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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Think Like a Lawyer

4.하버드대 로스쿨이 80년역사의 학교 심벌을 쓰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

by 추홍희블로그 2021. 10. 17.

 

()의 의미

인간 사회의 부족과 잘못은 교육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가? 그런데 왜 여지껏 그토록 신음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는가? 한쪽에서는 많아서 넘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선 부족해서 굶어 죽어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아픔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닌가? 사람들의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면 즉 문제해결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공정한 기회 마저 박탈당하고 상실된 사회로 변해 버렸지 않는가? 교육은 받는 학생과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양자의 존재가 필수이기에 교육에는 큰 돈이 들어간다. 교육은 도로 건설처럼 돈과 시간이 크게 들어가는 국가의 기간 인프라이고 돈과 시간이 없으면 교육의 기회를 갖질 못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해내려고 하면 우선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여야 하는데 지금 상황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세상사람들에게 알릴만한 능력과 용기를 가진 선지자들은 성경시대에나 존재했던 과거지사로 보일 뿐이다. 지금 세상에서 먼저 나라의 의를 구하는 의로운 사람들을 찾아 보기란 가물에 콩 나듯이 거의 전멸되었거나 화석에서나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니면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사람의 존재 목적이 아예 잊혀진 것은 아닌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아픔과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스스로 그것을 말할 수 조차 없는 자기 존재 또는 사회 존재 의미에 대한 무관심이 극도에 달한 상황에 처해 있다. 고통과 아픔이 극에 달하면 천길 낭떠러지에 서서 포효처럼 소리 높여 외칠 뿐, 그 메아리는 어디에도 반향을 찾을 수가 없는 형편이다. 천애의 낭떠러지에서 외쳐본들 메아리는 계곡 속에 함몰되고 만다. 사람들은 고대광실만 찾을 뿐 계곡의 정신을 잊은 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누가 귀 기울려 주고 관심을 갖겠는가? 지금 세상은 돈과 권력에 의해서 움직이는 철저한 헤게모니 구조가 작동된다. 따라서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낙오되고 배제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과 아픔은 태어난 모든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죽음의 진리 그리고 산모의 고통 같은 것인데 그것들은 우리 모두가 그 존재를 인정하지만 오직 당사자만이 겪는 경험이고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가 없다. 설령 당사자라고 해도 그 아픔의 강도를 감정적 표현의 언어 수단적 제약성 때문에 그대로 재현(representation)하기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명확하게 재현해 낸다고 해도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바뿐 사람들은 지식과 교육에 접근할만한 금전적 여유마저 없어 무지, 가난, 차별의 사회적 올가미에서 벗어날 길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만족하든 아니하든 생각을 깊이 할 시간적 공간적 여유마저 빼앗기고 있는 형편이어서 교육을 통해 실수를 제거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버린 상황에 놓여 있기도 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제자리 맴도는 순환론적인 한계에 빠지게 되고, 결국 해보니 별수 없다는 체념 상태인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에 이르게 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수가 있겠는가?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현실의 보통 사람들의 본 모습은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 판단을 내리는 데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그것도 그런 실수와 잘못을반복적으로행하게 된다. 행태경제학자들은 주장한다: “Real people make mistakes systematically.” 하지만 사람들은 실수를 반복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또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낼 수가 있다. 여기에 미래의 희망이 놓여 있다. 실수는 실수를 하게 되는 원인을 찾아내면 그것을 교정시켜내는 교육을 통해서 시정하고 예방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인간 사회의 진보와 발전이 기대된다. 이와 같은 인간의 제한성과 가능성의 조건을 발견하는 것은 위기는 위험과 기회라는 두 가지 서로 대립되는 양면성의 성격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과 통한다. 인간 사회의 살아 있는 역동성과 그 힘을 가져다 주는 것은 바로 사람들은 유한하고 미약한 갈대이지만 반면 생각의 무한한 가능성의 힘 바로 이 제한성과 가능성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희망은 어떻게 발견되는가?

