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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수필/레테의 강

<Why suffering?>

by 추홍희블로그 2007. 12. 15.

밀튼의 실낙원10장에, 아담은 이런 질문을 한다. “ 수많은 사람이 자기가 짓지 않는 때문으로  죽어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담은바로 자답한다. “나를 제외하고 무엇을 있단 말인가?  모든 부패한 악을 제외하고 마음과 의지를 박탈할 있단 말인가?”  아담의 원조는 태어날 부터 감염된 바이러스 라고 같은 것이다.   태어날 부터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않았기에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속에 분노가 흐르고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선 그들을 영적 치유로 구원할 있겠으나 바울이 로마서에 말한대로 구원을 포기한 정죄된 마음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명도 선한 사람이 없어 모두가 구원 불가능할 정도로 썩어있다고 개탄하였다. 

( 1:29)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 

( 1:30)

비방하는 자요 6)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런 세상의 악의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께 책임을 물을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스스로 선택할 있는 자유의지 부여했기 때문이다. 

 밀튼 바울이 보여주는 바는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 세상에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신정론의 핵심 의문에 답을 준다는 것이다.  가뭄과 질병과 태풍 불가항적인 자연 재해 나찌의 유태인대학살 인간 재앙이 일어 나는 것은 그러한 신정론의 고뇌를 꺼내게 만든다.  이러한 악의 존재 때문에 하나님은 없다고 결론내린 사람들을 쉽게 설득할 없게 된다. 

 하나님의 문제: 인간이 고통을 겪게 되는가의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이 주지   못하는 근거  라는 책의 저자인 Ehrman 프린스턴 신학대 출신 목사이다.  신약성경 전체를 암송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교수가 믿음을 잃은 이유는 이것이라고 한다.  우리 삶의 있는 현실을 믿음은 더이상 설명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더이상 선하고 해줄 능력있는 통치자가 있다고는 믿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고통의 존재 문제는 내게 믿음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한때는 위안의 전부였던 성경이 이젠 해답없는 질문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선택의 신학을 보면 일들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취했던 행동들은 무엇이었던가?  하나님의 자손들이 가뭄과 기근과 질병으로 부터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했던가요?”

어만은 정답을 정리해 주고 있다.  하나님이 죄짓고 불복종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표한다는 .   고통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힘을 당한 것처럼 구원속죄함을 받는 다는 .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까닭은 그것들을 선하게 만들 있게 하기 때문이라는 .  고통은 겸손하게 만들고 자만에 대한 처방전이라는 .  고통은 믿음의 시험대 라는

 그러나 어만은 이러한 모든 해답들에 수긍하기 힘들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시험해 보려고 하나님께 책임이 있어도 하나님께 불평불만하지 않는다는 것을 테스트 보려고 사람을고문하고 해를 입히고 죽이기 까지 있느냐?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은 숭배할 가치가 없다고 본다 

 반면 평생 무신론자에서 2004 기독교로 전향한 Anthony Flew 신은 존재한다: 세계 최고의 무신론자가 어떻게 그의 마음을 변하게 했는지라는 책으로 어만 반박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플로리다 법대 스탠리 Fish  서평을 읽었다. 

 어렸을 부터 간직해 나의 의문도 이것이었다.  선한 사람들이 고통 받고 악한 사람들은 잘만 사는 것이 세상 질서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말할 있다는 말인가?  나의 심은 내자신에게 분노를 일으키기도 했던 핵심 질문이었다.

 BBC 방송 오늘의 양식코너에서 익숙한 러셀 Stannard’ “Why? Why Evil? Why Suffering?  Why Death?” 이란 140 페이지 책은우리가 흔히 요약하는 욥의 얘기 어만이 정리하는 여러 설명들을포함하여  쉽고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중에 내눈에 더욱 확연히 들어 오는 구절이 있다:   토마스 Carlyle 말했듯이 인생의 비극은 우리 인간이 겪은 고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겪은 고통의 경험이 얼마나 대단한 가치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바울이 180 전향하는 것처럼 나의 고통은 나의 가치로 변하게 되는 것을 나는 주여 감사합니다!’ 외치게 되는 것이다.   죽음에서도 건진 생명의 은인에게 힘들다고 불평하고 주여 하필 나에게 이런 고통을 선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며 항의한다는 내가 말이냐 되는 것인가?   

감사함이 크면 느끼기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나는 죽음의 계곡에서도 벗어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함으로 앞날 보고 뛰어 달리자!  과거의 고통의 흔적으로 육체적으로 견디기 어렵게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정신과 영혼은 살아 있는 .

 A rich life is a costly, painful life.

 역시 삶은 아이러니 아닐 없다는 것이다.   

The tragedy of life is not so much what men suffer, but rather what they m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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