 여성이 상처받고 모욕당하는 걸 원하는 것처럼 묘사할 뿐만 아니라 그 속의 여성은 남성이 규정하는 대로 암캐내지 매춘부로 그려지며, 그런 여자야 말로 진짜 여성이라는 악의에 찬 주장이 반복되고 있다고 공격한다. 포르노란 한마디로 여성을 성적으로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악랄한 도구라는 것이다. 사실 포르노가 그리는 남/여의 성관계를 뜯어보면 성의 주체는 남성이요 여성의 역할과 지위는 어디까지나 남성의 억압과 지배를 받는 존재로 무조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아무리 봐도 포르노는 남자가 누리는 권력의 상징이자 그가 가진 동물적 근성의 예찬만 늘어놓고 있다. 따라서 포르노는 남/여의 권력관계에 대한 노골적인 비유일 뿐이다.
캐서린 맥키논도 최근의 글에서8) 포르노가 여성의 본성을 남성들이 섹스에서 바라는 것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고 비난하고 불평등을 섹스로 만들면서 동시에 지배와 종속을 섹스화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불평등이야 말로 포르노의 핵심적 역학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포르노는 지배와 종속의 에로티즘화를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구성과 결합함으로써 남성 우월적 성욕을 제도화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gender이 성적인 sexual인 한에서, 포르노는 그런 성욕의 의미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포르노에서 남성들은 그들이 여성의 본성이라 보는 대로 여성을 다루며 또한 권력을 행사한다. 이는 바로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방식에 의해 여성의 존재가 규정된다는 뜻이며 이것이 바로 포르노의 방식이자 성적 현실이다. 따라서 포르노는 어떤 다른 곳에서 구성되어 현실과 모종의 관련을 맺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며 왜곡, 반영, 투사, 표현, 환상, 재현, 상징도 아니라는 것이다.
맥키넌은 나아가 중요한 것은 포르노 자체가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제공하는 방식에 있으며, 포르노는 가까이 할 수 있는 성적 대상을 만들어냄으로써 관객들의 에로티즘에 참여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성적 대상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쪽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남성의 성욕이고, 성적 대상으로 소비되고 소유당하는 쪽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여성의 성욕이 된다. 이렇게 포르노는 성적 대상을 구성한다. 결국 포르노는 여성들이 성적으로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가에 따라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여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포르노는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방법을 부호화한 악랄한 쟝르에 불과하다.
한편, 소위 이런 시선과 관련하여 포르노를 포함한 극영화를 철저하게 남성적 시선에 의한 여성의 억압으로 분석한 로라 멀비를 빼놓을 수 없다.9) 그녀는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라는 글에서 극영화가 어떻게 이른바 남성적 응시를 생산 내지 재생산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멀비에 의하면 영화에서의 여성의 이미지는 이중적으로 각인되어 있는데 첫째, 여성은 남성 욕망의 대상이며, 둘째 거세위협의 기표라는 것이다. 대중영화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의 조작을 파헤치기 위해 멀비는 '즐거움의 파괴'라는 급진적인 무기를 내세운다.
그렇다면 파괴되어야 할 즐거움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보는 것의 쾌락만을 의미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택하고 그들을 통제적 응시하에 종속시키는 것'까지 포함한 관음증적 쾌락이다. 이 '통제적인 응시'가 멀비의 핵심 주장인데 멀비는 대중영화의 전통적인 역할이 관객의 존재에는 아랑곳 없이 마술같이 풀려지는, 밀봉된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관중들의 관음증적 환영은 영화관의 어둠과 스크린 위의 변화하는 빛의 형태가 서로 대비를 이룸으로써 고조된다는 것이다.
멀비에 의하면 대중영화는 그 나르시즘적 측면에 있어서 관음증을 발전시키는 또 다른 쾌락을 증진시키고 만족시킨다. 여기서 멀비는 어린이의 자아 성립이 주는 쾌락과 영화의 동일시가 주는 쾌락의 유사성을 거울단계에 대한 라깡의 설명을 사용하여 보여준다. 아이가 자신을 거울속에서 인식하고 오인하는 것처럼 관객은 자신을 스크린에서 인식하고 오인한다는 것이다.
거울단계는 아이의 육체적 욕망이 자신의 능력을 앞지를 때 발생하며, 아이는 자신의 거울이미지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경험하는 것보다 더 완벽하고 훌륭하다고 상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에 대한 인식을 즐기는 것이다. 결국 인식은 오인으로 범벅이 되는데, 인식된 이미지는 자신의 반영된 몸이라 여겨지지만 더 우월한 것으로 여겨지는 오인은 이 (반영된)몸을 이상적 자아로서 그리고 고립된 주체로서 부각되게 하고 (이것이) 이상적 자아로서 자기 안에 재투입되어 미래의 또다른 정체성을 유발하는 근간이 된다."10)
이 오인이 야기하는 쾌락이 바로 시각적 쾌락이다. 이에 관해 멀비는 대중영화가 두가지 모순되는 형태의 쾌락을 만들고 있다고 분석하고, 관음증과 나르시시즘을 들고 있다. 관음증과 나르시시즘 사이의 모순은 영화의 관점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주체의 성적 특성을 스크린의 대상과 분리시켜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객이 자기와 비슷한 이를 인식하고 좋아하는 것을 통해 스크린의 대상과 자아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이 때의 분리는 관음증적 본능, 즉 다른 사람을 성적 대상으로 봄으로써 느끼는 쾌락과 정체화를 형성하는 자아 리비도 사이에 일어난다. 그러나 성적 불균형에 의해 구성된 세계에서는 응시의 쾌락이 두 가지로 명확하게 나뉘게 된다. 즉 남성은 보고, 여성은 보이기 위한 차림을 과시하여 남성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의미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남성의) 응시적 쾌락에 필수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11)
이와 관련하여 멀비는 대중영화가 이야기와 구경거리라는 두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전제하고 전자는 능동적 남성을, 후자는 수동적 여성과 연관시킨다. 이 경우 남성관객은 자아형성을 위해 남성 주인공 즉, 주목하는 자에 자신의 응시를 고정시키며, 성적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그 남자 주인공을 통해서 여주인공을 향한 응시 즉, 에로틱한 시선을 고정시킨다. 첫째 응시는 거울 앞에서 일어나는 인식/오인의 순간을 상기시키고, 두 번째 응시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못박는다. 이 두 번째 응시와 관련하여 멀비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궁극적으로 여성이 의미하는 것은 성적 차이이다.... 여자는 누군가가 끊임없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모른 체 한다. 이는 페니스의 부재 즉 거세의 위협과 이에 따른 불쾌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선의 능동적 조정자인 남성의 응시와 즐거움을 위해 전시된 상icon으로서의 여성은, 항상 그것이 원초적으로 의미하는 고뇌를 불러일으키도록 위협한다.12)
한편, 남성은 원초적인 거세 불안을 완전히 거부하기 위해서 여성을 물신숭배적인 대상으로 재현시켜 그 육체적 아름다움에 자신을 도피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멀비는 분석한다. 그는 남성들의 여성 스타에 대한 숭배에 있어서 물신숭배적인 관음증을 지적하고 굳이 남자 주인공의 시선을 빌리지 않더라도 남자 관객은 성적인 만족, 즉 시각적 쾌락을 얻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카메라는 노골적인 관객의 성적 시선을 위해 여성의 육체를 그것도 대부분의 경우 파편화시켜 포착함으로써 남성의 시선을 대체하고 있다.
