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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이론/심리학 주변이야기

공포와 위기의 시대 - 경제학 최후의 전쟁

by 추홍희블로그 2011. 4. 16.

공포와 위기의 시대 - 경제학 최후의 전쟁

 

 

들어가는 서문

 

"패닉과 광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최대한의 지식을 동원해 쫓고 상상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서는 대단한 분량이 쓰여졌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특정시기마다 엄청난 금액의 멍청한 돈이 부지기수의 멍청한 사람들 손에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 당연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명분을 이유 삼아 이런 사람들의 돈- 우리는 이돈을 눈먼 자본(blind capital)이라고 부른다- 이 주기적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불어나고 꿈틀대는 욕망에 주체를 못한다.  이 돈은 누군가가 자신을 집어 삼켜 주기를 갈망하며 ‘흘러 넘친다; 흘러 넘치는 돈이 누군가를 찾아내면 ‘투기’가 벌어지고; 투기가 이 돈을 다 먹어 치우고 나면 ‘패닉’이 발생한다."

-Walter Bagehot –Essay on Edward gibbon –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 시편 46:2-3

 

그대, 대담한 탐구자, 모험자들이여,
또 교활하게 돛을 올려 성난 바다에 배를 띄어본 자들이여,
피리 소리에 이끌려 아득한 심연 속에 넋을 보낸
수수께끼에 심취하고 여명을 즐기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겁에 질려 한 가닥 밧줄을 더듬어 찾지 않으리
또한 생각해서 알 수 있는 것을 굳이 확인해 보지 않으리.

-  니이체,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

 

"밤에 소리를 지르는 것은 겁을 먹었다는 증거이다."- 손자병법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가장 끜찍한 두려움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것은 어떻게 해명하실 거죠?” – 스티브 킹, “죽음의 무도”

 

"군대가 주둔한 지역은 물가가 오르고, 물가가 오르면 백성의 물자 부족현상이 일어난다.  물자가 부족해지면 국고가 고갈되고 국고가 고갈되면 부역이 급격하게 늘어난다.  군사력이 소모되고 국고가 고갈되면 나라 안의 집집마다 궁핍을 면치 못하게 된다."  – 손자병법

 

"시민은 외출을 삼가고 군경을 절대 신뢰하라."

-1950년.6 25일 한국전쟁이 터지고 난 1950년 6월 25일 정부 포고문

 

"여러분이 듣거나 읽는 모든 정보를 무조건 믿지 마십시오.  먼저 확인하기 바랍니다."

 유럽 전쟁 시찰중 루즈벨트 미대통령 1939년.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야 나는 진정으로 참되고 만족스럽게 살아가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나는 무엇을 지불해야 할까?”
-판 크레펠트, “전쟁 본능”

 

"우리는 큰 경제적 재난의 위협 가운데서 살아 남았습니다."

-루즈벨트 미대통령, 1935년

 


  뭉크 “비명”. 1893.  Casein/waxed crayon and tempera on paper (cardboard), 91 x 73.5 cm National Gallery, Oslo.  1883년 크라카토아 화산 폭발에서 영감을 얻어서 그린 1893년 뭉크의 그림이다.  화산폭발은 거대하고 끊임없는 비명과 같을까?

“해가 저물고 있던 거리를 나는 친구 둘과 걷고 있었다. 하늘이 갑자기 붉게 물들어 갔다. 나는 멈춰서서, 피곤한 몸을 난간에 기대었다. 검푸른 피요르도와 도시 위로 피와  불꽃처럼 퍼져 있었다. 친구 둘은 계속 걸어 갔고, 나는 불안에 몸을 떨면서 계속 서 있었다.  나는 끊임없는 비명이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뭉크의 일기중-


 

 

I.              들어가는 말

 

 

2011년 3월11일, 일본 동부 지방에서 강도 9.0의 거대지진이 발생했다.   후쿠시마현 해안은 최대 높이 50미터의 거대 쓰나미가 밀려 닥쳤다. 

 

이틀 후 3월 13일, 텔레비젼 화면에서 후쿠시마 원전 폭발 장면이 나왔다.  대지진과 쓰나미로 원자력발전소에 전기가 끊겼고 결국 원전이 폭발한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로 솟구치는 흰 연기 구름이 보였다. 

  

 <사진-“절망의 구름”-1945 히로시마 원폭 장면>

 

 

나는 직감적으로 2001.9.11 미국 뉴욕 쌍동이 빌딩 테러 때가 스쳐갔다.  나는 2001.9.11 그날은 시드니 공항에서 국제선비행기에 바로 탑승하기 전 라운지에서 텔레비젼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때 비행기가 거대한 고층빌딩에 부딪히고,  연기가 솟구치고, 곧 거대한 빌딩이 폭삭 무너지고 폭발하는 모습, 살아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나는 사람들의 모습,  대재앙이 펼쳐지는 모습이 CNN방송 속보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 생생한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인간 이성의 진보를 의심하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 인간은 극도의 공포심을 느끼면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게 되는데, 나는 그때 텔레비젼 화면이라는 공간적 차이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금융시장의 향후 전개방향에 생각을 집중하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이고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수 있다.”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어오르든지, 바닷물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시 46;2-3)

 

불난 극장에서 각자 먼저 살아날려고 아우성치는 극단적 공포상황에서는 나혼자만의 생각으로 위기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대재앙이 갑자기 닥치면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살아날 방법을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아무리 날쌘 토끼라도 하지만 어둠속의 토끼에게 갑자기 빛을 비추면 놀라서 넋을 잃고 도망가지 못한다.  겁많은 토끼에게 갑자기 빛을 비추면 산채로 잡을 수가 있다.  사람도 토끼처럼 두려움 때문에 당하는 경우가 많다.

