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주의 입장에서 “바틀비
스토리” 해석
“바틀비 스토리”에서 화자인 변호사는 자신이 어쩌다가 바틀비를 만나서 그런 고통을 겪게 되는지 의문하다가 필연주의 결정론에서 말하는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어쩌다 이 필기사를 만나서 겪은 이런 고난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모두 예정되어 있었으며, 바틀비는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에 따른 어떤 신비한 목적- 따라서 나 같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일개 미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이지만-을 띠고 내게 배치되었을 거라는 이론이 설득력 있게 조금씩 와 닿기 시작했다.”[1] “마침내 나는 이것을 보고, 이것을 느끼는 거다. 바로 내 삶의 예정된 목적을 이제 꿰뚫어보게 된 것 바로 이것 말이다. At least I see it, I feel it; I penetrate to the predestinated purpose of my life.”
만약 바틀비가 없었다면 변호사의 이러한 공감과 깨달음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바틀비가 없었다면 그저 안락한 삶을 추구한 평범한 변호사로서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바틀비는 창조적인 일과는 거리가 멀고 복제와 모방의 단순 반복되는 따분한 일을 하는 단순 노동자이고 (“99%”에 속하는 “을의 입장”에 처해 있는 사람) 반면 화자인 변호사는 월 스트리트에서 성공한 변호사로서 그가 거느린 직원의 삶의 조건을 결정할 수 있을 만큼 힘을 가진 고용주이다 (1%에 속하는 갑의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 이 둘의 관계는 주인과 머슴의 관계에 있다. 하지만 무모한 바틀비의 행동을 통하여 평생 동안 고민 한번 없이 편안하게 살아온 그 변호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게 되는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된다. 사람은 남의 불행을 보고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고 동정심을 느낄 때 인식과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평생 동안 냉철한 판단력을 견지하고 편안한 인생을 살아온 변호사가 어떻게 그런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되는가? “바틀비 스토리”는 파란색의 비단 옷이 온통 붉은 염색물로 물들어 버린 것과 같이 서두와 결말은 완전히 대조된다. “젊었을 때부터, 그저 편안하고 쉽게 살아가는 삶이 최고의 인생이라는 신념을 확고하게 줄곧 견지해 온” “긴장의 연속인 직업에 속하고 있긴 해도 그런 격렬함으로 인해서 그의 평화가 깨뜨려지는 경우를 겪어보지 않았던” “아늑한 휴양지같이 차분하고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 돈 많은 부자들의 채권, 담보증권, 부동산 매매 업무를 주로 맡으며 안정된 변호사”의 생활을 하던 그가 어떻게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며 타인의 고통에 동정심을 느끼게 되었는가? “신중하고” “아주 확실한 사람”이 어떻게 타인의 고통에 격렬한 감정의 반응을 보이게 되었는가?
그는 바틀비의 기이한 행동들에 대해서도 그런 것은 고의가 아니라 “비자발적인 involuntary” 행동이라고 넘겨 버리던 사람이 아니었던가?[2]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자. “나는 그 필기사의 행동을 호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에 대한 나의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불쌍한 사람, 불쌍한 사람이야! 하면서 나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그는 어려운 시기를 겪었으니, 그가 제 마음대로 행동해도 너무 개의치 말자.”