한마디로 멀비는 이미지와 서사로 이루어진 영화에 정신분석을 끌어들여 남성을 응시자요 능동적 주체로, 여성을 보여지는 존재요 수동적 객체로 파악했던 것이다. 이 분석은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지배구조를 최초로 영화속의 남성의 시선을 통해 확인했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Ⅲ.
그러나 한편에선 포르노가 여성을 일방적으로 억압하고 남성 중심의 권력구조를 반영한다는 논의에 맞서서 여성도 욕망의 주체이며 포르노는 여성의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을 해방시켜 준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말하자면 포르노를 남/여의 권력 관계, 곧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드나 라깡 등의 정신분석학적 욕망의 관점에서 포르노와 주류영화에 담긴 여성의 현실과 삶을 분석하려 한다. 그들은 포르노에 대한 통제나 사회적 제재가 강화될 경우 그것이 제도화되면서 정치적 검열을 강화하는 쪽으로 변질될 것을 우려하고 일차적으로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한 주장과 논리를 펴나갔던 것이다.
먼저 그들은 포르노 보다 주류영화가 더욱 더 세련되게 남성의 성적 환상의 충족시키기 위해 여성을 그 도구로 묘사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즉, 주류영화에서 욕망에 솔직한 여성들은 반드시 징벌을 받도록 되어있는데 예를 들어 필름 느와르에 등장하는 요부들이 그들이다. 그녀들은 영화의 결말부에서 남자를 유혹한 자신의 욕망때문에 어김없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그런데 이에 비하면 포르노 속의 여성은 오히려 더 솔직하게 자신의 욕망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포르노는 여성의 욕망을 적어도 본격적으로, 그것도 솔직하게 다룸으로써 남녀간의 지배/피지배라는 권력관계 내지 굳건한 현실의 위계질서를 흔들 수 있는 힘을 주목했던 것이다.
이렇게 포르노를 지지하는 그들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남성 위주로 편향되어 있음에도 성적으로 솔직한 발언을 하는것은 여성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도 긍적적이라는 의견을 내놓기 까지 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여성도 성욕을 추구하며 그걸 즐기는 행위 주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심지어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가학적/피가학적 음란증을 즐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때 포르노는 이 사회와 인간의 위선을 조롱하고, 관습적인 성을 벗어나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데 유익한 기능을 가진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포르노는 결혼에서 벗어난 성은 물론이고 쾌락을 추구하는 성, 집단적인 성, 관음증적 성 등을 옹호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장르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포르노야 말로 엄격하게 성을 관리함으로써 유지되는 이 사회의 제도적 토대를 뒤흔들 충분한 힘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13) 이처럼 그들은 성에 관한 문화적 금기를 타파하고 동시에 동성애를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까지 부수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포르노를 통해 뒤집어본 사회나 인간의 성적 현실의 또 다른 일면일 뿐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포르노가 분명 숨기고 있을 무의식적 욕망, 즉 우리들이 이 쓰레기 같은 포르노에 집착하는 이유가 포르노를 통해서 그 무엇인가를 해소하기 때문일 것인데 과연 그 해소의 정신분석학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포르노가 근친상간적 환상을 해소하는데 기여한다는 주장은 꽤나 설득력이 있다.14) 다시말해 포르노 속의 여자들은 대개 유방이 큰 여성들인데 이때 큰 유방은 육아와 양육의 상징으로 읽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여성들은 남성관객들에게 어머니로 대체되고, 동시에 현실에서 관계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이미지를 경험한다. 남자관객들은 포르노 속의 여성들을 어머니를 욕망하듯 욕구를 가지지만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포르노 속의 여자들은 그들을 쳐다보는 남자들을 욕망하지 않는다. 그래도 문제는 없다. 이건 그저 '상징적으로' 즐기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남자관객들은 포르노를 통해서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이런 식으로 해결함으로써 동시에 외디푸스 콤플렉스까지도 해결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근친상간적 환상의 해소를 추구하는 그야말로 포르노적 정신분석이다.
또 한편으로 포르노의 정신분석학은 유아기적 도착증에 집중된다. 이 주장에 의하면 포르노는 '성적 풍요의 세계'를 묘사함으로써 유아기적 도착의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포르노가 다루는 성은 근친상간적 환상의 상상적 실현을 허용해주는 세계지만 사회가 이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미친 세계'다. 이 세계는 마치 유아가 어머니와 일대일의 관계를 통해서 성적 만족을 얻지만 아버지의 개입으로 깨지기 직전의 세계다. 말하자면 깨어질 줄 알면서 달라붙는 고착적인 성향을 지배적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성 도착이며 조금 확대하면 사회가 금지하는 성적 금기를 계속해서 어기고 있다는 차원에서 유아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포르노는 바로 아버지의 법, 아버지의 이름이 대표하는 이 사회의 법이 적용되기 전의 유아기적인 단계에서만 몽상하는 환상의 세계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환상은 현실에서는 미칠 수 없는 사람들이 잠시 미치는 분열된 욕망의 세계다.15) 이는 주류문화나 삶 속에서 소외되거나 항상 억압을 견뎌나가는 사람들에게 더 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세계이다. 포르노를 통하여 그들은 자신의 유아기적 성도착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이렇게 분열되고 스스로 미쳐버린 세계로 뛰어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성 관객들에게도 이런 해석을 적용할 수 있는가에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포르노를 소비하고 열광하는 쪽이 대개 남자들이며 근친상간적 환상도 주로 남자들에게서 두드러지는 욕망으로 알려져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욕망이 과연 여자들에게도 있을 수 있으며, 있다면 그 정신분석학적인 근거는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조금 더 밀고들어가면 실제 이런 의문 자체가 남근중심주의적 문화의 소산이며 가부장적 사회가 암묵적으로 심어놓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라는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이 기다리고 있다.
엘렌 식수에 의하면16) 프로이드에 의해 연구된 도라Dora라는 여성의 무의식적 욕망은 남근 중심주의적 사고나 문화에 의해 금지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그 금기의 법과 남성우위의 사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프로이드 자신이 도라의 무의식을 억지로 남성의 무의식에 묶어놓은 것이다. 따라서 식수는 도라와 프로이드 사이의 오해-충돌-결별을 통하여 한편으로는 여성적 무의식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의 주체로서의 여성의 진면목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그녀는 프로이드가 여성을 남근의 시녀로만 간주했다는 점과, 여성의 양성본능을 외면했다는 점, 인간-여성의 리비도로서의 욕망의 생명력 넘치는 본성을 제한하려 했다는 점을 비판하고, 적극적으로 도라를 '길들일 수 없는 존재'로 해석했다. 이 존재는 무엇보다 성sexe의 구별이 없고, 거세공포를 모르는 무의식과, 희열로 넘치는 여성적 무의식으로서 그 '시적인 몸'은 이성의 지배를 받지않을뿐 아니라 감각으로 무의식적인 사고내용을 노래하는 육체-일종의 열린 텍스트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라의 초상은 바로 여성의 양성본능 그것이요 이런 식수의 주장은 크리스테바의 그것과 더불어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몰고온다.
