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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기
1. 이 책의 주요 요약
삼국사기 문무왕의 유조문은 당태종 유조문을 도용하고 표절한 역사 조작의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이 책은 지금까지 학교 교과서와 대학 또는 연구계에 서술된 한국사의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사는 삼국사기 전체 분량의 대략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 역사의 핵심 부분이다. 이 책은 문무왕에 대해서 삼국사기가 기술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반박한다. 이 책에서 삼국사기가 범한 결정적 오류를 밝혀내고 그것을 입증해 내는 결정적 증거와 사료를 제시하고 설명한다.
삼국사기가 망작이고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결정적인 증거 하나는 문무왕에 대한 기록 부분이다.[1] 왜냐하면 현재까지 문무왕릉의 비문의 살아 남아 있어서 문무왕릉 비문과 삼국사기의 기록을 비교 대조하면 그 진실이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망작과 조작을 밝혀주는 또 하나의 결정적 증거는 삼국사기가 기록해 놓은 문무왕 유조문이 놀랍게도 당태종의 유조문을 도용하고 표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무왕릉의 비문과 당태종 유조문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 모두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유조문의 문장 구성 형태와 그 의미는 일구일구 일문일문 구구절절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영역에 해당한다. 모두 다같이 한문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도용과 표절 행위에 대한 판단여부를 확인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삼국사기에서 기술한 문무왕의 유조문의 내용은 문무왕릉 비문의 내용과는 크게 다르다. 왜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이 문무왕릉 비문의 내용과 서로 맞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증거 하나는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가 당태종 유조문을 도용한 표절의 범죄행위를 범했다는 사실이다. 문무왕릉 비문은 직접 보고 들은 증인-eyewitnessed이고 직접적인 당사자가 썼다. 따라서 진시황제 순수비와 같이 제1차적 소스이고 삼국사기는 史記사기와 같이 제2차적 소스에 해당한다. 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가장 기초적인 지식이다시피, 제1적 소스가 제2차적인 사료에 우선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한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제1차적 소스로 여길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은 잘못되었다. 진흥왕 순수비나 문무왕릉의 비문은 제1차적 소스에 해당한다. 제1차적 자료들을 취합 선택해서 정리한 사서가 삼국사기와 고려사 같은 역사서이다. 제1차적 소스의 기록 내용과 제2차적 자료인 역사서 내용사이에 서로 배치되는 내용이 나온다면 제1차적 소스가 제2차적 소스에 우선한다. 따라서 문무왕릉의 비문을 정확하게 해석해내고 또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이 당태종 유조문을 도용하고 표절하였다는 사실임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삼국사기가 망작과 도작이고 조작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 결론을 이끄는데 입증의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이 책에서 제기하고 밝혀내는 위 두 가지에 대한 진실은 고려시대 김부식 일당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역사 조작을 범했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증거로 쓰여지게 된다. 문무왕릉 비문 내용에 대한 정확한 번역과 이해를 통하여 삼국사기가 기술하고 있는 부분과의 차이를 들추어내고 그 진실을 밝히는 것 그리고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이 당태종의 유조문을 도용하였다는 표절 범죄 행위라는 사실을 밝혀내면 그것은 삼국사기의 역사 조작의 범죄를 규명하는 결정적인 증거 스모킹건 smoking gun이 된다.
삼국사기 문무왕 기사에서 문무왕의 유조라고 소개한 유조문 전문의 전체 글자수는 350자이다. 이 중에서 238여 글자의 내용이 거의 전부 당태종 유조문을 그대로 베끼고 도용하고 차용하고 표절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책의 설명을 통해서 자세하게 밝혀낸다.
또 삼국사기가 기술한 유조문 가운데 만가 애도시 부분인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이 55자의 구절은 장재의 七哀詩칠애시에서 차용하였다는 점을 제기하고 그 근거를 자세히 설명한다. 이 둘 사이에 “▨牧哥其上狐兎穴其傍” 구절만이 문무왕릉 비문과 일치하는 문장 내용 부분이다. 이 초목가기상 호토혈기방의 구절에서도 삼국사기는 “樵牧歌其上狐兔穴其旁”이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의 “歌”는 문무왕릉비의 “哥”를, “旁”은 문무왕릉비의 “傍”의 글자를 각각 바꾸어 쓴 것이다. 물론 歌는 哥, 旁은 傍과 서로 의미가 같고 글자의 쓰임새가 서로 통하는 같은 뜻의 글자이기에 서로 바꾸어 써도 전혀 의미의 변화는 없지만 삼국사기의 글자는 문무왕릉의 비문의 글자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부연 요약하면,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은 전문 350 글자로 쓰여져 있는데, 55여자의 만가시 표현 구절인 “오나라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의 고운 빛깔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위나라 임금의 서릉 망루는 단지 동작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지난 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는 이 구절 부분은 위진남북조 시대 장재의 七哀詩칠애시를 차용한 표현임을 밝혀지고, 또 이 부분의 45 글자는 구구소한도의 형식으로 표현한 사실임을 밝혀진다.
