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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대혁명/돈이냐? 행복이냐?

돈 때문에 살인을 했다

by 추홍희블로그 2012. 4. 24.

 

 

“많은 재산을 가진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a truth universally acknowledged that a single man in possession of a good fortune must be in want of a wife.”)

 

 

이 말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첫문장이다. 제인 오스틴이 살았던 시대가 200년이 지났고 또 지금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요사이 세상에서는 제인 오스틴과 같은 공통된 생각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더구나 가정주부라는 아내의 모습은 제인 오스틴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달라진 현재이다. 그리고 남자가 직장이 있고 돈이 있어야만 결혼을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왜냐면 이제는 여자가 직장을 다니고 돈많은 여자도 훨씬 많고 경제적인 독립을 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인 오스틴이 대담하게 첫 문장에서 내린 “공통된 생각”에 모두가 수긍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져도 결혼이 보편적인 제도로 남아 있는 현재 지금도 “남자는 돈이 많아야 여자가 붙는다”는 세상의 편견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제인 오스틴의 첫문장만큼 유명한 또다른 소설의 첫문장은 톨스톨이의 “안나 카레리나”에 나온다.

“행복한 가정들은 모두가 엇비슷하다. 불행한 가정들은 불행할 수 밖에 없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All happy families are like one another;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잘 생긴 미모에 돈 많은 귀족과 결혼해 번듯한 아이까지 낳은 “안나 카레니나”는 세상 기준으로 보면 어느 누구하나 부러워 하지 않을 여자이었다. 그러나 부와 명예등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 여자의 불행은 안나 카레니나에 국한된 이야기일까? 한 여자 한 시대에 한정된 특수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행복이란 것은 자기의 욕망을 실현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톨스톨이 소설이라고 보는데 톨스톨이는 “안나 카레니나” 나 “전쟁과 평화”같은 소설에서 알다시피, 권력과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인간의 현실적 본질을 너무나 잘 파악해 낸 대문호이었다.

 

인간의 역사와 본질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톨스톨이는 현실적인 인간 모습 중에 또 하나 “돈은 만惡의 근원 이다”라고 규정한 “위조 지폐”라는 소설이 있다. 이 톨스톨이의 소설을 영화를 만든 로버트 브레송의 불란서 영화 “L’Argent (Money)” 이다.

 

 

 

 

 

“돈은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도”라고 톨스톨이는 이미 1백년전에 말했다. “돈 이란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도이다. 누구나 상관없이 몰인격화하고 노예관계에서 해방되게 만든다는 점에서 단지 다를 뿐이다. (Money is a new form of slavery, which differs form the old only in being impersonal, and in freeing people from all the human relations of the slave.)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아, 인간의 현실적 삶의 문제와 역사를 너무나 잘 조명했던 톨스톨이가 말년에 이르러 돈은 만악의 근원이란 결론을 내린 것은 의미심장하다.

 

톨스톨이가 “돈은 만惡의 근원”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돈이란 한 번 잘못 결부되면 자기의 본의와는 상관없이 말려 들게 된다”는 점에 의해서도 그렇다.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사기 사건은 자기 한 사람에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죄없는 선의의 피해자가 너무나 크게 상처를 입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돈이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국에서는 왜 황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세상의 잘못된 사조에 물이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단 옷감 천에 빨간 색깔이 전체로 스며드는 모습을 보면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검은 머리에 노란 맥주병 색깔로 물들이는 머리 염색을 안해본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세상 사람들 모두가 머리에 물이 너무나 많이 들어 았기 때문에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좋은지 조차 판단을 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2천 5백년전 공자와 사상을 다투었던 “묵자” 의 “염색론”으로 이를 잘 설명할 수 있다.

 

한 때 우는 아이의 울음도 멈추게 한 “빨갱이”사상에 물들었다고 잡아가는 무서운 세상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깊게 물이 든 것이 요즈음 세상이 아닐까 싶다.

 

 

“돈이면 다 된다!“는 "만사錢통"에 물든 이 세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의 친척 누구의 입김이면 다 통한다는 만사兄통의 빨간 물이 휩쓰는 세상이듯이 “돈이면 다통한다는 세상이다. 돈이면 신체발부 수지부모의 얼굴도 뜯어고치는 천지개벽의 신세상이 되었다.