한편 이런 여성의 양성본능과 관련하여 테레사 드 로레티스는 엘렌 식수와 달리 서사의 욕망을 통해 영화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양성성을 분석한다. 그는 멀비 식의 분석의 요체인 남성은 주체요 여성은 대상이라는 도식적인 이분법을 공격하고 남성에 비해 여성은 아무런 욕망도 없는 수동적 존재로 그려지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17) 그에 의하면 원래부터 여성성은 양성적이었다. 여성은 원래 아버지와도 동일시하고 어머니가 되기도 하여 욕망의 주체이며 동시에 객체로 자란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사회는 여성의 남성적 주체를 억압하고 수동적인 객체가 되도록 훈련시켜 왔다. 말하자면 여성은 사회라는 상징계로 들어서면서 그 내부의 남성성은 억압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잉여분이 틈틈이 상징계를 위협한다. 이 저항 혹은 실재계가 여성의 사회적 정체성을 흔드는 과거로의 퇴행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16 外大語文論集 第14輯
이를 여성관객에게 적용시키면 여성관객도 스크린 위의 여성인물을 성적 대상으로 몰래 훔쳐보는 관음적 쾌락을 느낄뿐만 아니라 동시에 남성인물과도 동일시하여 서사를 끌어가고 그녀를 소유한다. 여성관객은 충분히 남성적 주체이며 동시에 여성적 객체로 영화에 참여하고 있다. 문제는 이 여성성이 주체와 객체의 양면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서사는 여성을 수동적인 객체로만 그려져 왔다는데 있다. 말하자면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여성의 능동적인 면을 억압해 왔고 서사는 그런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중에 심어왔기 때문에 숨겨져 왔을 뿐이라는 것이다.18) 처음부터 여성은 남성과 똑같이 욕망의 주체이며 동시에 객체로서 보여지고 싶은 욕망뿐 아니라 당당하게 보고 싶은 욕망을 가진 존재였던 것이다.
결국 여성의 이런 양성성은 포르노를 포함한 주류영화 속의 여성의 성적 현실을 일방적인 남성 지배구조로 해석하는 주장들을 일축하는 이론적 모태가 된다. 현대 여성들은 대중매체를 통해서나 주류문화 속에서 남자와 똑 같은 지위와 권력을 행사하거나 소비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데 당당할 수밖에 없다. 일찍이 보드리야르도 여성성은 눈에 띄는 것이 될 것이며, 여자는 괘락의 상징이 되고, 쾌락은 성욕의 상징이 될것이라고 단언하면서 더 이상 불확실성도, 비밀도 없는 철저하게 외설스러운 짓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너는 성을 지니고 있으니 성의 사용을 모색해야 한다. 너는 육체를 지니고 있으니 육체를 향유해야 한다. 너는 리비도를 지니고 있으니 리비도를 소비해야 한다"고 충고까지19) 했던 것이다.
Ⅳ.
그러나 포르노가 남녀사이의 권력관계를 다루든 욕망을 다루든 그 핵심적인 역학은 무엇보다 권력과 억압에 대한 저항과 온갖 문화적 금기에 대한 위반에 있다. 따지고 보면 포르노는 바로 인간의 섹슈얼리티의 무지막지한 재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섹슈얼리티라는 것이 본원적으로 금기에 대한 유혹과 그것의 저항과 위반이라는 속성에 공공연하게 싸여있다. 이 때문에 포르노가 갖고있는 위반의 역학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경우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사회문화적 전통과 그것에 반응하는 사회적 반동에 대한 언급은 포르노에 대한 보다 진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섹슈얼리티란 생래적이고 본질적인인 것이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보편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따라서 이를 억압할 경우 아무리 작은 압력이라도 즉각적으로 반발할 정도로 인간에게 있어 예민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 섹슈얼리티는 역사적으로 지배계급이 통제하려는 일차적 대상이었으며 실제로 서구에서는 교회와 학교가 앞장서서 온갖 금기와 억압의 수단을 동원하여 통제하려 했던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섹슈얼리티의 역사는 통제의 역사이며 그것은 도덕적 규범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역사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도덕적 규제는 반드시 저항문화를 만들어 내고야 만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예는 산아제한 특히 낙태의 방법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여성들이 구축했던 정보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20)
이처럼 인간의 성본능은 쉽게 통제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섹슈얼리티의 본질상 성본능은 워낙 은밀하고도 가변적이며 심지어 파괴적이어서 이를 다스릴 어떤 세세한 기준이나 규범이란 애시당초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개인차가 워낙 커기 때문에 어떤 부분을 공격하고 억압해야 그것을 제압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지배계급이나 그 통치이념들은 인간의 성본능을 차라리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통제를 위해 보다 효율적이라고 믿어왔다. 즉 사회제도를 통해 한편에서는 섹슈얼리티와 그 관련 영역들을 소비하도록 조작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이 소비를 도덕과 성관념이라는 이름으로 통제하는 전략이 그것이다. 특히 섹슈얼리티의 강력한 표현인 예술은 이러한 성의 이중성이 드러나는 지점에서 등장하여 지배계급의 모호한 입장을 변호하는데 앞장선다. 한편으로는 외설시비로 직접적인 반응을 유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징화된 모습으로, 즉 예술이라는 합법적인 행위로 성을 즐기도록 부추김으로써 예술은 성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줄타기가 아니라 양극을 넘나드는 극단적인 방법을 써왔던 것이다. 어느 시대에도 포르노그라피가 필요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21)
한마디로 섹슈얼리티는 인간에게 있어 자율적인 영역이며, 독자적 인과법칙을 갖는 자연적 지형이지 사회적으로 통제되어야 할 저항적 에너지가 아니다. 말하자면 섹슈얼리티를 사회적 산물이기는 하지만 사회와 마치 상이한 영역인 양 대립시킬 수 없다. 인간의 행위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다양한 사회적 실천들, 이를테면 사회적 정의와 자기 정의, 그리고 정의하고 규제하는 권력을 거머쥔 자들과 그에 저항하는 자들 사이의 투쟁의 결과이며 이런 차원에서 섹슈얼리티도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타협과 투쟁을 거친 인간 주체의 산물이라는 제프리 윜스의 주장은 크게 일리가 있다 하겠다.22)
그에 의하면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태도의 역사 내지 전통은 다음의 두 입장으로 정리된다. 즉 인간의 성은 근본적으로 위험하지만 적절한 통로, 즉 합법적이며 일반적인 부부사이의 생식적인 섹스를 통해 배출될 때에 한에서 용납될 수 있다는 절대주의적 입장과, 성은 기본적으로 건전하고 선한 것이지만 부패한 사회에 의해 억압, 왜곡되고 거부당해왔다는 전혀 다른 입장이 그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한 절대주의적 전통의 상속자들이다. 이 절대주의는 정상적인 결혼과 이성애, 그리고 일부일처제 등을 고집함으로써 섹슈얼리티가 숨겨놓은 파괴적 힘들을 오직 도덕을 통해서만 통제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절대주의적 도덕은 서구의 기독교 문화 속에 깊히 뿌리박혀 비록 그 기반이 종교적이기는 해도, 오늘날 사회 문화적이며 정치적인 현상에 폭넓게 스며들어 견고한 가치로 굳어져 있다. 그 결과 도덕적 절대주의는 일반 문화 특히 법적 규제의 형태들에 깊은 영향을 미쳐왔을 뿐만 아니라 섹슈얼리티의 자유로운 표현과 양태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또 하나의 정치적 덕목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섹슈얼리티에 대한 자유의지론적 전통도 다양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 입장은 사드 후작으로부터 비롯하여 19세기 후반의 데카당파들을 거쳐 바타이유와 쟝 쥬네같은 비교적 동시대의 급진적인 작가들에 의한 문학적 전통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위험과 위반으로 찬미했으며 기독교 절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섹슈얼리티를 자아, 사회, 심지어 세계와 적대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다만 절대주의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그런가하면 인간의 섹슈얼리티는 근본적으로 선하고 건전한 것인데도 문명 혹은 자본주의라는 힘에 의해 봉쇄 내지 억압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입장도 있다. 이 입장은 푸리에나 카펜터와 같은 개척자들에서 1930년대의 빌헬름 라이히, 그리고 1950년대의 마르쿠제로 이어지는 사회주의적 전통과 밀접한 친화성을 갖는데 이들은 위반의 섹슈얼리티를 현존 질서를 와해시키는 길 가운데 하나로 보고 성해방을 통해 사회해방을 꾀하고자 했다. 성해방이야 말로 자본주의적 억압체제에서 벗어나는 첩경이며 현존 질서를 붕괴시킬 유용한 잠재력을 내장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들의 입장은 1960년대 후반 성정치학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23)
포르노그라피는 이러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도덕적 절대주의와 자유의지론적 성정치학과의 대립과 반목, 검열과 해방의 접점이자 전장이라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권력과 또 한편으로는 사회 도덕율과의 투쟁을 가속화시킨다. 이를 통해 현대문명은 인간의 성을 지하에 가둔채 지배 이데올로기로 하여금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이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임을 학습하고 있다. 이제 현대사회는 섹슈얼리티에 관하여 더 이상 경건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수가 없게 된것이다. 여기서 포르노는 자칫 도덕주의에 빠져드는 사회를 흔드는 힘을 얻게된다. 왜냐하면 포르노는 그 자체의 문제를 넘어서서 현대 사회가 제기하는 표현의 자유와 검열의 문제, 성에 관한 정의의 문제, 권력과의 관계, 개인 및 집단의 정체성 문제 등이 얽혀있기 때문이다.24) 그리고 그 와중에도 섹슈얼리티의 한 속성인 '보고자 하는 욕망'과 '검열'이라는 권력 내지 지배이데올로기와의 충돌은 더욱 근본적으로는 영화적 표현과 그 진실의 문제까지 거론해야 할 부담마저 지우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포르노의 생태적 근원인 영화와 섹슈얼리티의 삼투적 상호관련성을 언급하고 이어서 이 '보는 행위'의 계급적 대립과 긴장관계를 검색해 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영화야말로 보는 행위를 통해서만 자신의 진실을 노정하기 때문이고 이는 곧 포르노적 진실의 한 단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V.