또 유조문의 律令格式 有不便者 即便改張 12 글자의 문장은 수나라 고조의 유조문에 나오는 구절을 도용한 표절임이 밝혀진다. 삼국사기의 “율령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다시 고치도록 하라”는 의미의 律令格式 有不便者 即便改張의 12 글자 부분은 수나라 고조의 유조문에 나오는 律令格式 或有不便於事者宜依前敕修改 務當政要 구절을 도용한 표현임을 밝혀진다.
이와 같은 사실과 분석에 따라, 삼국사기 문무왕의 유조문 중 문무왕의 화장 장례식 관련 부분인 庫門外庭 依西國之式以火燒葬 구절의 13 글자 그리고 徒費資財 貽譏簡牘 空勞人力 莫濟幽魂 靜而思之 傷痛無已 如此之類 非所樂焉 32 글자 부분 도합 45 글자의 문장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문장들은 주로 당태종 유조문을 베끼고 도용하고 차용하고 표절한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밝혀낸다.
위의 짤막한 요약 설명으로 알 수 있듯이,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의 전체 350개 글자수 가운데 305여자가 다른 글을 베끼고 도용하고 차용한 표절의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삼국사기 문무왕의 유조문은 당태종 유조문을 도용하고 표절한 역사 조작의 경악할만한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당태종 유조문을 번역 설명하고 국사편찬위원회 (이하 “국사위”로 표기)의 삼국사기 문무왕 유조문 해석에 있어서 잘못된 번역을 지적하고 역사의 진실을 바로 잡고자 한다.
2. 심각하고 중대한 도용과 표절의 범죄행위가 미치는 크고 광대한 영향과 범위
삼국사기가 기술한 문무왕의 유조문이 당태종의 유조문을 도용한 표절이고 도작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기록은 1145년경에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거의 900년 전의 과거에 이루어졌던 이미 지나간 과거사에 해당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현재적인 엄격한 도용과 표절행위의 금지의 법적 잣대 또는 연구진실성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영역이라고 대충 넘길 수 있을까?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황우석 사태 같은 연구 부정 행위가 나타났고 그 같은 열악한 교육 환경으로 전락했는가? 그같은 사태가 발생할 정도로 교육과 연구 환경이 황폐해지고 학문적 진실성의 추구와 도덕과 양심의 수준이 흔들리게 되었는가?[2] 삼황오제 요순시대나 공자의 춘추시대 사마천의 사기시대 적어도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중흥시대 때까지는 현재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과 양심이 통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서삼경의 글자 하나 한글자도 틀리는 것을 두렵게 여기고 용납하지 않았던 고대까지를 거슬려 올라가 보면 가히 짐작이 간다. 도용과 표절행위의 금지의 정도 그리고 일반적 법적 도덕적 양심적 수준은 현재보다 훨씬 더 높았다는 추론은 별로 그다지 어렵지 않게 도출된다.
남의 글을 훔치고 자신의 것으로 도둑질하여 진실인 것처럼 거짓 포장하는 표절 행위는 구진과 진리탐구를 가로막는 비양심적이고 부도덕하고 몰상식한 처사일 뿐만아니라 인류의 지식의 축적과 발전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심각한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이것은 실정법인 저작권법이 규율된 지금이나 예전이나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 공통적인 지적 유산의 전승과 인류 문명 발전의 근간이자 인간 본연의 양심과 진실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가 당태종의 유조를 도용하였다는 표절 행위가 밝혀지면 삼국사기에 온전히 의존하고 있는 그동안의 한국의 역사와 그것을 기술하고 있는 학교의 역사 교과서와 대학 교재 그리고 연구서들은 즉시 폐기되거나 수정 처분을 받아야 마땅하다.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 기록은 문무왕릉 비문의 일부분이 현존하기 때문에 그 직접적 사료이자 증거인 문무왕릉 비문과 대조 비교하여 삼국사기의 망작과 역사 조작의 직접적인 증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역사 과목은 초중고등 학교의 정식 교과과정은 물론 대학에서의 교과목 그리고 국가 공무원 채용이나 승진 시험 과목 등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역사 과목은 국가 형성과 유지의 근본이자 골간의 역할을 담당한다. 또 우리나라는 헌법상 “문화 국가Kulturstaat” 원칙을 채택하고 있고, 따라서 문화국가론에 따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을 지켜나갈 의무가 있으므로, 정부는 잘못된 역사를 즉시 바로잡을 책무를 지고 있으며 이에 대한 책무를 게을리 할 수 없다.
