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가치는 무엇으로 측정하는가?
세상은 한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변화될 수 있다. 그러기에 장부가 한 번 칼을 들었으면 썩은 호박이라도 찍어 내려야 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요구에 순순히 응하고 변화하면 칼을 맞아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비수를 들고 왕의 목을 담보로 불의를 번복할 것을 요구한 조말의 사례에서 둘 다 죽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였다는 이야기를 보면 알게 된다.
한편 정권을 잡을 때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했으면 그에 대한 응분의 복을 자식이 대신 받게 된다는 것은 초나라에서 오나라로 망명한 오자서의 명령을 실행했던 전제의 사례가 말해주고, 제 아무리 목숨을 담보로 의로운 행동을 했더라도 그 희생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은 섭정의 사례가 말해준다.
세상의 평지풍파와 분진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단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부족하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추가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점은 형가의 사례가 말해준다.
나는 형가처럼 다른 사람이 나에게 희생을 바칠만큼 어떤 기술이나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만약 내가 죽더라고 나의 죽음을 의롭게 할 섭정의 누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남에게 어떤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왜 내가 사기의 자객열전을 나의 길에서 꺼내게 되는가?
그것은 사마천이 설명한 바대로, 나의 길에 대한 목적과 취지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만에 하나 그러한 나의 목적과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더라도 예양에 대한 이야기는 최소한 겨울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얏빠리! “충신장”에 대한 나의 설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사마천 같은 대가도 이릉의 숨은 의도와 남다른 목적을 효과적으로 설명해 내지 못해서 한 맺힌 궁형의 벌을 받게 되었는데, 내 같은 범인이 어찌 나의 길에 대한 의도와 목적을 구구절절 남이 이해할 만큼 제대로 잘 설명해 낼 수 있을까? 나는 사마천에게 그 십분지의 일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기에 또 난 최소한 남을 처치하진 못하더라도 태어나 살아오면서 내가 받았던 은혜에 감사함을 표시하고 그 의리를 저버리고 않고 또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서 자기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는 보은과 의리에 대한 깊은 의미를 죽음으로써 증명한 예양의 사례를 따라갈 수 있다는 내 스스로에 대한 결론을 얻었기에 감히 이러한 얘기를 쓴다.
예양
사마천이 자객열전에서 5명의 자객을 기록한 이유는 그 말미에서 직접 밝힌 바와 같다. 자객열전은 설령 사람을 죽였더라도 그 목적이 분명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사람은 정신을 가진 존재이므로 그 행동을 실행한 동기와 목적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서이지, 결코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일을 장려하거나 가볍게 여겨서 기록한 것이 아니었다.
또 그것은 원한의 존재인 사람의 복수극을 그린 것도 아니었다. 사기의 열전에서 무저항비폭력의 모델이 된 백이숙제를 맨 먼저 첫 번째의 사례로 내세운 이유를 이해한다면 사마천의 자객열전의 편집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굴원의 “其生若浮兮 其死若休” 구절대로, 우리 삶은 일엽편주 조각배에 몸을 싣고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다니는 것이요 죽음은 그저 휴식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어느덧 확신처럼 젖어 드는 순간 나 또한 삶과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떨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소한 나의 글의 의도와 동기와 그 성격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기록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노동자는 일을 할 때 힘들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며, 사람이 궁하면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말로 남에게 전달하고자 한다는 것은 유신의 애강남부에서 멋진 구절로 잘 표현해 주었다.
사마천은 역사가이기에 후세에 이름을 남길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추렸으며 그리하며 후세 사람들에게 사람의 옳고 그름에 대한 행동의 기준을 제공해 주었다.
제갈량의 출사표가 잘 알려져 있는데, 전쟁터에 나서는 장수가 출사표를 올리지 않는다면 어찌 전쟁의 명분과 목적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정할 수 있겠는가?
내가 서문을 굳이 장황하게 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으로 한국인 가운데 노벨상을 탈 위대한 한국인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이 나의 책 출간의 분명한 의도이다.
한국에는 김재규 자객열전이 있다.
중국에는 예양의 자객열전이 있고 일본에는 충신장 자객열전이 있고 한국에는 김재규 자객열전이 있다.
중국에는 사마천의 사기 자객열전에 실려 있는 예양이 있고, 일본에는 충신장 아코번 47인의 사무라이 유라노스케가 있다. 그럼 한국에는 누가 있을까?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노량진 강변에서 처형될 때 사지가 오분팔절되며, 그 목이 저자거리에 내걸리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았는데, 그 반정에 실패한 사육신을 뒷날에 와서 충의의 귀감으로 섬겨본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안평대군이 처형되고 단종이 처형되면서 세종대왕의 민족 중흥 시대는 반대로 고꾸라지기 시작했음을 상기하라. 끝내 사화를 가져왔고 왜란을 겪고 호란을 겪고 결국 식민지 지배로 전락하고 말았지 않았는가?