기묘하게도 영화와 현대적 의미의 섹슈얼리티는 동시대에 나타났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역사적 공간은 이 둘을 한꺼번에 수용함으로써 영화와 섹슈얼리티는 서로를 운명적으로 끌어당기며 인간의 보고자 하는 욕망을 끌고 가거나 반대로 그 욕망에 떠밀려왔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이전에 눈에 보이지 않던 육체와 쾌락에 대한 감춰진 진실을 직접적이고도 노골적으로 재현해내는 한편, 섹슈얼리티는 영화에다 육체적 욕망과 환상의 겉옷을 입힘으로써 영화 이미지에 대한 사회적 통제와 억압을 부각시켰다.
앞서도 말했듯이영화는 영상과 서사의 종합이며 섹슈얼리티는 이 서사에 욕망을 증식시키면서 쾌락을 분배한다. 흔한 지적대로 영화는 욕망의 기계적 장치이고 섹슈얼리티는 이 장치를 이용해 관음증적 본성과 보이는 것의 페티시즘적 본성을 극대화 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 논의의 한 극단에 포르노그라피가 엄존한다. 말하자면 마술적인 '보여주는 기계'에 섹슈얼리티의 마력이 결합된 이 유혹적인 장르는 보는 사람은 보이지않게 하고 성과 육체의 쾌락은 도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에로티즘으로 끌고간다. 바로 여기서 포르노에 열려있는 두 본성이 제기될 수 있다. 즉 응시regard의 문제와 금기의 위반이라는 에로티즘이 그것이다.
본다는 것은 인간 상호간에 불안과 긴장을 내포하기 쉬운 관계에 있다. 그것은 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객체로서, 또 대상으로서 사물로서만 보고 주체로서 보지않기 때문이다. 주체로서의 타인은 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주체로서의 타인이 나에게 확인되는 것은 타인이 나에게 눈을 돌리고 나를 볼 때이다. 보여지는 것이 흔히 불안을 가져다 주게 되는 것은 보여지는 것만으로는 자기의 주체성이 무시되고, 자기가 도구시되는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보는 쪽은 주체이고, 지배하는 것이며 우월한 것이다. 이에 비해서 보여지는 쪽은 객체이고 지배되는 것이며, 지배되는 것이며 종속되는 것이다. 보는 쪽은 위에 서 있다. 보여지는 쪽은 밑에 서 있다. 봄, 보여짐의 관계는 그러한 계급적 대립까지 반영하는 날카로운 긴장을 담고 있는 관계이다.25)
이 관계는 포르노에 그대로 적용된다. 포르노란 원래 도착적인 것이어서 관객은 선험적으로 도착적인 위치에 있게된다. 말하자면 관객인 우리들이 대상의 위치를 점유하기 때문에 우리를 성적으로 고조시키려하는 스크린위의 배우들이야말로 실제적인 주체인 것이다. 이 때 관객들은 마비된 대상-시선으로 환원된다.26) 그 시선은 대상에 의해 공공연히 드러나 주체를 압도하여 환상이 제거되면서 도착을 이루고 나아가 대상의 욕망이 주체의 것과 일치된다. 이 때문에 포르노 위의 이미지들은 숭고하지도 신비롭지도 않다. 왜냐하면 포르노에는 현실의 증가 때문에 환상이 제거된, 실재하는 섹스보다 더욱 실제적인 섹스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일에 포르노에 작용하는 유일한 환상이 있다면, 그것은 섹스의 환상이 아니라 실재의 환상, 실재가 실재와는 다른 것 속에, 즉 과실재 속에 흡수되는 환상일 것이다. 남의 정사를 훔쳐보려는 포르노의 변태성욕은(voyeurisme) 성적인 변태성욕이 아니라, 재현과 재현의 상실의 변태성욕, 무대의 상실과 외설스러운 행위의 범람에서 생겨나는 현기증일 뿐이다.27)
그리고 이 현기증은 에로티즘과 바로 연결된다. 그러나 포르노가 보여주는 에로티즘은 바타이유의 내적 체험으로서의 에로티즘을 벗어난다. 바타이유에 의하면 에로티즘이란 내적인 금기를 어기려는 충동과 금기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고뇌를 동시에 느낄 때 비로소 체험되는 것이다.28) 이와는 달리 포르노가 자극하는 에로티즘이란 엄밀히 말하면 내적 금기는 물론 사회적 금기 마저도 제거된, 심한 경우 폭력적이며 동물적인 타락을 통해서 느끼는 쾌락일 뿐이다. 포르노의 에로티즘은 위반의 한계가 모호한 에로티즘이다. 위반이란 이를 동반하는 쾌락과 고뇌를 위해 필수적인 것인데 이 쾌감과 고뇌를 증대시키기 위해서도 위반의 대상인 금기가 더욱 강화되어야하는 모순이 생긴다. 포르노는 이 위반의 한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온갖 잡다한 사회 문화적인 금기가 동원되고 그럴수록 이를 위반하거나 제거할려는 유혹은 상대적으로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메카니즘을 갖고 있다. 따라서 포르노의 에로티즘은 사회적인 온갖 금기가 강화되거나 그 실현이 구체화될 때 동시에 이를 부수거나 넘어서려는 노력에서 벌써 실현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포르노는 그 근본에 있어서 성적 억압과 금기에 도전하는 현대적 섹슈얼리티의 불순한 자의식이자 검열과 권력에 시달리는 무정부적 진실의 영화적 공간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보드리야르의 말대로29) 자본과 하부구조의 진실, 또는 성과 욕망의 진실을 은폐한다. 그러면서도 포르노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실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사물, 즉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진실의 효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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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성문화 알아보기
이경옥(경남여성회장)
1. 性의 개념
(1)SEX
-생물학적 성별로서 성을 본질적인 관점에서 규정하는 성.