3. 왜 여지껏 삼국사기 문무왕 유조문의 도용과 표절이 밝혀지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여지껏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이 당태종의 유조문을 그대로 도용하고 표절했다는 경악할만한 역사 조작의 범죄행위가 밝혀지지 못했을까? 삼국사기의 전체 내용을 대략 보면 삼국의 개국 시조 기사와 최후 멸망의 기사 그리고 삼국통일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문무왕의 기사가 삼국사기의 분량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가장 주요한 내용 부분이다. 삼국통일의 대업적을 이룬 문무왕과 그의 아버지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합친 문무왕 관련 역사 부분이 삼국사기의 거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문무왕의 역사가 조작되었다면 그것은 한국 역사의 전체가 조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문무왕의 역사와 그 문무왕의 유조의 진실 여부가 여지껏 전혀 밝혀지지 못했을까?[3] Why?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1145년경에 편찬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왜 지금까지 그토록 870년이 넘는 오랜 시기 동안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이 당태종의 유조문을 그대로 도용하였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질 수 없었을까? 왜 지금까지 그러한 오류 가능성 등은 언급되지도 않았고 온전히 무시 배제되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맹신하고 신격화하며 마치 진실인양 가르치고 배워 왔을까?
사실 삼국사기가 망작妄作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망작의 죄를 저지른 결과라는 것을 말해주는 서문 하나가 삼국사기가 아닌 1478년에 발간된 “동문선”(東文選, 表箋, 進三國史記表)에 실려 있기는 하다. 여기서 표현하기를 김부식은 “妄作之罪”를 사면해 달라고 빌고 있다. 망작은 없는 사실을 있는 양 거짓으로 호도하고 꾸며낸 고의적인 조작을 뜻하는 말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가 妄作之罪 망작지죄임을 스스로 자백했다는 것일까? 그리하여 “赦妄作之罪” 사망작지죄라고 빌었는데, 천벌받을 망작지죄를 지은 자신의 업보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일까?
삼국사기가 1145년경에 편찬되었다고 하는데, 여지껏 870년이 넘는 장장 유구한 세월 동안 삼국사기의 문무왕 유조문이 당태종의 유조문을 도용하였다는 그 경악할 만한 사실이 전혀 밝혀지지 못했고, 또 오늘날까지 그토록 오랫동안 그러한 ‘오류 가능성’마저 언급되지도 않고 온전히 배제되며, 국정 교과서[4]에 전재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다.
식민지사관과 유불선儒佛仙간의 종교갈등에서 야기된 한국사의 근본적인 문제점[5]과 그 해결능력을 찾지 못하게 만든 삼국사기의 오류를 바로잡지 못하고, 마치 삼국사기 전체가 한국역사의 진실인양 경전의 가치로 맹신되고 급기야 자유토론마저 배제된 채 무조건 주입식 교육으로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맹목적으로 배워 왔다는 사실은 심히 유감이다. 과연 이렇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기서 다만 두 세 가지로 짧게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파벌 계보 등 한국의 학계 연구계가 빠지기 쉬운 한국의 연구 풍토병이나 혹은 그러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고 또 언어능력 외부적 시각 균형감각 자유토론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 독립적 탐구 조사 능력을 배양하고 노력한 나의 배경이 이 책을 쓰게 만들게 한 것 같다.
(1) 식민지 사학과 주체 상실
① 북방민족의 식민지 지배로 전락한 고려시대 때 쌓인 역사 조작의 적폐
고려시대부터 북방민족의 식민지 지배로 전락한 후 식민지 기생 아부세력이 역사를 조작한 적폐가 쌓여진 결과 참된 한국사를 재발견하고 성찰할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935년 천년왕국 신라가 망한 후 중세암흑기 고려를 엎은 조선은 세종대왕의 르네상스를 구가했다가 단종애사 군사쿠데타를 겪은 후 결국 임진왜란을 당하고 말았고, 그 결과 왜란 후 40년도 안되어 1636년 병자호란의 치욕을 다시 겪고 북방 오랑캐 청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약 반오백년 동안 만주족의 청나라의 지배 아래 신음하다 끝내 1876년 강화도조약을 통해 일제에 굴복하고 1910년 병탄당했다.
당나라 (618-907)가 망한 후 중국에서 건너 온 “生於中國” 태조왕건이 고려(918-1392)를 세웠는데, 고려는 북방민족의 지역에서 발흥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자처했다. 고려는 요나라의 침입을 받자 서희부터 강화를 하고 결국 차례대로 금나라와 원나라의 식민지 지배체제에 편입하게 되었다.
남방민족은 남경에 수도를 정한 명나라(1368-1644)를 세우고 몽고족의 원나라 (1271-1368)를 몰아냈다. 청나라 (1616-1924)를 세운 만주족은 금나라를 세웠던 여진족의 후손이다. 만주 여진족은 금나라 (1115-1234)를 세웠었고, 청나라는 나라 이름도 금나라를 이어받은 후금이라고 지었다. 그 방계족속 거란족은 요나라 (916-1125)를 세웠다.
