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5-1510) 의 그림으로 유명한 “비너스의 탄생”의 그림에서 비너스가 큰 조개 껍질 위에서 서 있는 누드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서도 인류는 바다가 고향일 것이다. 생명체는 물이 있어야 사는 조건이고, 그러면 물에서 생겨났지 않았겠는가?
1.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그런데 보티첼리는 비너스가 서 있는 발판이 조개의 모습만 그려 놓고 있는데 보티첼리와 똑 같은 소스 배경 바탕에 두고 그림을 그려낸 라파엘 Raphael (1483–1520)의 “갈라티아 Galatea”의 그 회화를 보면 조개와 굴의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다.
2. 라파엘, 갈라티아.
메디치의 가의 후원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전성기에 속했던 이들의 사상의 조류를 살펴 보면, 베에토벤의 음악이 완성해 낸 것과 같이 인간은 “환희와 고통”이 교차하는 것이 휴머니즘의 내용이고 볼 수 있는데 , 이와 같은 이중적 동시 내포를 갖고 있다고 나는 해석하고 싶은데 그렇다면 조개와 굴의 두 가지 바닷가의 상징적인 물건을 그려낸 라파엘의 갈리티아가 문학적 표현에 더 가깝다고 여겨지는데, 그와 같이 인류의 탄생은 굴(오이스터)과 연관이 깊다고 볼 수 있다.
아이의 탄생도 굴처럼 엄마 뱃 속에서 다 커서 태어나지 않는가?
암튼 휴머니즘의 조건은 야누스와 같이 두 가지 대비 대조적 성격이 함께 하고 있다.
이런 조건을 표현해는 미켈란젤로의 “죄수 Captive”에서도 보여진다.
그림 3, 미켈란젤로, “Captive or Slave”, Figure for the tomb of Julius II (1513-1516). Louvre 박물관
그림4. 죄수 (상세부분)
흔히 우리들이 섹스할 때의 모습을 살펴보면 오르가즘을 느낄 때, 그 오르가즘의 순간 비명처럼 눈물을 흘릴 때 처럼 환희와 고통의 순간이 오버랩 되는 것 같지 않는가?
여자의 가성은 다른 측면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환희는 땀으로 범벅이 되지 않는가? 숨가쁘게 숨을 헐떡거리며 산모의 고통처럼 고통 속에서 환희가 탄생되지 않는가? 아니 최소한 두가지의 성격과 모습이 함께 하지 않는가?
미켈란젤로의 “죄수”에서 나는 그것을 본다.
사람의 영혼은 육체에 매어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초월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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