-성적욕망은 자연적으로 내재된 본질이며 성의 개념은 남녀의 성기 결합과 같은 신체적인 측면으로 한정된다.
(2)Gender
-사회적 성차 혹은 성별로서 남성과 여성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분되고 정의되는냐 하는 개념이다.
-여성성, 남성성은 생물학적 차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사회적으로 부과한 것이다.
(3)Sexuality
-성기 결합을 의미하는 개념을 넘어서 성적인 감정 및 성적으로 맺는 관 계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각 개인이 경험하는 성적인 욕망, 성적인 정체성 및 성적 실천을 뜻한다.
-성적욕망은 사회가 만들어 내는 것이고 성은 사회 조직을 통해서 만들어 지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Sexuality의 이해
이성의 몸에 대한 경험 여성은 공포, 폭력적이나 남성은 쾌락을 경험함 =>불평등한 성별 권력관계(Sexuality의 성별화)
-Sexuality의 공식
남성은 여성의 성을 정복, 여성은 수동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2. 나의 성은 주체적인가
(1)성에 대한 이론(sexuality)
-본질론 : 프로이트 주장
인간의 성은 생물학적 요소와 같은 고정불변의 본질에 의해 결정
남녀의 성적 정체성이 생물학적 성차로 결정
-사회구성론 ; 푸코 주장
°인간의 성을 문화 의존적, 관계적, 비객관적 자질로 정의
°인간의 성적 정체성, 욕망, 관행들이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개인이 처 한 사회관계와 문화적 맥락에 따라 구성.
°남성과 여성의 성적 정체성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기제 를 통해서 구성된다. 즉 남성들은 성적자유와 성적 주체성을 보장하는 성문화인데 비해 여성들은 순결을 지킬 것과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해 도구화 될 것을 강요받는다.
-섹슈얼리티를 남성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 : 안드레아,
캐서린 맥키논
°섹슈얼리티는 성폭력으로 규정
°강간, 성희롱이 도처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성개방은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이다. 폭력적인 남성의 성을 규제해야 한다. 여성이 성의 쾌락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섹슈얼리티는 해방적인 것이다 : 게일 루빈
°여성과 남성의 성적 욕망은 다른 것인가, 가부장제의 이중규범을 수용한 것이다. 성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성욕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의 이중 잣대는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며 섹슈얼리티에 정치적 힘을 부여하면 성별 분업구조도 바꿀 수 있다고 한다.
(2)다양한 젠더 정체성
-‘여성성이 어떤 것이다’라고 규정하는 순간 여성성과 여성성이 아닌 것을 분리하고, 분리는 억압을 낳는다.
-우리 모두가 여성 내부에 남성성을, 남성 내부에 여성성을 부분적으로 가 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성별 분화가 되지 않은 다양한 ‘차이들’을 인정하는 방식이며 억압적 여성성이나 모성성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3. 한국 성문화의 특성
(1)가부장적 이중규범
-남성 - 지배(형식적 규제), 여성 - 복종(실제적 규제)
-여성들에게만 강요되는 혼전 순결 : 고대사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금와는 주몽의 어머니 유화를 부인으로 맞아들임)
-엄격한 유교윤리에 근거한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여성에게 억압적 가부장제가 확립됨
-공식적 차원에서는 여성의 순결, 정조를 가장 중요한 성도덕과 성적가치로 규정
-비공식적 차원에서는 남성 성행위는 항상 이해되고 허용되어야 함.
-여성에 대한 성폭력으로 나타남
-성매매의 일상화, 일반화하는 경향을 초래함
(2)금기적 성문화
-성을 종족 번식의 수단으로 정의함
-성교나 성행위 위주의 성기 중심적 성 개념
-성을 생리적 현상으로만 편협하게 바라봄
-우리 사회의 보편적 성인식이며 비공식적 영역의 사적인 주제이다.
(3)남성중심적
-성매매, 혼외 성관계의 일상화
-남성 성욕은 억제 안되는 본능이고, 여성은 조절할 수 있다고 주장함
(4)이성애 중심적
4. 한국사회에서의 성적 위험
(1)성폭력
-여성에 대한 폭력(gender violence against women) 전반, 즉 강간, 인신매매, 아내구타 등의 포괄적인 개념에서 성폭력특별법 제정이후 성적인것에 초점을 둔 성폭력(sexual violence)으로 재 개념화 됨.
-성폭력 개념의 논쟁점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맞추느냐, 폭력에 초점을 맞추 는냐가 쟁점이 된다.
-생각해 보기 : 부부강간, 데이트 강간
(2)성희롱
-직장내에서 위계적인 권력을 가진 자가 그렇지 않는 사람에서 성적수치 감이나 성적 불쾌감을 주는 언동을 말한다.
-언어적, 육체적, 시각적인 성희롱으로 나눈다.
(3)성매매
-우리 사회의 성매매는 개인과 개인 간이 거래나 단순한 생물학적 욕구문 제를 떠나 거대한 성산업의 메카니즘 속에 존재
-성매매 용어의 변천 : 윤락, 매음, 매춘에서 성매매
-성매매의 일상화가 문제 : 남녀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이중적인 성문화
5. 성과학, 성개방
(1)킨제이 보고서
-오르가슴 남녀가 본질적으로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고, 남녀 성적으로 다 르지 않다는 것을 공식화 함.
-여성의 오르가슴은 질이 아니라 음핵이다(남성의 음경에 해당)
-여성 오르가슴으로 자위나 레스비언 성을 제시
-성의 평등성의 강조함
*프로이드 : 정신분석학에서 여성이 오르가슴을 못 느끼는 것은 남성의
기술이 불충분하거나 여성의 불감증 때문이다.
(2)마스터스, 존슨의 보고서
-킨제이 보고서를 토대로 확인함
-여성의 질은 오르가슴이 일어나지 않으며, 여성의 오르가슴이 더 뛰어남
-여성의 Sexuality의 혁명적인 담론이며 여성의 수동성을 전복함.
(3)문화의 성애화
1970년대 성적욕망과 성개방이 자본주의 시장논리와 결합하여 성문화가 상품화되는 현상
6. 아름다운 성문화를 만들기 위해
(1)성해방의 담론
-서구에서는 1960~70년대 여성들의 적극적인 성적존재로 부각 되는 시기를 성해방기(성혁명기)라 명명한다.
-서구의 성담론은 남성을 위한 해방이었는데, 낮에 정숙하고 방에 섹시한 요부를 원했다.
-한국사회는 1990년대 성해방 담론 역시 서구와 유사하게 지극히 남성중심적, 성과학적 담론이 주류였다. 마광수를 필두로 여성을 사물화하고 정복하는 성담론이 이어졌다.
-우리사회의 섹슈얼리티와 성문화는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끊 임 없이 충돌하면서 변화의 움직임이 조금씩 보인다.
(2)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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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re and Power: AFeministPerspective"
in What is Cultural Studies? (C. A. MacKinnon)
105쪽
(내 생각에는 그 이름에 값하는 어떤 페미니즘도 방법론에 있어서 후기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성에 의한 구분을 이해하지 않고는 매일의 삶을 말할 수 없고 남성지배의 형태를 이해하지 않고는 헤게모니에 대해서 말할 수없다,)
매키넌은 협의회라는 이름아래 그들이 모였지만 협의보다는 연자가 청중을 향해 연설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모임이 진행되는 현실을 한 손으로 손뼉치는 것에 비유한다. 이와같은 인식에서부터 그녀는 자신의 논문을 수정하면서 자신이 받은 질문들과 이에대한 부분적인 대답들을 삽입하고 대화체를 사용하여 열린구조의 글로 만들고자한다. 그녀는 또한 자신들의 말하는 방식의 문제점도 거론한다. 자신들이 사물을 변화시키기를 원한다고 표명하지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하기 때문에 고도로 코드화된 대화를 나누게 된다는 사실에 특히 관심을 보인다.