숙신 선비 흉노 읍루 돌궐 거란 말갈 여진 몽고 만주족은 모두 같은 북방민족에 속하고, 이들은 상나라 주나라 한나라 진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에 끊임없이 맞섰고, 한족 정통왕조가 무너진 후 북방민족의 왕조를 세우고 중원을 차지했다. 기름진 옥토 아름다운 금수강산 한반도를 차지한 한민족 국가는 북방민족이 중원을 차지한 시기에는 강토를 끊임없이 침략당하고 환란을 맞이하고 말았으나, 반면 商 周 漢 晉 唐 宋 明 상 주 한 진 당 송 명 시대에는 찬란한 번영과 평화를 누렸다. (나의 이 책에서는 다루지는 않는데 여담으로 한마디 적자면 남방민족이 다시 중원의 중심에 서는 날이 곧 다가올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배분적 정의에 따라 같은 것은 같게 틀린 것은 틀리게 구분해내는 것이 학문의 요체임을 알고서 단순한 구호식으로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한 목적으로 꺼낸다면, 한복韓服은 한복漢服이고 따라서 重回漢唐중회한당 이태백과 두보의 달밤이 신라의 달밤으로 다시 꽃피우리라.)
해방과 동시에 재건국되었건만 동족상잔의 6.25 한국동란 결과 여지껏 전작권이 없는 반수불구 국가이다보니 혼란의 식민지 상태를 극복해냈다고 말할 수 없고, 또 그런 배경에 의한 불안의 지속과 불행한 형국이 계속되고 있는 현황이다. 나의 생각이긴 하지만, 국민들의 생각이 식민지의 세계관과 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진실이 밝혀지기란 기대하기 매우 어렵다. 세계를 지배하는 슈퍼파워 제국주의의 지배 이념과 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자동인형에 불과한 기득권에 점철된 기생충 세력은 자기 이익을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 공론의 장에서 사실에 입각한 토론을 통한 진실의 발견의 과정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의 왜곡됨이 명약해지고 도덕적 고결성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기 일에 대하여서는 재판관이 될 수 없다.’.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북방이민족 침략자에게 헌정된 ‘삼국사기’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고[6], 결국 몽고족의 지배 아래 조작된 ‘삼국유사’가 급기야 2003년 국보로까지 지정되고 한국사 교과서에 정사의 위치에 오르게 된 역사의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7]
세월호 전복 사고 원인의 교훈으로 알 수 있듯이 배에 짐을 가득 실으면 기울게 되고, 세상만물은 극에 달하면 다시 시작된다. 이 物極必反器滿則傾 물극필반 기만즉경의 자연과 역사와 정치의 법칙에 따르면 비록 물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의 삶의 질은 오히려 떨어지고 소득양극화가 가속되고 있는 요즈음, 공정과 정의의 자명한 가치마저 박제화되어 버린 작금의 상태는 우리나라 사회가 말세화의 발악증상을 나타내고는 있지 않는지 그런 위험성이 크게 보인다. 그렇다면, 적폐를 깨끗이 쓸어버릴 대홍수가 지나가고 난 뒤엔 무지개가 반짝 뜰 것이며 산 너머 남촌에는 제비가 호박씨를 물고 오고 매화나무 위엔 종달새가 신록을 예찬할 것이다. 진달래 피는 그 골짝에 민족중흥의 새역사가 쓰여지게 될 그날이 다가온다. 나라가 망한 치욕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勿忘國恥물망국치의 역사의 교훈을 유신은 애강남부로 남겼고 황현은 매천야록으로 남겼다.[8] 잠든 역사[9]를 일깨우고 진실을 재구성하려고 할 때 어떻게 방법론을 세워야 할까?
(2) 역사 교육 방법론의 부실
1. 역사에 대한 시각과 관점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는 엘리어트의 인구에 회자되는 황무지[10] 싯구를 다시 생각해 본다. 다음 사진은 언젠가 여행을 하면서 Spring umbrella 봄우산[11] 그림을 보고 스마트폰으로
찍어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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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그림은 심리학 교과서 설명에 흔히 등장하는 그림이다. 늙은 할머니로 보이는가? 젊은 아가씨로 보이는가?
뉴튼이 말했듯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타서야 멀리 또다른 세계를 내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주인공 선생의 역으로 나왔던 배우는 지금 유명을 달리했지만 그가 학생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가서 외친 장면-다른 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쉬임없이 계속해 해나가라는 그의 충고-는 내게 생생하게 남아 있다. 물이 반짝 들어찬 컵인가 아니면 반이 비어있는 물컵인가의 “프레임” 관점[12]으로 유명한 비유는 익히 이해하기 쉬울 테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봄비’와 연관된 봄우산과 구근 알뿌리 그림을 보면서 심리학적 관점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쉽게 다가올지는 의문이다. 비록 엘리어트의 황무지 싯구에 익숙해 있는 사람일지라도.