반정에 실패한 성삼문은 초나라 오자서의 운명과 같지 않는가? 오자서의 목이 잘려 성문밖에 내걸렸는데 오자서는 죽기 바로 전에 자기는 죽어도 죽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뜨고 성문위에서 쪼아 내려보면서 꼭 원수를 갚겠노라는 최후진술을 남겼다. 한 때 국정을 책임진 총리 자리에 있었고 국왕의 신임을 받았지만 자기 목숨이 위험에 처하니 외국으로 도망쳤던 오자서가 그렇게 저항하며 죽어갔다. 오자서는 쿠데타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성삼문의 사육신의 운명과 비슷하다. 성삼문도 왕정 반정에 실패해서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 수양대군에게 침을 뱉아 가며 저항했다. 하지만 아코번 47인의 사무라이들의 생각은 그들이 행동으로 보여준 바와 같이 만약 거사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오자서의 운명과 성삼문의 기시거열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역사관을 가졌다. 실패하면 의미가 없는 것이고 오로지 성공할 때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
거사에 실패해서 죽을 때 국왕을 향해 비웃고 침을 뱉으며 죽어간 오자서와 성삼문의 죽음의 길이 아니라, 치욕을 감내하고서라도 살아남아서 끝내 복수를 성공시켜 임무를 완성해내는 충신장의 인내와 성공의 모델을 택해야 한다는 점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유라노수케는 죽음으로써 성공을 담보하겠다는 치밀한 희생전을 치뤄냈는데 그러한 스스로 희생을 선택하는 것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충신장을 쓴 3인 저자의 생각은, 충신장의 대사를 통해서 강조되듯이, 47인 사무라이들의 행동 모델은 오자서가 아니라 사마천의 자객열전 속의 예양이었다.
미래는 오늘 나의 행동의 결과이지 어찌 나의 한갖 빈말에 있을텐가? 예양은 자신이 미리 선언했던 말 그대로 행동으로 실천해냈다. 예양은 자신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취지를 분명하게 남겼기에 사마천이 사기에서 자객열전으로 실어 놓았다. 충신장의 유라노수케는 예양의 모델을 따를 때 민족 중흥의 새시대가 열릴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실천했다.
사람의 평가는 직접 자신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 사마천이 말한바대로, 자신이 의도한 바를 행동과 결과로 실행해내고 증명해내는 것. 음악에도 혜강의 성무애락론 같이 음악이란 듣는 사람이 감정적으로 직접적으로 느낄 때만이 그 음악의 효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자기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 말로만 논해본들 어떤 의미가 있을텐가?
예양(豫讓)은 그 한자 이름의 낱말 뜻에서 보여주듯이 미리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일을 성공할 수 없다는 이치를 말해준다. 사마천의 자객열전 예양전에서 말하기를, 예양은 두 군주를 섬길 수 없다는 점을 후세들에게 분명하게 남기기 위해서 스스로 자결한다는 그의 행동의 의미와 그 취지를 분명하게 거사를 앞두고서 미리 남겨놓았다. 일이 끝나고 나서는 누군들 말 못할 입이 있든가?
사람은 계획의 존재이다. 사람은 정신적 산물이다. 두 군주를 섬기지 못하기 때문에 자결을 택한다는 예양의 결단은 오자서의 결단과는 분명히 다르다. 오자서는 자신의 군주가 자신을 버리자 외국으로 도망치고 망명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예양은 도망치지 않았고 두 군주를 섬기기를 거부했다. 예양은 죽음을 택했고 그에 앞서 자신의 뜻과 취지를 분명하게 후손에게 남기려 했다.
왜 신선이 바둑을 두며 바둑 두기를 신선놀음이라고 말하는가? 세상은 죽음과 삶 이 둘은 흑과 백, 바둑의 두 돌 밖에 없다. 영어로 흔히 쓰는 “mutually exclusive”. 삶과 죽음은 교차운명이라고 서로 크로스하고 서로 비켜가기 때문에 둘 다를 동시에 함께 취할 수 없다.
47인 사무라이들의 행동 모델은 예양이었지, 오자서가 아니라는 것. 오늘날 일본인들은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다. 왜? 충신장에서 말하듯, 중국에 예양이라는 자객이 있다면 일본에는 47인 사무라이난을 성공시킨 유라노수케 충신장의 자객열전이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일본이다.
그럼 한국을 보자. 나는 말한다. 중국에 예양이 있어서 중국이 세계 중원의 최고 힘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면, 일본에 47인 사무라이 충신장 유라노수케가 있어서 세계 최고의 국가대열에 등극한 일본이라면, 한국에는 10.26 김재규가 있다는 것을!
사육신 중 한 사람인 김문기의 후손인 김재규는 자신의 선조가 왕정반정의 거사에 실패했던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그 이유를 대법정에서 분명하게 진술했다. 김재규가 10.26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혹자는 김재규가 거사에 실패했다고 말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10.26 후 전두환 군사정권 반동체제가 유신독재체제를 대채해 들어섰기 때문에. 하지만 김재규는 다른 사람을 죽였다는 그 살인의 원죄 자체로써 충신장 46인 무사들처럼 거사에 성공해도 죽을 운명이었다. 다만 언제 죽었는가?의 문제만 남았을 뿐이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보다 의미가 크다. 이순신장군의 노량해전이 그렇고, 문무왕의 681년 전쟁이 그렇고,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독배를 마신 경우가 그렇고, 항우가 군토중래를 포기하고 갈대밭에서 자결한 이유가 그렇다.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은 희생의 가치에 있다. 한 알의 씨알이 죽지 않고서 어찌 새싹이 돋아날 수 있든가?
동서고금중외의 역사를 살펴볼 때, 김재규는 중국의 예양이고 일본의 충신장 유라노수케에 해당한다고 어찌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재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대법정에서 “최후의 진술”을 남겼다.
“후손들이여, 나는 가지만 부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마음껏 누리시라!!”
김재규가 남긴 “최후의 진술”은 사마천의 붓으로 남겨진 예양의 유언과도 같고 충신장의 펜으로 남겨진 47인 무사 유라노수케의 최후 진술과도 같다. 시대의 고난을 겪었지만 한편 역사의 진보의 혜택을 받았던 김재규는 봉건 시대의 그들보다 분명히 정치관은 더욱 세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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