이 에세이는 세부분으로 구성된다. 제1부에서는 페미니즘의 정의를 시도한다. 페미니즘의 정의를 시도하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페미니즘이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겠다. 우리들 중 누구도 모든여성의 경험을 혼자서 직접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론창조에 함께 참여하여야 한다. 따라서 이 협의회의 계급구조가 문제된다. 이런방식으로 어떤 종류의 이론을 만들어 낼 수있겠는가? 2부에서는 최초의 압축된 선언적인 주장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확충하고 부연 설명하겠다.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일관된 이론을 향한 열망을 포함한 마르크스이론의 주요 관심사에 대한 처음의 논쟁들은 방법론의 문제로 향하면서 범위가 확장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의제중에서 긴급한 것으로 여겨지는 문제들을 다루겠다. 그것응 권위의 자세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을 거론하는 것은 당신들을 억지로 밀어붙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자신의 위치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섹슈얼리티의 관계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노동의 관계와 같다. 섹슈얼리티와 페미니즘의 관계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노동의 관계와 같다는 것은 각각의 이론이 모두 그 이론이 비평하고 있는 것에 의해 가장 잘 제거될 수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주의이론에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만드는 대로 형성하는 관계로 사회가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 노동은 물질적인 세계와 사회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의 상호작용이 가치를 창조하는 것처럼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창조하는 과정이다. 인간이 어떻게 사회적 존재가 되는가를 이론이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 과정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계급은 그들의 노동의 사회적 구조이다. 생산은 그것의 과정이고 자본은 하나의 고정된 형태이다. 지배는 그것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논쟁의 대상이며 마르크스는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의 이론을 썼다.
페미니즘은 은연중에 내포된 그에 대응하는 주장이 있다. 그것은 섹슈엘리티의 틀과 방향과 표현이 사회를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개의 섹스로 체계화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구분은 마르크스이론에서 계급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 만큼이나 구조적이고 널리퍼져있는 방식으로 전체적인 사회관계의 기초가 된다. 섹슈얼리티는 욕망을 창조, 조직, 표현하고 욕망의 방향을 지시하는 사회적 과정이다. 여기서 욕망은 마르크스이론에서 가치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그것자체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적 본질 혹은 전사회적인 자극으로 여겨지는 특질이라는 이론상의 위치와 유사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실제로 문제가 되고있는 사회적 관계와 계급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이 과정이 그들의 관계가 사회를 만들어 내듯이 여성과 남성으로 알고있는 사회적 존재를 만들어 낸다. 마르크스주의에서의 노동처럼 페미니즘에서 섹슈엘리티는 사회적으로 형성되었고 아직도 형성되는 중이다. 그것은 행동처럼 이반적이지만 역사적으로는 특별하고 물질과 정신세계로 함께 이루어져 있다.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의 노동을 구조적으로 몰수하는 것이 계급--노동자--을 정의하듯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의 섹슈얼리티를 구조적으로 몰수하는 것이 섹스--여자--를 정의한다. 이성애는 그것의 구조이고 젠더는 그것의 사회적 과정이고 가족은 경직된 형태이며 두 개의 사회적 페르소나로 일반화된 특질이다. 자식을 생산하는 것은 그 결과이다. (이론가들은 때때로 자손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 지배 또한 젠더의 문제이다.
마르크스이론과 페미니즘은 권력의 이론이며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의 이론이다. 두 이론 모두 구조적인 불균형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어떻게 내부적으로 논리성을 유지하고 합리화되고 불공평하지만 널리퍼졌나를 설명한다. 둘다 전체성의 이론이다. 둘다 그것들이 상상하는 전체에 대한 근본적이고 비평적인 토대에 대한 이론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과 페미니즘사이의 관계의 문제는 어떻게 두 이론이 동시에 진실이 될 수있는가의 문제다. 이 문제의해결에 대한 시도로써 나는 권력의 문제와 지식의 문제사이에 초점을 맞추겠다. 먼저 건력에 대한 페미니즘이론과 지식에 대한 페미니즘이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들이 암시하는 마르크시스트적 방법론이 문제삼고 있는 배열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그리고 나서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사이의 관계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밝히겠다.
정치적이라는 것은 권력의 문제를 의미한다. 권력에 대한 페미니즘이론은 젠더가 성별화되듯이 섹슈얼리티가 젠더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시말해 페미니즘은 지배와 복종의 외설화가 어떻게 젠더를 만들어 내는가, 어떻게 우리가 알고있는 사회적 형태로서 존재하는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내는가에 대한 이론이다. 따라서 성차와 지배-복종의 역동성이 서로를 정의한다. 섹스를 불평등으로, 즉 의미있는 차별로 정의하는 것은 애욕(에로틱)이다. 이것이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의미이고 불평등한 젠더에 대한 뚜렷한 페미니스트적 설명이다. 지식에 대한 페미니스트이론은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모든 여성의 관점에 대한 이론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사회생활에 대한 남성적 관점이 사회생할과 그것에 대한 지식을 둘다 구성해 왔다는 점에 대한 비평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남성의 관점을 지식의 방법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되어 왔고 지금도 강요되고 있기 때문에 지식에 대한 페미니스트이론은 남성세력에 대한 페미니스트적인 비평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식론이란 어떻게 당신이 아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알고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가? 내가 왜 당신을 믿어야 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왜 당신의 리얼리티가 진실한 설명인가에 대한 당신의 설명의 문제이다. 지식에 대한 페미니스트이론은 서구의 정치사상에서 "아는자(the knower)"의 자세로 여겨져온 자세를 비평함으로써 남성의 관점을 비평하는데서 시작된다. 스탠리 아로노윘츠는 중립적 자세라고 부르고 있다. 나는 "객관성"이라고 부르겠다. 그것은 어느쪽으로도 입장을 정하지 않은 거리를 둔 관점이다. 나는 이것을 사회적으로 남성의 관점이라고 보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세상을 알 수 있는 입장으로서의 객관성과 이러한 방식에 의해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세상사이의 관계는 객관성부여(objectification)의 관계이다. 객관성은 개관성의 부여가 그것의 사회적과정이 되는, 남성지배가 그것의 정치학이 되고 실천적인 사회관습이 되는 인식론적 자세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세상에 객관성을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배의 행동은 인식론적 수준이고 그것 자체가 남성지배하에서 외설화되었다. 이러한 방식속에서 여성이 성적인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반복이다. 성적으로 객관성을 부여하는 것은 여성을 성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며 남성지배아래 존재하는 여성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 논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젠더란 무엇인가? 둘째, 섹규얼리티란 무엇인가? 셋째, 이러한 페미니즘은 어떠한 종류의 분석인가? 특히 객관성의 부여가 왜 특별히 남성적인가? 위의 문제들을 다룬 후 주체와 객체의 문제를 잠시 언급하겠다. 그리고 왜곡가능성(falsifiability)과 불확실성의 문제와 페미니스트 담론에서 "to be"라는 동사의 문제를 다루겠다.