2. 탐구 학습 교육 방법론과 소크라테스 질문법
카아가 역사는 대화의 과정이라고 말했는데, 대화는, 소크라테스가 메논과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며 전체를 이어가듯이, 질문의 방법으로써 이뤄진다.[13] 이런 카아의 역사 방법론은 본질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질문법에 해당한다. 소크라테스 방법론은 전통적인 영국의 교육방법론에 적용되어 왔는데, 존 듀이의 교육론 그리고 최근에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탐구 학습 방법론 또한 이를 적용한 교육론이다. 소크라테스 질문법에 대해 아래와 같이 잠깐 설명해 보기로 한다.
① 첫 번째 단계는 상대방의 주장이 무엇인지 그 핵심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란 무엇인가?” 등과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하였다. 나의 책에서 ‘문무왕의 유언은 무엇인가?’라고 핵심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제기하는데 이 질문이 이 단계에 해당한다. 소크라테스 문답법에 대해서 잘 알려진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926년 담뱃대 파이프 그림[14]으로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첫 번째 명제는 ‘이 그림은 파이프이다’.
② 이 문장의 명제가 어떤 의미인지를 파고 들어가 보자. 이 문장이 거짓이라고 가정하고서, 이와 어긋나는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이런 질문으로는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에게도 파이프로 보일까요?’라는 것이 되겠다. 만약 아니오라고 대답한다면 다음 단계의 질문으로 넘어가고, 만약 예라고 대답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파이프가 아니고 작대기나 만년필로 보인다면?’ 같은 질문을 해보자. 즉 담배가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파이프라고 여기게 될까? 언어와 재현의 문제이겠지만 이러한 질문은 사물이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당황함을 안겨줄지 모른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자.
③ 예외적인 것을 감안하여 첫 번째 명제를 다음과 같이 바꿔보도록 하자. ‘그렇다면 그림을 파이프라고 바라보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 한정된다는 것일까?’
④ 위 명제를 또 다른 질문으로 반박해 보자. 만약 그림에 글자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면 그래도 파이프라고 보일까? 이 질문에 상대방은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바로 상대방의 첫 번째 명제와는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인식이나 감각은 상대적이라고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런데 위의 과정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대적이라는 명제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서 오로지 질문만을 통해서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림 속의 파이프는 담배 파이프를 화선지 위에 그린 그림일 뿐이지 파이프 그 자체는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고도의 3D 프린트 기술이 발전한 현재에서도 담배 파이프가 아닐 수 있다. 또한 트레이시 에민[15]의 작품 속의 텍스트도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를 그린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처럼 간단해 보이는 그림 하나가 수 많은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소크라테스 문답법은 상대방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의존하고 있는 기본 전제를 부정해 들어가며, 질문[16]을 통해서,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끔 만드는 기술이다.[17] 위의 마그리트 그림의 예를 통해서 알다시피, 사물은 사람들이 인지한 대로 그들의 생각에 달려 있다는 점을 말할 수 있다. 관점이 달라지면 그 사실도 달라질 수 있다는 철학적 사고로 전개할 수 있다.
마그리트는 파이프를 재현한 그림 속 아랫쪽에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자를 써 놓고 있는데, 그림과 문장의 의미는 모순되게 표현한 것이다. 그는 화가가 대상인 사물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 대상의 재현일 뿐이지 그 사물 자체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위에서 소크라테스식 질문을 ‘파이프란 무엇인가?’로 전개해도 같은 결론에 이를 것이다. 상대방은 파이프로 보인다고 말했지만. 이 그림은 파이프가 아니다. 사람들의 인식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것, 즉 인지는 그들의 생각에 달려 있다는 점을 말할 수 있고, 또 관점이 달라지면 그 사실도 달라질 수 있다는 사고를 꺼낼 수 있다.
‘그래픽’의 어원인 그리스어 graphein의 뜻은 글을 쓰다 write와 그리다 draw의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갖고 있고, 한자의 圖書도서 또한 서적書籍 문서를 뜻하는 단어인데, 글이나 이미지나 그것이 나타내는 그 사물과 꼭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 즉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은 그림이지, 파이프가 아니다. 그렇다면 화가가 파이프 그림을 그려 놓았지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마그리트의 그림 속의 명제가 합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푸코 Foucault는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고 그 철학적 사유를 펼쳤는데 푸코의 구조주의 비판에 대한 관련 부분은 그 책[18]을 참조하라. 푸코는 조형적 재현인 이미지와 언어적 지시인 텍스트 이 둘 사이의 분리를 주장하고, 유사 resemblance와 상사 similitude 개념을 분리해 내고, 유사와 확언 affirmation 사이의 등가성 equivalence을 제시했다.