인간 사회는 혼자서 살아 갈 수 없고, 또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보면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공감의 창출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공감은 자기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진실로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길들여진 앵무새같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런 속박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 말할 때 소통이 이뤄질 수 있고 또 이것이 인간사회의 진보와 발전의 조건일 것이다. 이 점을 나의 느낌으로 말해보자. 셰익스피어의 지혜를 따라서 본다면, 마땅히 해야 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느낀 그대로를 말해야 한다. 파스칼의 다락방에서 하늘의 별을 보고, 몽테뉴의 정원에서 꽃을 가꾸듯이 순수의 생각을 자신의 가슴, 마음, 감정, 영혼, 마음 속에서 느낀 바 그대로를 말하자. 문무왕릉비 비문에서 이러한 공감의 미학과 공감의 역사 그리고 위대한 언어의 마술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까치밥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주는
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1]

 

 

 

역사와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추사 김정희 선생은 진흥왕 순수비의 세간의 알려진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일거에 변파했음에도 조선이 망해가는 역사를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런데 만약 추사 김정희가 당시 저작권법이 발달한 영국이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면 그래서 영미국에서 조선의 역사를 저술했었더라면 아마도 한국의 역사는 달라졌지 않았을까? 하지만 추사는 유배 감옥 생활을 오래했기에 세계의 당시 흐름에 부응하지 못했고 그 속에 갇혀있던 조선의 당시 상황적 한계 때문에 조선의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런 한계를 파악하고서 저작권법이 보호되는 영미국의 진실적 탐구의 지적 흐름에 편승하고 부응하여 잘못된 한국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저자는 감히 여긴다.

 

 

 

공자의 역사 서술의 원칙: 述而不作(술이부작)

공자는 역사 서술의 제일원칙으로서述而不作”(술이부작)을 제시했다. 역사를 거짓으로 지어내지 말며, 다만 서술하고 설명하라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이라고 경구를 남겼고 이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공자가不作”(부작)하지 말라고 경고했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서룡 등 식민사학자들이 역사를 조작하면서 자기들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을 두고 일부러 자기 마음대로 임의적으로 지어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글자들을 써놓고 지시해놓은 금서룡의 자필 원고가 발견된다. 일제 식민지 학자들은 그렇게 역사를 조작했다는 사실이다. 금서룡이나 말성갈치, 조선금석문을 발견하고 지금까지의 한국역사의 바탕을 이루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그래서 이병도처럼 조선사편수회의 서기출신인 말성갈치 이런 한 때 유명했던 사람들은 지금 일본에서 그 자취도 찾아보기 힘들다. 과연 이런 일제 식민 사학의 거두들이碑刻疑難字攷釋的方法이런 역사 서술의 철칙에 대해서 얼마나 공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오늘날로 치면 황우석의 가짜 논문 조작 스캔들과 결코 다름이 없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개념

발자크의 계곡의 백합 꽃글을 다시 읽어보자. “정치계에서는 다른 측면들이 나타나는데, 개인의 행동을 규율하는 원칙들은 국가적 이익 앞에 양보되어야 합니다.  최고위직에 오르게 되면, 당신은 마치 신처럼,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단독 재판관이 될 것입니다.  그 때는 당신은 더 이상 한 인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법이 될 것이며,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화신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심판을 내리는 대가로 당신 또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훗날 당신은 역사의 심판대 앞에 오르게 될 터인데, 진정으로 위대한 행동과 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역사를 통해서 매우 자세하게 배우고 잘 인식하고 있어야 될 것입니다.”[2] [3] [4]

판결을 내린 단독 재판관은 그의 판결에 대해서 훗날 그 자신이 판결의 대상이 되는 객체가 된다는 의미에서 훗날 세월이 흘러서 후대가 그 판결문을 재평가할 때도 정말 잘못된 영역이 없을 것이라는 정말 목숨을 걸고 내린 확신적인 판단이 들어 있는 결정인가? 문제는 역사는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달라진 미래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자신은 이미 죽고 없는데, 죽고 난 자신이 어떻게 책임을 진다는 것일까? 법관이 재심 대상에 들어서는 경우는 농민 반란이 성공한 예가 없는 역사의 법칙과도 같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법관 자신들이 소환되는 경우는 프랑스 대혁명 바로 그러한 예외적인 경우 밖에 없다. 그래서 법관들은 별로 역사를 무서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당대의 언론이다. 법관의 최대의 두려움의 대상은 공개된 자리에서 반박을 받는 것인데, 그래서 그것 밖에 두려움의 대상이 없는데, 우리나라에선 재판의 공개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어찌 한국이 사법 국가 법치 국가라고 볼 수 있겠는가?