젠더는 지배의 문제이지 차별의 문제가 아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과 남성이 다르다는 점에서는 동등하지만 권력을 향유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동등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해 왔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예속에 대해 설명할 때 정치적 조건은 어떤 근본적의미에서도 차별성과는 관계가 없다. 그 결과 차별성의 이데올로기가 그 적용에 있어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차별성과 관련해서 할 일이 많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성적 차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있다. 남성지배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그중요성은 훨씬 축소되었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남성은 권력을 갖고 있지만 여성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남성은 사회적으로 우월하지 않고 여성은 천성적으로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남성은 사회적으로 우월하고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성적 차별성을 만든다. 나는 이 차별성을(여기에는 differance도 포함된다) 젠더에 근거를 둔 개념이라고 본다.
이러한 주장을 수사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사실에 근거한 참고자료를 제시하겠다. 남성지배는 강간과 강간미수와 관계가 있다. 우리문화에서 강간희생자는 44%에 이른다. 10%정도가 아버지에 의한 근친상간의 희생자이고 25%∼33%가 가족에 의한 성폭력의 희생자이다. 이 통계는 프로이드와 관계가 있는데 프로이드는 여성들에게 이러한 경험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성이 어떻게 어린시절의 성적학대 경험을 만들어 내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무의식이론을 고안하였다. 여성의 15%가 지난 2년간 매우 심각한 신체적인 공격을 받았고 일하는 여성중의 85%가 작업중 성희롱을 당했다.가정안에서 남성에 의한 여성의 구타는 25%∼33%에 이른다. 살인사건 통계에 의하면 60%∼70%의 여성살해가 남편이나 애인 혹은 헤어진 애인에 의해서 저질러 진다. 남성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매춘은 현재 미국사회에서 12%에 이른다. 매춘은 모델일과 함께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분야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이윤추구동기와 함께 지배복종의 외설화의 본보기라 할 수 있는 외설산업은 맥도날드식당의 3∼4배의 매상을 올린다. 이 통계를 "성적 차별성(the sex difference)"로 개념화하는 것은 통계가 입증하고 제시하고 있는 님성권력이 구조적이라는 사실을 묵인하고 불분명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나는 "남성"이라는 단어를 형용사로 사용한다. 나의 섹스분석은 사회학적인 것이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남자들을 예외로 만들고 모든 여자들을 안정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증거로 제시한 이러한 행동들로부터 관점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주목하려는 것이며 어떤 것이 그들을 보이지 않게 하고 어떤 것이 그들을 영광스럽게 만들며 어떤 것이 그들을 정상적으로 만드는 가에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이 남성적이라고, 남성의 성역할이라고 정의 될만큼 이러한 행동들이 정상적으로 취급되는 기준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이 젠더를 일반적인 기준 "the standard" 가 되도록 덮어버렸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모든 남성이 남성의 권력에 똑같이 접근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또한 여성의 관점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도 아니다. 여성도 남성적 관점 취하고 남성적 권력을 행사할 수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자동적인 것이 아니다. 여성은 그렇게 태어나지도, 키워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열망할 수있다. 나의 경우를 보면 여기 올라서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한다. 사회적으로 이것은 남성적 권력이다. 계급적이고 지배적이다. 권위적이다. 여러분은 듣고 나는 이야기한다. 나는 능동적이고 여러분은 수동적이다. 나는 내 의견을 말하고 여러분은 적는다. 여성은 보여지는 존재이지 말하는 존재가 아니다.
질문: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는 계급적이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닌가?
C.M.: 아니다. 기껏해야 남성지배하에서 어느정도 계급적이고 지배적인 면모를 보인다. 나는 남성 지배에 대한 초더로우 디너스타인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남성권력이 존재 하는 관계속에서만 모자관계는 계급적이고 공포와 불안과 배신의 관계가 되고 결정 적으로 애욕의 관계가 된다. 이관계가 왜 남성권력이 존재하는가의 이유가 된다고 생 각하지는 않는다.
질문: 그러나 우리가 남성지배의 상황속에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C.M: 현실에 있어서 그렇다. 나는 그 현실을 설명하려 하고 있다. 지배관계로 설명된 모자 관계는 남성지배의 결과이지 그것이 역동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여자 가 어머니 노릇하는 것이 왜 계급이 외설화되고 심지어는 젠더화 되기까지 하는 지를 이해할 수없다. 계급이 남성지배의 섹슈얼리티 속에서 외설화 되지 않는다면 계급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게 되고 존재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질문: 여성적 권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C.M.: 사회적으로 말하자면 그 용어에는 모순이 있다. 내가 왜 "여성적 권력"이 잘못된 호 칭이라고 생각하는지 명백해지리라고 믿는다.
섹슈얼리티에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겠다. 나는 섹슈얼리티를 문화를 초월하는 용기로도 근본적인 것으로도 역사적으로 바뀌지 않는 것으로 에로스로도 보지 않는다. 나는 주어진 사회가 외설화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섹슈얼리티라고 정의한다. 특정한 사회에서 어떤 것이 되었든 성적인 수단을 갖는 것은 섹슈얼리티이다. 섹슈얼리티는 섹슈얼리티가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해석학적인 견해이다. 해석학은 의미의 문제에 관심이 있다. 섹슈얼리티가 이러한 방식으로 보여 진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고 관계의 문제이지 하나의 실체가 "a thing"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내가 섹슈얼리티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여성을 남성의 쾌락을 위한 대상으로 만들려는 시선gaze에 관한 것이다. 나는 그것의 형태와 내용을 위해, 경멸받는 자, 품위가 손상된 자, 접근 가능한 자, 노예화된 자, 어린이같은 자, 수동적인 자, 동물을 외설화하는 시선을 위해 춘화를 거론한다. 그것이 이문화에서 젠더 휘메일을 정의하는 섹슈얼리티의 내용이고 시각적 "물화(thingification)" 가 그것의 양상이다. 미셸 바렛은 일찍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내면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물었다. 여성의 성적 욕망이 이와같이 사회적으로 구조화되어서 그것에 의해 우리는 우리자신의 자기 소멸을 원하게 되었다. 우리의 예속이 여성 속에 그리고 여성으로서 외설화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서 여성성은 우리가 어떻게 남성지배를 원하게 되었는가의 문제이고 그것은 결단코 우리의 관심속에 있지 않다.
이러한 페미니즘은 어떤 종류의 분석인가? 이것은 이론에서 적합성을 위해 채택하는 기준의 문제이다. 페미니즘이 남성이 지니는 객관적인 관점에 대한 비평이라면 우리의 이론의 타당성의 기준으로써 표준적인 과학적 기준을 부정해야 한다. 우리가 비평하는 객관적 관점은 과학의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남성이 지니는 객관적인 관점에 대한 우리의 비평은 특히 지식에 대한 남성적 접근 방식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비평이다. 우리는 검증을 위한 남성적 남성적 기준을 거부한다. 우리는 그것의 여성적 대응물속에서 진실을 찾는 것도 거부한다. 그것도 또한 남성권력에 의해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즉 젠더속에서 그리고 젠더의 진실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왜 자세로서의 객관성이 특히 남성적인가? 여러분에게는 사회적 한정성, 특이성, 사고의 사회적인 위치가 친근하다. 사회적 위치는 사람들이 그들의 위치에 대한 감각을 만들어 내기 위해 만드는 개념을 통해 표현 된다. 젠더는 그러한 사회적 위치이거나 아니다. 만약 위치라면 남성으로서의 사회경험을 갖는 사람들에 의해서 특히 젠더가 특정한 사회적 상황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론들은 적어도 남성적 이론에 개방되어 있다. 남성적 이론이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많은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생물학적으로 젠더화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모든 발언은 이와같은 방식으로 사회적으로 젠더화 된다. 사회적 조건이 생활 뿐 아니라 사상도 형성한다.