시인이 언어를 통해 보는 상상의 세계나 화가가 대상을 시각적 이미지로 읽는 초현실의 세계는 서로 같은 동궤를 타고 있다. 그러므로 시적 감수성은 회화적 상상력과 같은 힘의 원천이 된다. 다음은 첨성대에 대한 책에서 설명할 주제이지만 여기서 잠시 소개만 해놓고자 한다. 마그리트는 밤의 풍경과 낮에 보는 하늘을 한 화면에 재현한 <빛의 제국>의 작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낮과 밤의 기억이 우리 마음에 서로 불러 일으키는 감정의 환기성은 우리들에게 경이감을 느끼게 하고 매혹에 빠지게 만드는 힘을 선사해 준다. 나는 이 힘을 문학적 시詩라고 부른다.”[19]
3.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
비판적 사고
비판적 사고나 창의적 사고 체계를 함양하는데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 중에는 지금까지 행해진 학교 교육의 잘못된 방향과 식민지 교육의 목적론과 방법론이 자리잡고 있다고 단언해 볼 수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검토는 나의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으며, 다만 비판적 사고의 개념 그리고 소크라테스 방법론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신선놀음 바둑두기 같은 게임에 몰두할 때 ‘시간가는 줄 모른다’는 야단을 맞은 적이 있는데 이런 때 사용하는 말로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爛柯란가라는 속담이 있다. 상전벽해가 되는 변화무쌍한 인간세상에서 침잠하고 성찰하는 일이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더구나 잘못하다간 나르시스트처럼 우물안으로 빨려 들어 가고말 위험이 크다. 변화가 많은 세상사에서 거짓을 식별하고 옳은 것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앞 뒤를 분간하고 수풀을 헤쳐갈 수 있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이유와 전제와 결론이 확실하게 뒷받침되는가를 꼼꼼히 따지는 사고가 필요한데, 이를 ‘비판적 사고’라고 말한다. 이는 호수에 얼굴을 들여다보고 자기 반성하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말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성찰省察이고, 반악潘岳의 싯구로는 푸른 호수에 몸을 돌이켜 성찰한다는 思反身於綠水이고, 근대 교육학의 개념으로는 존 듀이가 말한 성찰적 사고 reflective thinking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개념으로써, 비판적 사고는 주장의 근거를 통해 지식을 꼼꼼하게 검증하는 것이다.
진시황제의 중원통일은 劒검으로써 이루어졌는데, 이 법가 통치철학의 검은 檢검 글자하고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검찰檢察공화국이라는 비아냥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오늘날 불행한 한국의 형국에서의 검찰과 같은 의미의 어휘로 쓰이게 된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는 진나라가 망한 원인을 다시 고찰하고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방에게 올린 진나라가 망한 원인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신어에서 육가가 논한대로, “秦非不欲爲治 然失之者 乃擧措暴衆 而用刑太極故也 是以君子尙寬舒以苞身 行中和以統遠”, 진나라의 실패 원인은 백성들에게 형법을 극에 달할 정도로 이용해서 포악한 정치를 펼친 것에 있었다.
상앙의 법가 사상을 ‘법의 지배’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진시황제의 통일의 기초 劍검은 일제 시대와 같은 ‘법에 의한 지배’ 즉 rule-by-law이었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통치이념인 ‘법의 지배’ rule-of-law가 아니었다. 상앙과 이사의 진나라나 스탈린의 공산 소련이나 일제 명치시대 군부정치나 오늘날 북한의 백두 체제나 모두 말로는 ‘법에 의한 통치’ 체제였다. 하지만 이들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연법 사고가 작동하는 진정한 ‘법의 지배’와는 거리가 멀었고, 총칼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움직이는 약탈적 지배 체제 그래서 소수지배계층만이 고대광실을 차지하고 떵떵거리고 사는 나라 “民弱國強” 민약국강의 권위주의 압제적 억압 통치 체제였다. 자유와 민주주의와 토론이 말살된 억압사회에서는 비판적 사고와 창의적 사고의 꽃이 피거나 열매를 결코 맺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한편 칼은 도장을 파는 수단인 것처럼 잘못된 글자를 미리 점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예전에 여자가 시집을 갈 때 은장도를 챙겨갔는데 부녀자가 단칼을 간직하는 이유는 자기 검열이거나 비상상황에서 자기를 방어하는 수단에 있었다. 양귀비처럼 또는 풍신수길의 처가 단칼로 자결을 하는 것처럼. 그런 은장도를 묘사하는 시선詩仙 이태백의 싯구, “寶劒雙蛟龍 雪花照芙蓉 精光射天地 雷騰不可衝” 구절이 있다. 시퍼런 칼날이 춤추는 가운데 풍호자 같은 검투사가 목숨을 걸고 나서듯, 가을서릿발 秋霜추상같이 엄격하게 자기 검열하는 것, 그렇게 매서운 눈초리로 틀린 글자를 검열하는 것, 군대에서의 인스펙션 inspection이 檢검자의 뜻이다. 자신의 의견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하고 타당한 이유와 근거를 추상같이 단호하게 제시해야 한다. 일말의 잘못됨에도 합리적인 의심을 품고 그것을 논증할 수 있는 사고력이 비판적 사고에 해당한다.[20]
왜 많은 사람들이 창의적인 자신만의 생각을 해내지 못할까?