역사의 심판대의 개념은 프랑스 대혁명 전후에서의 사법부 불신과 단두대 역사를 상기시켜 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영국은 프랑스의 법 역사하고는 달리, 법관이 소환되는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거의 없다. 영미국의 보통법 체계에서 판단은 일인 법관이 아니라 공동체를 대변하는 다수의 배심원들에 의해서 판결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영미국은 법의 지배(the rule of law)”로 표현되는 사법부 독립의 역사가 웅변해준다.

사실 이 부분에서 영미국의 법의 지배개념과 충돌한다. 이러한 미래적인 역사의 심판대라는 개념에 따른지는 모르지만 프랑스와 우리나라는 과거 사건에 대한 재심사건이 상대적으로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극단적인 예가 될지 모르지만 살인 사건에 대한 오심이 일어났고 그 결과 피고인이 처형되었다면 (“효봉스님의 출가 동기는 일제 시대 때 판사로 근무할 당시 살인사건에 대해 오판을 한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대오각성하여 출가하게 되었고 훗날 조계종 최고위직에 올랐다.) 재심을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한무제가 여태자 반란을 진압하고 혈연적 자식들을 대의멸친이라는 법에 모두 죽여버리고 난 후 다시 사자궁을 짓고 혼백을 위로해 준다고 해서 한번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올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법원에서 다시 판단하는 재심사건이 적지 않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재심 사건으로 인해서 역사를 되돌릴 수가 없는 법이고 (다만 국가 배상 또는 보상금이 따른다), 이를 역으로 보면 재심 사건의 존재 그 자체가 법이 올바로 서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여기서 역사상 사화가 계속 반복된 우리나라의 과거사처럼 잘못하면 순환론에 빠져 들어 역사적 발전을 건설해 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성공한 쿠데타(내란)를 처벌할 수 없다"던 법원이 훗날 정권이 바뀐 뒤에야 태도를 바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역사적 단죄를 대법원이 내렸는데 또다시 세월이 많이 흐른 현재 스스로 물어보자: 어디까지가 법이고 어디까지가 정치이고 어디까지가 힘의 논리인가? 이 경우 역사의 심판대는 누구였는가?

 

결국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은 후손에게 내가 남길 유산이 무엇인가로 귀결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역사의 심판대를 내세우는 관점을 보다 깊게 살펴 본다면, 결국 후손을 위해서 선대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의 문제로 환언된다. 이렇게 환언될 때 자기 자신이 죽고 나서 없는 미래의 심판을 받는 허깨비의 대상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의 책임적 판단이 이루어 질 수 있다. 여기서 삼위일체의 개념처럼 과거 미래 현재가 바로 한 묶음으로 함께 단속된다.

 

 

하버드대 로스쿨이 80년역사의 학교 심벌을 쓰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

 

연상주의에 대한 미국사람들의 생각의 단면을 보여주는 최근의 하버드대학의 사례를 소개한다.

 

2016 3월 하버드대학로스쿨 당국은 개교 300년을 기념하여 1936년 채택 사용된 이래 80년 동안 학교의 상징물 역할을 해오던 공식 문장(紋章)을 더는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5]

그 이유는 "이 문장의 의미는 세월에 따라 변화했고", "이제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방패 문양이 노예제와 상관이 있으며(association with slavery)”, "노예제와 관련됐다는 비판을 받는 공식 문장은 하버드대 로스쿨의 가치와 지향을 더 이상 대표하지 못하며, 오히려 분열의 원천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6]

 

당시 노예제도에 기반한 설탕 대농장 경영으로 부를 축적한 로얄 주니어는 가문의 토지 재산을 기부해 1817년 하버드대학 로스쿨 탄생을 도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200여년 전 로스쿨 개교에 큰 공헌을 한 로열 주니어의 부친이 대부분의 재산을 노예들의 고난이 서린 카리브해 설탕 대농장을 통해서 일궜고 또 노예들을 혹독하게 탄압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그를 기리는 것은 시대적 가치의 변화에 따라 이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1937
년 공식 채택된 하버드대 로스쿨의 공식 문장 (School Seal)학교 표어(motto)‘veritas’(진리) 라틴어 문구 아래 아이작 로얄(Royall Jr)의 가문 문장(family crest)에서 차용한 밀 다발 세 묶음이 그려져 있다. (그림 <A>).

 

그런데 왜 미국 사람들은 여기에서 노예제도를 연상하는 것일까? 