객관성은 주체가 취하는 자세이다. 개관적 관점을 취하는 것은 오로지 주체 뿐이다. 주체는 자신이다. 대상은 그 자신에 대한 타자이다. 보브와르를 읽은 이래로 젠더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은 사람은 주체는 사회적으로 남자라는 것을 안다. 타자는 여자라는 것도 안다.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언어에서도 남성은 중립적인 위치와 남성의 우ㅏ치를 다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안다. 객관적 중립성과 남상적 중립성은 언어학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반면 여성은 표시된, 젠더화된, 차별화된 위치를 차지한다. 여성은 자연이다. 남성은 지식세계, 정신세계이고 여성응 "to be known"의 문제였다. 여성은 통제되고 억압되고 복종하는,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된다.
왜곡가능성에 대해 말하겠다. "여성만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라는 말은 성적 특수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한쪽 성에 트별한 성질을 지녀야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모든 여성이 다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성적 특수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100% 성적 영향을 받아야 한다. 생물학적으로 섹스가 양극적이지도 배타적이지도 않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젠더의 생물학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착상되는 방식이다. 방법론적 가정이 정치적 결과를 가져온다. 성적 특수성의 생물학적 개념의 결과는 종족이나 계급과 같이 여성사이의 차별화가 젠더의 현실까지도 밑둥을 잘라 내기 위해 보여진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고 그런 것은 여성에게 사실이다"라고 말할 때 누군가가 "그러나 모든여성에게 그렇지는 않다"라고 대꾸한다면 그것은 성적 특수성을 지적하기 보다는 진술의 밑둥을 잘라 내는 것과 같다. 젠더가 사회적 범주라면 젠더는 사회적으로 의하는 그 무엇이 된다. 어떤 것이 모든 여성에게 똑같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이 입증하는 것은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 그것이 젠더화 되지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도 여성화 될 수있다. 그들이 간강당할 때 그들은 자신이 여성화된다는 것을 안다. 백인노예가 있었다는 사실이 흑인노예제도를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라고 정당화 할 수는 없다. 반대쪽 에가 있다고 해서 실제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회적관계을 열역학이나 양자역학과 같이 이해하할 수는 없다.
다음은 불확실성의 방법론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성은 불확정성의 문제에 대해서 남성과 같은 방식으로 인식론적 문제에 이르게 되었다. "거기에 리얼리티가 있는가? 그것에 대한 내 생각이 옳은지 어떻게 알 수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우리는 우리 앞에 세상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강간 폭행당하고 춘화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우리밖에 존재하는 것들에 의해서 정의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건 벗어날 수 없는 사실들이 있는데 남성적 권위가 그중의 하나이다.
과학적 관점이 의견을 확실성으로 대체하고 종교나 신앙을 구체적인 경험으로 대체해 왔다. 사회과학은 물질세계에 대한 유추에 의해서 이러한 작업을 해왔다. 사물이 움직이듯이 사회도 움직인다. 운동 법칙이 사회를 예측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유추는 검증받지 않았다. 사회와 물질세계의 유추는 남성적 게획이라고 불리우는 사회과학 계획의 기초가 된다. 그 계획에 의하면 여성의 위치는 우리가 암묵적으로 남성중심과학을 위한 "세계"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사고와 존재하는데 있어서 당신의 관점이 사회적으로 권위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세상이존재하는 것 사이의 차이점을 알아 낼 수 없다.
스피박이 제기한 오르가슴을 가장하기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남자는 여자가 오르가슴을 느꼈는지 불안하다. 여자가 오르가슴을 가장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가 오르가슴을 느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사실이건 아니건 그것이 그들이 정력적이라는 증거가 된다고 생각학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성들의 세계에 대한 지식에 대한 "세계"이다. 데카르트저그의심은 이렇게 확실한 것으로 된다.세상에서 어떤일이 일어 났는가를 영원히 궁금해하는 그들의 방식대로 세상에 강료하는 그들의 권력 때문이다. 여성은 의심으로 가득차 있지만 데카르트적 확실성을 갖지 못한다. 의심속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지식 이전의 우리의 현실이다. 담론 이론에서 생기는 불확실성과 사회적 텍스트의 불확실성은 젠더로서 우리가 불평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우리가 리얼리티를 확정짓지 않는다면 그것의 불확실성은 덜 명백한 것아 될 것이다. 당신의세계는 매우 고정되어 있다. 페미니스트이론에서 "to be"라는 동사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사회적으로 섹슈얼리티에 관해 실제적이 된다는 것은 남성관점에서 그것을 보는 것이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갖는 것이다. 이점이 때때로 우리가 남성 이데올로기를 복사한다고 비판 받는 이유이다. 페미니스트적 통찰력이 정확할 때 우리 진술의 많은 부분이 특별히 남성적인 면모를 드러냄으로써 그 현실을 포착한다. 남성은 경험적인 의미의 "is"이다. 남자는 여자를 성적 존재로 정의한다. 생물학적이 아닌 사회적 근거있는 페미니즘, 적어도 인종적 페미니즘의 어떤 견해는 내가 페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한다. 이 페미니즘은 방법론에 있어서 후기 마르크스주의이다. 여성이 사회적 그룹으로 분석된다면 그것은 방법론적으로 후기 마르크스주의이다. 이름에 값하는 어떤 페미니즘도 후기 마르크스주의이다.
후기 마르크스적 페미니즘의 예로써 "모든 여성이 억압받고 있는가"하는 때때로 거론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 문제는 성의 실천이 몸에 잘맞는 선택의 문제인 것같은 자세를 취한다. 젠더가 여성을 섹스를 통해서 억압하는 사회에서 이성애가 젠더화괸 섹슈얼리티의 형태라면 섹슈얼리티와 이성애는 동일한 것이다. 이것이 동성애를 지워 없애지는 않는다. 단지 그런 형태의 섹슈어리티는 덜 젠더화 된것이라는 의미를 갖을 뿐이다. 이성애는 여성억압의 구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형태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신화구조의 관점에서 섹슈얼리티를 본다. 노동문제에 이 분석을 적용해 보자 사람들이 이성애에 대해 말하듯이 노동자가 노동을 선택한다는데 동의하겠는가? 작업환경이 개선되면 노동자가 억압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있는가? 쉬운 일을 하면서 일을 하고 일을 좋아 하기까지한다면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볼 때 당신이 착취당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사람들이 그것이 왜 강제적이지 아닌지, 혹은 선택이란 단어가 왜 의미를 갖을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그것을 강제적으로 만드는 상황아래서 이성애를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변화 시킬 것인가? 마르크스주의는 착취와 타락이 저항과 혁명을 일으킨다고 가르친다. 그 이유를 말하기는 어렵다 섹슈얼리티에 관계된 여성의 경험에서 내가 배운 것은 착취와 타락이 생존을 위한 교환에서 유쾌한 공범관계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긴급한 문제는 계급과 인종의 무제와 관계있다. 섹슈얼리티이론과 재산권 소유의 형태와 인종적 타락의 외설화 사이의 상호관련성에 대해 고려해 보기바란다. 세 번째의 긴급한 문제는 내가 언급한 모든 불평등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우리 작업의 어느것도, 내가 말하는 것이 심각하게 받아들여 진다해도, 그것이 행해진 방식대로 행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춘화를 생각하지않고 미학을 말할 수 없고 강간을 생각하지않고 섹슈얼리티나 욕망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과학의 전제의 남성성에 대해 말하지 않고 과학을 비평할 수 없고 남성지배를 이해하지 않고 헤게머니를 말 할 수 없다. 기의로서 여성을 못보고는 기표로서 여성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재생산보다는 변화시키고 비평하기위해서 소수가 그들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서 다수를 지배하고 사용한다는 사실과 그 소수가 남자라는 사실의 관계를 구조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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