새로운 발견은 외부적 시각에서 전혀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발견되기 쉽지 않다는 와호장룡의 어려움이 있거나 또는 어떤 직관적이거나 계시적인 도움을 필요로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이 직관력을 가지기 힘든 이유로는 이성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습관적 태도에 있다고 말들을 한다. 만약 나의 연구 결과를 얻는데 직관이나 계시적인 생각이 통했다면 아마도 그것은 한국과 여러 외국의 문물과 사고를 직접 겪어 보고 통찰한 가운데 얻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인슈타인은 발견의 과정에서 어떤 내적 가슴 속에서 일어나오는 직관력이나 영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내가 우주천체의 근원적 법칙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이성적 능력으로써가 아니었다. 지성은 발견의 과정에 크게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적 가슴 속에서 튀어 오르는 무언가에 있는데-그것을 직관 또는 무엇을 하려는 의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해결책이다.”[21]
우주 질서의 법칙은 ‘침묵’하고 있다. 다만 인간은 거기에 이미 존재한 진리를 ‘발견’하면서 인간의 삶을 발전시켜 왔다. 우주는 ‘빅뱅’하고 원자 분자 운동처럼 잠시도 쉬지 않지만, 뉴튼 아인슈타인 등 위인들의 전기가 말해주듯, 인간은 침묵 속에서 진리를 발견한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하여 인류 최초로 우주 천체를 관측한 뒤 그가 발견한 진리를 담은 책의 제목을 “별의 메신저”라고 붙인 의도는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눈과 머리와 가슴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는 그 과정을 말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천체 관측과 원자 운동(DNA 나선구조)의 발견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외양과 실체는 다를 수 있다. 5%의 보이는 우주와 95%의 보이지 않는 블랙홀 같은 흑암 Dark Matter이 존재한다. 사람은 벌이 꿀[22]을 창조해내듯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차이를 통합해내는 사고 체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해석 작업 interpretive process’이 개입되고 작동하지 않는다면 진리는 발견되기 힘들 것이다.
[1] “The concept of evidence is central to history because it is only through the use of evidence that history becomes possible.”
[2] 아무리 제약하는 둑이 두껍고 높다 한들 강물은 바다로 흘러들 듯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은 결국 뚫린다.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만인평등 인권 이런 가치들은 자명한 원칙이지만 그저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투쟁하여 얻어지는 소중한 가치이기에 항상 새롭게 하여 스스로 지켜나가지 않으면 빼앗기고 만다. 진실의 가치 발견 또한 이와 같다.
[3] 아무리 제약하는 둑이 두껍고 높다 한들 강물은 바다로 흘러들 듯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은 결국 뚫린다.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만인평등 인권 이런 가치들은 자명한 원칙이지만 그저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투쟁하여 얻어지는 소중한 가치이기에 항상 새롭게 하여 스스로 지켜나가지 않으면 빼앗기고 만다. 진실의 가치 발견 또한 이와 같다.
[4] 현재 역사 교육의 문제점 하나를 지적한다면 그것은 진보와 보수의 양 이념적인 진영으로 나뉘어진 당파적인 이익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이다, “public education was a bipartisan”.
[5] Making predictions encourages students to explore historical empathy. How did different individuals perceive the historical event? Why?
[6] 삼국사기가 왜 삼국의 개국관련기사를 조작하고, 신라와 고구려의 왕계를 바꾸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국왕 이름들이 고고학적 발굴 유물과 사실과 다른지, 대당전쟁사의 진실 등 삼국사기의 조작된 역사를 정확한 사료 추적과 분석에 의거하여 진실을 밝혀내는 작업 그 연구결과물을 시리즈로 계속 발표할 예정이다. 문무왕 유조문 조작 부분을 밝히는 이 책은 이 시리즈 기획물 중 첫 번째이다.
[7] 毒樹毒果 독수독과 원칙, The Fruit of the Poisonous Tree.