더욱이 바틀비가 다른 나쁜 고용주를 만나서 고생을 할 가능성도 있는 마당에 그렇다면 자신이 “적선한 셈 치고” 계속 그를 고용하는 것이 보다 낫겠다고 여기며 자신의 관대한 마음에 스스로 만족해 하던 변호사가 아니었던가? “자선은 불확실성이 따르는 미래의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결정을 할 때에는 낙관주의보다 비관주의에 따라야 하고 또 미리 조심하고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원칙인 ‘삶의 지혜의 원칙’과 ‘보수성의 원칙’에 따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을 보호해주는 뛰어난 안전장치가 된다”고 여기면서, “단순히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도 모든 인간은, 특히 성질 급한 사람은 사랑과 박애정신을 바로 실천해야 할 것”이라고 믿으며,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고” 또 자신에게 “쓸모가 있는 한” 계속 직원으로 근무하게 하며 그의 기이한 행동을 관용하고 별로 개의치 않게 여겼던 변호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언제부터 마음의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 그 시점은 바틀비가 자신의 사무실을 점령하고 거기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고독한 노숙자(최소한의 생존 요건인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임을 그의 두 눈으로 직접적으로 확인하게 된 때부터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즉각 다음과 같은 생각이 나의 뇌리를 스쳤다. 정말 비참한 외로움과 고독함이 여기서 드러나는 구나! 그의 곤궁함도 큰 문제이다. 하지만 그의 고독은 얼마나 더 끔찍한가!”[3] 그 변호사는 바틀비가 겪는 비애감을 같은 인간으로서 공유하게 되면서부터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의 독백을 들어보자. “난생 처음으로 나의 마음은 가슴이 찔리듯 참을 수 없는 격한 슬픔의 감정에 휩싸였다. 이제껏 나는 아름다운 슬픔밖에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다 같은 인간이라는 형제애를 느끼면서 나는 슬픈 감정을 도저히 주체할 길이 없다. 피를 나눈 형제같이 느껴지는 슬픔의 감정! 아마 나나 바틀비나 다 같은 아담의 자손이어서가 아닐까?”[4]
이때부터 그는 바틀비의 고독과 비애에 대해서 더욱 큰 관심을 갖게 된다. 바틀비를 해고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린 후에도, 이렇게 말한다. “묘하게 무언가 미신적인 것이 내 심장을 두들기고, 내 목적을 실행하지 못하게 막아서고, 만약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이 사람에게 내가 감히 쓰라린 말 한 마디라도 꺼낸다면 나는 천하에 몹쓸 사람이라고 비난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틀비가 이제금 떠났으리라는 그의 가정이 틀린 것으로 확인되고 난후 바틀비의 태도로 인해서 격분이 들 때도 ‘사랑하라!’는 신적 명령에 따르고 그렇게 격한 감정을 달래고, 또 그가 사무실을 옮기고 마지막으로 떠날 때, “그토록 떨쳐버리기를 갈망했던 그였음에도 막상 내 손을 억지로라도 떼어낼 때 밀려오는 큰 아픔을 느낀” 사람으로 크게 마음의 변화를 겪은 까닦은 아담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밝힌 대로 그에게서 동정심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동정심에서 그는 바틀비의 새로운 직장을 얻는 일에 도움을 주려고 최대한의 노력을 다한다. 하지만 바틀비는 변호사의 진심어린 제안과 충고들을 모두 거부하고 만다. 그 변호사는 자신의 제안과 충고가 거절되자 마음의 격랑을 참지 못하고 길거리로 뛰쳐나가 격한 마음을 달랜다. 그리고 그 후 바틀비가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그 변호사는 자신이 가진 자원을 동원하여 최선의 도움을 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바틀비는 변호사의 호의를 거절하고 “당신한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무 것도 없어요.”라고 말하며 단절을 선택하고 만다. 바틀비가 구빈원에서 재워주고 입혀주고 먹을 것을 나눠주면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서 다시 살아나가야 할 방도를 강구하는 대신 나오는 음식을 거부하며 죽음을 선택한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왜 바틀비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가?[5]
바틀비의 기이한 행동들에 대해서도 좋게 해석함으로써 애써 간과해 버리거나 무심코 넘겨버린 것, 감옥의 간수나 사식업자들까지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의 선한 행동에 기대었던 모든 임시적인 조치들은 전부 실패한 것으로 결론난다. ‘선한 의도’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긴급 구호 물자마저 “수신자 불명 우편물 처리소”로 귀결되는 현실을 보면서 모든 ‘임시적 구제조치’들은 바라는대로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인간 세상에서 임시방편은 한계가 크다는 것인가? 그런데 이러한 인간사회의 문제점을 언제 깨닫게 되었는가? ‘수신자 불명 우편물’처럼, ‘너무 늦게 깨닫게 된다.’ They were too late.-만시지탄-이것이 우리 인간사의 고통이고 현실이다. 프리스틀리의 필연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문제점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선제적으로 대처해야 된다며 상황개선론을 주장한다.