암튼 나는 여기서 <사기를 치다 걸려도 횡령을 하다가 걸려도 돈만 갚으면 된다>는 세상의 빨간 물 사고가 만연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톨스톨이가 돈 때문에 선의의 제3자의 가정이 파괴되고 불행한 삶을 예고없이 맞이하는 돈의 무서움을 경고한 것을 다시 한 번 볼 필요가 있다.

 

 

인간관계는 돈으로 전부 통제할 수 없다. 능력제 보너스제도가 판을 치고 아르바이트 몇 푼에 자기 몸과 영혼까지를 너무나 쉽게 파는 세상이다. 그러나 돈이면 몸까지 팔고 돈이라면 영혼까지 파는 이 못된 세상의 광란의 바람은 잠깐 사라지고 말 것이다.

 

대담한 선언이라고 치부할 줄 모르나 “돈으로 세상 전부를 살 수가 없다”.

훔친 돈을 돌려준다고 해서 원상은 회복될 수 없다. 인간은 몸만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몸과 영혼과 가슴과 마음과 정신을 함께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돈만이 눈에 보이기에 오로지 돈만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을 지 모르나 돈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마음과 가슴과 정신과 영혼을 함께 가진 존재이기에 보이지 않는 상처에 대한 치유가 더욱 중요하다.

인간관계는 돈이 아니라 믿음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신뢰의 상호작용이 보다 본질적인 인간관계가 아닐까?

개인주의를 최고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보수주의자들의 정신적 지주인 아담 스미스도 인간 사이에 신뢰의 상호작용을 강조한 것은 그의 “국부론” 보다 15년 앞서 출판한 “도덕 철학”에서 잘 알 수 있다.

 

<훔친 돈은 돌려주면 깨끗이 원상회복된다>는 단순한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강간하고 나서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라는 극한적 생각을 합리화하는 것과 같다.


돈 몇 푼에 영혼을 팔거나 돈 몇 푼으로 마음의 안식을 가져올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영원히 사는 길도 우리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서 참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가 죽기 마련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는 것은 오로지 자기자신의 희생을 요구한다. 죽음으로서 다시 바로잡는 세상이 바로 인간의 생존기술이다. 이게 노대통령이 택한 진리의 길이다.

 


결국 <횡령한 돈은 돌려 주면 그만이다>는 사고방식은 황금만능주의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사고는 극단적으로 강간을 당해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되고 만다.

 

깨진 믿음으로 마음에 받은 상처는 어땋게 메꿀 수 있단 말인가?

친일파 청산을 못한 까닭이 무엇일까? 혹자는 현실적 타협책이라고 한다. 혹자는 우리가운데 죄 없는 자는 돌로 치라!는 우리 자신의 공범죄자임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도덕적 불감증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적다. 공동체의 삶의 원칙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은 적다. 룰은 타협의 소지가 없이 그대로 지켜져야 함에 있는 것이다. 규칙은 깨어질 수가 있지만 최고의 룰은 지켜져야 한다. 그것은 공동체 집을 받쳐주는 기둥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는 말은 말콤 글래드웰의 베스트설러 “THE TIPPING POINT”에서 말하는 “성냥개비집짓기” 이론으로 알 수 있다. 성냥개비 집을 만들때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성냥개비 하나 때문이다. 성냥개비 하나가 전체의 집을 한순간 무너지게 만드는 극적 포인트가 있다.

 

 

전체의 운명은 한 사람이 결정지울 수도 있고 그 전체는 작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이 만들어간다. “전체는 일부의 총합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우리가 깨우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We-think> 


마음의 상처가 왜 큰가?

돈이 전부라는 세상에서 나는 신뢰가 전부라고 믿기 때문이다. It’s all about trust.

“신뢰를 쌓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어렵게 쌓은 신뢰를 잃는 건은 한 순간이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I've learned - that it takes years to build up trust, and only seconds to destroy it.)”


남이 나에게 의지한다는 것을 배려한다는 한 번 생각해 보자. other people will be relying on us when we can barely rely on ourselves.

