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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노블레스오블리주

호사유피 인사유명 천도무친 상여선인 天道無親 常與善人

by 추홍희블로그 2017. 1. 20.

왜 글로써 모든 생각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가?


사마천의 말처럼, “死日然後是非乃定 죽고 난 후에나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가려질 수 있고, 書不能悉意 글로써는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생각을 짜내어 담아 내기 어렵다.”


모든 것은 떠나는 것에 있는데, 최소한 누군가에게 내가 남길만한 그 하나를 찾고자 했고, 간절한 그것에 대한 응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세상을 향해서 외칠 그것을 찾게 되었다.  아무튼 글로써는 머리 속의 생각과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 표현하기가 무척 어렵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그러나 무엇 하나 이루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드는 순간


이 책은 일필휘지로 단숨에 써내려 갔다.  물론 이 말은 붓으로 쓴 글이 아니라 컴퓨터로 타이핑한 글이고, 또 한자 사전을 찾아보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성격이고 또 해석이 안되는 구절을 두고서는 밤낮으로 생각을 거듭해도 알 수가 없어서 불면의 밤을 보내다가 차라리 포기하고 그만 두자고 산과 바다를 뛰어다닌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일필휘지라는 말은 액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과장법에 불과하리라.


하지만 1000여 페이지의 책 내용을 단숨에 써내려 갈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평소에 쌓아 올린 어떤 요소와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시도한 작업은 한국의 국보인 고대 금석문을 재해석함으로써 위대한 한국인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복원해 낸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최소한 이런 나의 임무가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리라는 희망과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와 요소가 몇 개 정도를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 하나만 언급해 본다면 그것은 나의 작업 과정에서 한국의 국어 사전이나 한자 해석은 거의 의존하지 않았고 그 대신 중국과 일본의 한자 사전 영어 사전을 통해서 이루어 낸 작업이라는 사실에 있다.  


한국인은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선입관과 단편적인 지식이 온전한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는 경우가 클 것으로 보이기도 하므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발견하거나 이해하고자 새로운 노력을 시도할 때는 지금까지 익숙한 파라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힘들 지도 모르겠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이 있다.  사람이 지극정성으로 기도하고 추구한다면 때로는 하늘도 감동한다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그 말이다.  나의 바람이 얼마나 통했는지는 오로지 내가 죽고 난 이후에나 가려질 것이다.


立名者 行之極也


사마천이 인의예지용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사람의 행동 동기는 이름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立名者 行之極也의 사마천의 말은 오늘 날 마슬로우 같은 심리학자가 내세우는 욕구 단계설과는 차이가 나는 생각일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죽음의 문턱에서 겪어 본 기억을 되살려 본다면, 내가 생사의 기로에 선 순간, 가장 후회스런 점은-유언장 하나 같은 저서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은 것 즉 내가 어머니의 뱃 속에서 태어나 이 세상에서 살면서 비록 효도 한 번 못한 불초자식이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한 번 다녀갔다는 발자취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는 후회가 엄습해 왔다는 것-그것을 보면 나는 사마천의 동기 이론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은 스스로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농업사회에서 최소한 자기 땅에서 나는 머루와 다래를 따 먹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 같다. 


사람은 배운 바대로, 자기 몸을 보전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다.  그런데 사마천의 말마따나, “몸이 이지러지고 망가지게 되면, 비록 타고난 재능을 품고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고 남과 화합하고, 순수하게 행동해도, 아무리 해도 작은 영예 하나 얻지도 못하고, 스스로 부족함이 넘쳐 남의 비웃음이나 사고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 뿐이지 않겠는가? 


그래도 사마천은 현명한 임금님을 만난 덕분에 월급을 받고 시중을 받으면 최소한 좋은 잠자리와 먹을 것이 보장된 삶 속에서 치욕을 감수해 냈다.  사마천은 자기 자신은 치욕이라 여겼지만 남들에게는 최고의 권력을 행사한 국왕의 최측근 중에 한 사람 즉 권력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사람의 운명이란 어느 누구도 어떤 것을 다 가질 수가 없다.  최고의 군주로 추앙받고 있는 진시황제이나 당태종은 나이 겨우 50세에 갑자기 죽었다.  사마천이 나열하듯이, 인류 역사상 돈과 권력이 최고인 것 같이 보여질 지 모르지만, “높은 부를 축적한 귀족세문이면서도 이름을 내지 못한 인물이 수없이 많았던 반면 오로지 뜻이 크고 기개있는 비범한 인물만이 칭송을 받았다.”  또 최고의 권력을 잡았다고도 하루 아침에 형장에서 나락으로 떨어져 한 숨의 재도 남기지 못하고 오명 속에 사라진 사람이 어디 한 두 명인가?  우리나라 작금의 현대사를 살펴봐도 몇 권의 책을 쓰고도 남을 지경으로 그런 사람들이 넘치고 넘친다.  


사람은 살아 남아야 자기의 뜻을 최소한 전할 기회를 갖게 된다.  사람이 죽으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에게 기회가 없다면 무엇을 이룰 수가 있겠는가? 


곡신불사


사마천이 말하듯 역사상 위대한 사람의 업적은 그가 절망한 상태에서 울분을 참아가면 후손을 위한 그 무언가를 남기고자 하는 하늘의 천명을 인식한 이후에 나타났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달성하면서 형과 세에 달려 있다고 했으므로, 사람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것은 하늘의 심판이지 계시에 해당할 것이다.  바로 욥처럼 말이다.  사람이 시험을 받지 않으면 통과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시련이 없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가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우지 않는 이상 어찌 욥처럼 정금같이 단련되어 나올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련이 있어 단련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는가?  그리고 노자의 말처럼 영원히 죽지 않는 곡신불사가 있다.  하지만 현인의 발끝에 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우리들인데 무엇을 쫓고 무엇을 바라보겠는가?  호사유피 인사유명이라고 하지만, 이름난 유명인이라고 한들 어디 한 세대를 못 가서 잊혀지고 말지 않는가? 


탈고의 순간은 최소한 유언장은 남겼다고 생각하는 순간일 것이고, 그러면 이제 어느 누구에겐들 살가죽을 도려내는 상처를 받는다 해도 내게 무슨 후회가 있으랴!


우리의 삶은 패러독스라고 하더니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내가 어찌 천도를 논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만시지탄이었다.  노자의 천도무친 상여선인 天道無親 常與善人 Heaven’s Way favors none, but always sides with good persons.”을 주문처럼 여겼지만 세상은 항상 비껴갔다.  미각지당춘초몽인데 계전오엽이추성이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 연못가의 봄풀은 아직 봄날의 꿈을 깨지도 않았는데, 섬돌 계단 앞의 오동나무 이파리는 벌써 가을소리를 내는구나.”


조락의 계절이 오가도 나는 무엇 하나 모르고 있었네.  이제 보니 온통 겨울 한 복판이라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When the year is cold, only then does one know that the pine and cypress are the last to lose their leaves.”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 그릇에 불과하다.  다만 내가 남들이 하지 못한 어떤 것에 도전했다는 삶의 투쟁의 기록은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오늘도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동해의 용트림을 그려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