변호사가 바틀비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그의 삶을 구제하지 못했다고 해서 변호사의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인간사는 한갖 인생무상이고 모든 노력은 허무한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보다 중요한 측면을 한번 생각해 보자. 시각을 달리해서 동정심 compassion을 가진 사람들을 보자. 변호사가 말하는 대로, 세상에는 “동정심 많고 호기심 어린 구경꾼 the compassionate and curious bystanders”들이 존재하고, 바틀비처럼 “정말로 정직한 사람이며, 또한 동정심이 크게 느껴질 사람 a perfectly honest man, and greatly to be compassionated”이 많다는 것이다. 대영제국과 팍스 아메리카나를 건설한 영미국인들의 원형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모든 사람은 동정심을 갖고 있다. 동정심은 “아, 바틀비! 아, 인간이여!”의 그렇게 타인의 아픔 속에 함께 들어가 느끼는 감정 즉 공감을 말한다. 아담 스미스가 말한 대로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분명 이와는 상반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고, 또 다른 사람의 비참함을 목격하거나 아주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될 때 연민이나 동정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런 동정심이 세상을 이끄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단언건대 스미스의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서의 주된 결론이 상호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이익 추구 self-interest는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은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타인의 삶에 대해 본원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며 또 타인으로부터 사랑 받고 인정받지 못한다면 행복할 수 없다는 인간 관계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6]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던 그 월 스트리트 변호사는 불쌍한 바틀비를 만난 후 그의 불행과 고통에 깊은 동정심을 느끼게 되면서 곤경에 처한 인간 사회의 문제점과 인간 사회 발전의 조건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인간의 운명이란 우주법칙처럼 인과론에 따라 정해져 있어서 어떤 사람은 불행하고 고통의 삶을 사는 (그렇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삶 또한 의미가 있다) 반면 어떤 사람은 행운의 삶을 살아가는 (행운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를 보다 유용하게 써야 한다는 조건을 상기하라) 인간 세상에서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7]-하지만 악은 총체적인 입장에서 보면 미미한 수준이고 그리고 그 악은 보다 더 큰 선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필요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필연주의 철학적 사고를 재음미해 보는 일은 가치가 있다.[8] 대영제국과 팍스 아메리카나를 건설한 영미국인들의 원형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1] “Under the circumstances, those books induced a salutary feeling. Gradually I slid into the persuasion that these troubles of mine touching the scrivener, had been all predestinated from eternity, and Bartleby was billeted upon me for some mysterious purpose of an all-wise Providence, which it was not for a mere mortal like me to fathom.”
[2] 살인 homicide도 ‘고의성’이 없다면 살인 murder이 아니라 과실치사 manslaughter가 되어 책임이 경감된다.
[3] “Immediately then the thought came sweeping across me, What miserable friendlessness and loneliness are here revealed! His poverty is great; but his solitude, how horrible!”.
[4]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a feeling of overpowering stinging melancholy seized me. Before, I had never experienced aught but a not-unpleasing sadness. The bond of a common humanity now drew me irresistibly to gloom. A fraternal melancholy! For both I and Bartleby were sons of Adam.”
[5] 필연주의 경험론에서는 은혜의 하나님의 개념으로 모두가 구원을 받는 대상으로 보는 반면 대륙법국가의 칼빈주의는 노아의 방주처럼 기적을 통해서 소수의 선택된 자들이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다.
[6] “the chief part of human happiness arises from the consciousness of being beloved”,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 Ch V, Of the selfish Passions.
[7] “both good and evil are essential components of the total scheme.”, Patrick W, “Melville’s Bartleby and the Doctrine of Necessity”, American Literature (1969), 41: at 53.
[8] III부 1장 필연주의 철학에 대한 설명은 앞의 인용 논문 “Melville’s Bartleby and the Doctrine of Necessity”을 참조하고 그 기조를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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