 

우리 나라 법에는 “징벌적 손해배상” 이 없지만 미국영국은 민사소송에도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정부 공무원이나 기본적 인권에 관련된 죄를 저지른 샘플케이스에 해당된다고 여기면 금전적 손해배상액의 몇 배에 해당하는 거액을 추가로 손해배상액으로 물어지게 만든다. 이러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존재하는 것은 “돈이면 다된다!”라는 자본주의의 본 고장 미국영국에 존재하는 법을 한국인들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그저 힘 있는 사람이나 큰 국가에겐 고개 숙이고 힘 없는 약자에겐 거만하게 구는 노예근성의 문화적 습성에 크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본보기를 처벌하지 못하는 역사와 문화가 지배하는 것은 한국인 이제껏 외세가 지배한 식민지 나라이기 때문이다.

 

전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한 사람에 위한 결정적 시기에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큰 잘못을 행하는 권력을 향해 일어설 수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남에게도 소중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한 예수. 그 예수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죄지은 자여, 어느 누가 돌로 이 여인을 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우리 인간 내면의 정수리를 내려 칠 때 그 목적은 노약자 홀로남은 여자 병들고 아픈사람 그런 약자를 보호하기 외침이었다.


 

타이타닉호가 가라앉을 때도 어린이와 여자들은 먼저 내보었다. 그리고 맨나중에 내린 선장과 책임을 진 사람들은 다들 죽었다. 죽음을 앞두고 처절한 현장에서도 법칙을 지키는 잔인한 만큼 혹독한 사람들이다. 누구를 위해서일까? 무엇을 위해서일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본능마저 거슬리는 혹독한 훈련된 결과인지 아닌지를.

My Heart Will Go on.

 

예수의 죄 없는 자 돌로 치라는 외침은 강자의 잘못을 용서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원칙을 목숨으로 지키는 까닭은 인간생존을 위해서다.

 

강자에게 독배를 마시게 하고 단두대에 목을 짜르고 나찌부역자에겐 재산까지 몰수하고 처단하는 단호함, 원칙을 살리기 위해서는 한 개인의 희생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인류가 살아 있는 생존법칙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Cosette, it's turned so cold Cosette, it's past your bedtime You've played the day away And soon it will be night.)

이러한 원칙을 실현해 온 것이 서양의 역사이고 서양이 동양을 이긴 간단한 게임법칙이다.

번성했던 동양이 서양에게 점령당한 까닭은 묵자가 공자에게 패했기 때문이다. 돈이라면 부모형제와도 재산권을 다투면서도 정작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원칙에는 왜 목숨을 내놓지 못한 말인가?

개인주의 서양의 오래된 생존법칙은 사실은 전체주의 모습 그대로이었다. 자본주의가 개인주의 소산이라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나 한사람의 행동이 남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는지에 대한 인간 상호작용의 힘은 자유방임의 원조로 추앙받는 아담 스미스가 강조한 내용이기도 하다.

 

예수가 죄 없는 돌을 던지라!는 말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강자를 용서하라는 메시지가 아니다. 나는 강간한 자는 돌로 쳐야 한다고 믿는다. 칼과 총을 가진 권력자가 칼과 총을 잘못 사용하면 그 권력자에게는 돌로 쳐야 한다. 권력을 남용하고 남을 속이는 자에게 나는 감히 돌로 칠 수 있다.
나는 나보다 약자에게는 한없는 용서를 할 수 있어도 나보다 힘센 강자에는 죽음을 담보로 암흑 속을 나르는 “ 닌자”가 될 것이다. <올빼미의 성>.

 

다음은 “묵자” 인용입니다. “하늘은 우리 모두를 똑 같이 사랑한다. 그 은혜를 저버린 자는 어김없이 천벌을 받으리라. 하늘을 숭배하는 자, 하늘의 두려워하는 자, 하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 하늘의 이치를 본받는 자는 성(盛)하리라. 그의 혼은 하늘에 있으리라. 하늘을 비웃는 자,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하늘을 배반하는 자는 멸(滅)하리라. 몸뚱이와 영혼이 함께 땅에서 썩어 흔적조차 사라지리라.”