[8] 자주 독립에 대해서 다음 인용의 글을 참조하고 잠시 생각해 보자. “여러분을 한 국민으로 구성케 하는 통일된 정부는 지금 여러분에게 소중합니다. 그것은 그럴 만 한 바, 그것은 여러분의 진정한 독립의 전당에서 여러분의 국내 안온과 대외 화친과 여러분의 안전과 평화, 그리고 여러분이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를 떠받치는 하나의 큰 기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진실에 대한 여러분의 확신을 약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운동과 여러 진영에서 많이 애쓸 것이고, 많은 책략을 동원할 것이 쉽게 예견될 뿐 아니라, 그것은 국내외 적들의 공격이 끊임없이 또 적극적으로(때로는 은밀하고도 교활하게) 그 포문을 집중시킬, 여러분의 정치적 보루의 급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국민의 집단 및 개인적 행복에 대한 국민총화의 무한히 큰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해야 하고, 또 그 가치에 대해 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부동한 애착심을 품으면서, 그것을 여러분의 정치적 안정과 번영의 수호자로 늘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을 기르고, 경각심을 갖고 그것을 유지하도록 감시하고, 그것이 어떻든 파기될 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보여주는 모든 것에 반대하고, 또 우리나라의 일부 지역을 여타 지역들과 소원케 하거나 혹은 현재 여러 지역을 하나로 연결하는 신성한 결속을 약화시키려는 기도에 대해 바로 그 시초에 분연히 반대의 뜻을 표시해야 하는 것이 무한히 중요합니다.”, George Washington: Farewell Address (1796) / 9. 조지 워싱턴: 고별연설, “살아있는 미국 역사와 민주주의 문서”, 55쪽.
[9] These hierarchically ordered conceptions are (1) history as a nation’s memory, (2) history as a story of mankind, (3) history as an enactment in one’s mind of the past, (4) history as a study of change and struggle over time, and (5) history as an interpretation of the past. Explanations of each category together with the quotations from teachers’ responses follow.
[10] TS 엘리어트의 “황무지 The Waste Land”의 시구절은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4월은 잔인한 달 / 마른 땅에서 라일락 꽃나무의 새싹을 틔우고, / 봄비로 추억과 희망을 뒤섞고 / 잠자던 뿌리를 일깨운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 Memory and desire, stirring / Dull roots with spring rain.”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 중에 나오는 싯구절, “4월의 감미로운 봄비가 내리면 / 3월의 가뭄을 해갈하고 / 어린 나무 가지를 달콤한 소나기로 흠뻑 적시며 / 꽃봉오리를 터트리며 꽃을 피워낸다 / 서녘 산들바람이 녹녹하게 불어오면 / 들판과 산속의 기도원과 / 상큼한 나무잎새들이 설레인다.”
[11] Under the umbrella of constructivism are the various modes of ‘talk’ which take place within the classroom, encompassing discussion between the many different power relationships in the learning environment.
[12] 역사 교육에서의 관점에 차이에 대해서는 Challenge Competing Demands, time, scale, pattern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Neumann, D., “A Different Way of Viewing History Teaching: Balancing Competing Intellectual Challenges”, Social Education 74(4), 2010, 184–188,
[13] History… [is] both the inquiry conducted by the historian and the facts of the past into which he enquires”. , 카아, “역사란 무엇인가?”, at 55.
[14] “Ceci n'est pas une pomm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René Magritte (1898-1967), “이미지의 배반 La trahison des images”, 1928~29년, 63.5 cm × 93.98 cm, 캔버스에 유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15] 영국의 유명한 화가 Tracey Emin (1963-), “Everyone I Have Ever Slept With 1963–1995” (1995), You Forgot to Kiss my Soul (2007).
[16] elenchus; questions
[17]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당황하게 (aporia; puzzlement) 만드는 기술이다.
[18] Foucault, M., Harkness (Editor, Translator), René Magritte (Illustrator), “This Is Not a Pipe”, Quantum Books.
[19] Rene Magritte, The Dominion of Light, 1954년, 146×113.7cm, Musee Royaux des Beaux-Arts, in his 1956 Guggenheim Prize speech, saying: “I find the evocation of night and day is endowed with the power to surprise and enchant us. I call this power poetry.”
[20] Beyer, B., “Critical Thinking” (1995), 참조.
[21] 아인슈타인, “I did not arrive at my understanding of the fundamental laws of the universe through my rational mind. The intellect has little to do on the road to discovery. There comes a leap in consciousness, call it intuition or what you will, and the solution come to you.”
[22] 모방과 창조적인 일을 비유로써 쉽게 설명하는 데 벌꿀의 예를 자주 들고 있다. 에라스무스가 들고 있는 벌의 비유를 읽어 보자. “자연계에서 한 예를 보자. 벌은 벌집에 꿀을 모이기 위해서 하나의 수풀에서 재료를 모와 오는가? 그게 아니라 벌은 온갖 종류의 꽃, 잡목, 수풀 모두를 정말 열심히 날아다니지 않는가? 또 벌이 모아온 것 그것이 바로 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벌은 그들이 모아온 재료를 자신의 기관을 이용하여 액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얼마 후에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이전의 꽃이나 수풀이 가졌던 향기나 맛은 가려낼 수도 없을 정도로 모든 재료들이 적당한 비율로 서로 혼합된 것인데 벌은 이렇게 해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암양은 한 가지 풀로 뜯어 먹고서 우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암소는 온갖 가지 풀을 뜯어 먹고 또 풀에서 즙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그 즙에서 변화된 우유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Erasumus, Ciceronianus (The Ciceronian) at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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