 

주식이 쌀인 우리나라 사람들로썬 밀 다발의 노예 노동 상관성이 바로 떠오르지 않을 지 모르지만 미국 사람들은 밀 다발 묶음에서 노예제 노동의 역사를 떠올린다고 한다. 이를 설명해 주는 사진들을 가디언 신문 보도 기사에서 함께 인용하고 있는데, @ivyleaguepix 트위터 계정에 공개된 사진들 중에서 부분확대 카피하면 (사진 <B>) 쉽게 이해가 다가옴을 알 수 있다.

 



<A> <B>

 

또한 하버드 대학은 수백년에 걸쳐 사용되어 온 대학 기숙사 사감(house master)이라는 용어를 기숙사 학장(faculty dean)으로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이 호칭이 노예제를 연상시켜(conjured a connection to slavery) 부적절하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제도적인 차별 (Institutional Racism)’에 대해 저항하는 대학가의 항의 시위 추세를 고려하여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1] 송수권, “까치밥시 가운데 인용. 송수권의 깊은 정서적 이해와는 완전 딴판으로 삼국유사는 “射琴匣(사금갑) 기사를 통해서 민족 고유의 명절과 민속인 정월대보름달 불꽃놀이와 까치밥의 의미에 대한 깊은 정서적 이해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왜곡하였다. 삼원절은 후손들이 목욕 재계하고 조상을 기리는 忌日(기일)이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이런 신성한 기일날 궁중에서 남녀가 정을 통하는 불륜극을 삽입하여 우리 선한 민족성과 사회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저자의첨성대 연구책에서 설명된다.

[2] “In the world of politics things wear a different aspect; the rules which are to guide your individual steps give way before the national interests. If you reach that sphere where great men revolve you will be, like God himself, the sole arbiter of your determinations. You will no longer be a man, but law, the living law; no longer an individual, you are then the Nation incarnate.  But remember this, though you judge, you will yourself be judged; hereafter you will be summoned before the ages, and you know history well enough to be fully informed as to what deeds and what sentiments have led to true grandeur.”, de Balzac, “Lily of the Valley”.

[3] 프랑스 대혁명 전후에서의 사법부 불신과 단두대 역사를 상기시켜 주는 대목 같다.  하지만 영국은 프랑스의 법 역사하고는 달리, 법관이 소환되는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거의 없다.  영미국의 보통법 체계에서 판단은 일인 법관이 아니라 공동체를 대변하는 다수의 배심원들에 의해서 판결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영미국은 법의 지배 the rule of law”로 표현되는 사법부 독립의 역사가 웅변해준다.

[4] 사실 이 부분에서 영미국의 법의 지배개념과 충돌하는 것 같다.  이러한 미래적인 역사의 심판대라는 개념에 따른지는 모르지만 프랑스와 우리나라는 과거 사건에 대한 재심사건이 상대적으로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극단적인 예가 될지 모르지만 살인 사건에 대한 오심이 일어났고 그 결과 피고인이 처형되었다면 (“효봉스님의 출가 동기는 일제 시대 때 판사로 근무할 당시 살인사건에 대해 오판을 한 것을 뒤늦게 깨닫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대오각성하여 출가하게 되었고 훗날 조계종 최고위직에 올랐다.) 재심을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법원에서 다시 판단하는 재심사건이 적지 않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재심 사건으로 인해서 역사를 되돌릴 수가 없는 법이고 (다만 국가 배상 또는 보상금이 따른다), 이를 역으로 보면 재심 사건의 존재 그 자체가 법이 올바로 서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역사상 사화가 계속 반복된 우리나라의 과거사처럼 잘못하면 순환론에 빠져 들어 역사적 발전을 건설해 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성공한 쿠데타(내란)를 처벌할 수 없다"던 법원이 훗날 정권이 바뀐 뒤에야 태도를 바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역사적 단죄를 대법원이 내렸는데 또다시 세월이 많이 흐른 현재 스스로 물어보자: 어디까지가 법이고 어디까지가 정치이고 어디까지가 힘의 논리인가? 이 경우 역사의 심판대는 누구였는가?

[5]http://www.theguardian.com/education/2016/mar/05/harvard-law-school-drops-official-shield-over-slavery-links.

[6]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 imagery가 중요하다.  “The shield’s meaning has changed over time.Too many people see the association with slavery. Too many people think the shield has become an impediment.   I endorse the recommendation to retire the shield because its association with slavery does not represent the values and aspirations of the Harvard law school and because it has become a source of division rather than commonality in our community.” 가디언 신문,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