 

“하늘은 가름(差別)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곳, 모든 생명에게 비와 이슬을 내려주고, 빛과 바람을 맞게 한다. 이것이 하늘의 마음이다. 천하는 큰 나라 작은 나라 할 것 없이 '하늘'의 고을이다. 어리고 나이 많고 귀하고 천한 구별 없이 모두 '하늘'의 자식이다. 가는 터럭이라도 할지라도 하늘이 만들지 않은 게 없다. 그런데 어찌 하늘이 천하를 아울러 사랑하고 이롭게 하지 않겠는가.”

 

“가름은 사람에게서 나왔다. 탐욕이 세상을 갈라놓고, 전쟁을 만들고, 빈부를 만들고, 계급을 만들었으며 귀함과 천함을 구분 지어 놓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바로 이 가름을 없애는 일이다. 가름을 없애기 위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힘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고, 바른 도(道)를 알고 있으면 서로 가르쳐주고, 재물이 있으면 서로 나눠주라.”

 

“의로움이야말로 올바른 것이며 천하의 보배다. 의로움은 어리석고 천한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반드시 귀하고 지혜로운 것에게서 나온다. 그럼 무엇이 귀하고 지혜로운가. 하늘이 귀하고 하늘이 지혜로울 다름이니, 의로움은 하늘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약 의로움을 행하기가 불가능하더라도 절대 그 길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목수가 나무를 깎다가 잘 되지 않는다고 먹줄을 버릴 수는 절대 없다. 이를 따르는 것이 '천의'(天義)다.”

 

“칭찬 받으려 의를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가는 것이 진실로 올바른 도라면 미친놈 소리를 듣는다 한들 무슨 상관이냐.”

(이상 묵자의 말씀 인용은 김학주의 묵자에서 가져왔습니다만 저는 신영복 교수님의 “묵자” 해석으로 일독했습니다).


암튼 톨스토이의 결론처럼, 돈이 전부가 아니다. Money 영화처럼, 돈은 그렇게 무서운 면이 많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 신뢰가 전부이다. It’s all about trust.


“신뢰를 쌓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어렵게 쌓은 신뢰를 잃는 건은 한 순간이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I've learned - that it takes years to build up trust, and only seconds to destroy it.)”

 

그러나 나는 안다. 니이체가 <신은 죽었다!>고 외친 1백년이 훨씬 지난 지금
나는 우리에게 <희망은 죽었다!> 고 외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의 적은 내부가 우리 내부 자신에 있었다. the enemy within. 내 자신을 혹독히 훈련하는 것에 실패한 바로 내 자신의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TS 엘리어트의 시귀처럼 나는 다시 항해의 출발점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엘리어트 황무지. 텅빈 사람들. 읽기.==>

 


베컷트의 <고도우를 기다리며.>.


고도우? 그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내마음이 있을 뿐이다. 환상이 아니다. 잘못 본 것이다. 어차피 우리 세상은 신기루를 쫓는 사막의 황야의 길이 아니었던가? 그는 부조리이고 희망이다.

 

내 마음에는 세상의 물에 찌든 탐욕의 권력자와 부패한 우리 자신을 목을 치기 위한 “닌자”가 살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순신은 죽어서 영웅이 되었고 이 세상의 英雄, 모든 사람은 다 죽었다.

 

<사랑의 종말을 위한 협주곡>을 보낸다.

 

 

<Concerto pour la Fin d'un Amour><사랑의 종말을 위한 협주곡>

<사랑의 종말의 협주곡>

 

 

라일락 꽃잎을 헤아린다
찻잔의 차잎을 본다
꿀벌이 나는 것을 처다본다
밤하늘의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고싶다
내가 환상을 가진 것은 아니었을까?
사랑은 끝났다! 종이여 울려라!
우리가 함께 손을 잡았을 때의 비밀스런 기쁨도
가을의 포도주 보다도 더 달콤했던 키스의 추억도
촛불로 밤을 밝히던 그 황금의 순간들도
불어 오는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흩날린다.
가버린 우리의 사랑에게
사랑의 종말을 위한 협주곡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