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행동은 어떤 불안 공포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나타난다.
3만년 전에 동굴생활을 하던 인류가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아침에 사냥을 나가 먹을 것을 마련해 와야 처자식이 살 수 있었다.
(종교를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하던 이 새대 최고 문화평론가인 이어령 이 70넘어서 자기 딸의 불행을 통해서 개신교에 귀의 하기로 결심했다는 기사를 며칠 전 읽었다. 인간의 최대 공포라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수단이 종교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자살 현상에 대한 원인 연구로 사회학의 원조를 열었던 뒤르껭 도 말년에 천착하던 주제가 종교 에 대한 것이었다. )
신정일치를 이루었던 고대시대도 공포를 벗어나게 하는 수단이 종교 제도이었던 것이에게 정치와 종교가 일치되었던 것이다. 미신 도 공포를 벗어나고자 하는 수단이었다.
중세 십자군 원정 시기 정조대 유행도 남편이 없는 사이 아내의 정조에 대한 의심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토마스 홉스의 주장처럼 만인의 대한 만인의 투쟁도 상대방이 나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토마스 홉스의 공포와 안전에 대한 위임계약 행태는 작금의 9.11 테러 사건 이후 절실히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낯선 사람을 마주칠 때 어떤 행태로든 상대방이 날 해치지 않는다는 인사를 건내는 문화는 인류 공통의 보편적 표현이다. 악수나 키스 처럼. 신변의 안전에 대한 신뢰의 보장 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러기에 악수 (화해) 하고 나서 등 뒤로 비수를 꽃는 것을 가장 천박한 야만적 행동으로 가장 비인간적이라 비난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의 행동을 야기시키는 것은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상대방이 날 해치지 못하게 미리 방어하는 만리장성 같은 성을 쌓거나
무력이 충분하다면 미국의 이라크 공격처럼 먼저 선제공격 (pre-emptive strike)을 감행하여 씨를 말려 벌이려고 하는 것이 인류의 전쟁 역사의 교휸이다.
평화시기인 일상 생활에서도 내 원금이 날라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좀더 이율이 높은 다른 투자 수단 보다는 안전하게 은행에 예금을 예치해 두는 경우 까지
우리는 하루 하루 안전 과 불안 공포 사이에 트레이드 오프 관계 즉 시소 게임을 하고 있다.
자녀나 남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 생존을 보장하고 있는 내 부모가 아니면 내 배우자가 행여나 날 등지고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심리는 인간 기저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항상 안전에 대한 보장을 확인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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