 

 

 

3월 11일 텔레비젼 화면에 보이는 대지진이나 거대 쓰나미가 일어난 뉴스는 나의 위기본능 감각을 크게 자극하지 않았다. 

지진이나 쓰나미 위험은 화산폭발과 함께 자주 접했고 그런 자연재난이나 재앙은 인간이 극복해 왔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몇 해전 2004년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쓰나미로 30만명이상이 목숨을 잃고, 2010년 아이티 대지진으로 같은 정도의 수십만명이 죽어갔다.  2008년 중국 스촨성 지진으로 9만명이 희생되었다.   내가 바로다녀온 2월 22일 뉴질랜드에서도 큰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94년 일어난 고베대지진의 피해사실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원전폭발 장면을 보면서 부터는 나의 본능적인 위기의식이 작동하였다.  원전폭발 그것은 자연재앙이 아니라 인간재앙이라고 생각한다.  자연 재앙은 복구하는대 콘트롤할 수 있으나 인간재앙을 복구 조절하기란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인간 재앙의 무서움은  “그레물린” “프랑켄슈타인”  “공포의  미로”등 수 많은 영화들이 잘 예시해 주고 있다. 

 

 나는 군복무를 미군부대에서 보냈는데 군복무당시 한국에는 주한미군이 전술핵을 배치해 놓고 있었고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정책하에 보호받고 있었다.  20년 전에는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핵무장을 하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나는 군대생활에서  미국이 어떻게 핵문제와 핵공포를 다루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 생각하게 되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흰 구름이 일어나는 원전폭발 모습의 화면을 보면서  이런 나의 배경 때문인지 년 히로시마 원폭의 버섯구름을 떠올려졌고 방사능핵공포가 무섭게 스쳐 일어났다.  그리고 25년전 군대생활에서 익힌 핵용어와 핵대피 훈련 기억들이  떠올랐다.  나는 원전에 대한 엔지니어 지식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우선 대피 방법론 부터 생각해보왔다.  이런 나의 반응은 최신의 진화심리학 연구결과로 충분히 이해된다.  내블로그에도 원전폭발 소식을 올렸는데 한국인들의 반응은 별무이었던 느낌을 받았다. 

 

예전 기억 하나가 뇌리에 스쳐왔다.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지금 방송은 실제상황입니다. 지금 적기가 인천상공을 날고 있습니다.” 

 

한편  정부는 교과부와 기상청 대변인의 말이잘 대변하듯이, “편서풍 때문에 한반도에 방사능 위험은 전무하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정부의 그런 무지와 무능한 대처를 질타하게 만들고  원전폭발 속보를 나름대로 전했다.   2008년 9월 리만 부라다스 파산으로 미국 주식시장이 대폭락하고 한국에서 제2의 “외환위기”가 발생하던 순간처럼.

 

 

신문방송 기사를 보고 거리의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한국은 위기에 대한 대처능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 위기의식이 떨어지게 되었을까?   민방위 훈련과 항시 전시 상태로 국민에게  위기와 공포를 주입하여 쉽게 통치하려는 나치식의 공포정치 영향이 아닐까?   한나 아렌트가 파악한 개념인 “악의 진부화” 개념과 비슷하게 위기가 평범화되고 “진부화”되는 현상 때문이 아닐까? 나는 자문해 보왔다.  그래서 부산대를 나온 조카에게 핵이나 방사능 위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를 한번 물어보왔다.  조카는 핵문제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우리들은 왜 위기를 미리 알지 못할까?   우리 인간은 강에 던져진 뒤 즉 정신적 충격(트라우마)을 겪지 않으면 기억을 하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이 직접적으로 피부로 의식하지 않는 이상 공포에 대한 기억을 느끼지 않는다.  인간에게 두려움이란 인간들이 겪는 슬픔과 기쁨의 감정 보다 앞선 생존 본능이다.   인간 감정 중에서 두려움이 가장 앞선 본능이라는 것은 진화심리학이나 신경과학의 연구 결과로 잘 알고 있다.   엄습해 오는 폭풍우나 대홍수 대지진 거대쓰나미를 보면 본능적으로 도망부터 먼저 친다. 공포감정은 인간의 생존본능이다. 

 

그러나 핵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의 무지에서 나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1945년 히로시마 나카사키 핵공포를 겪은 일본인들도 별반 다를바가 없는 것 같다.  66년이 이란 세월이 경과된만큼 사람들의 경각심이 많이 무디어진 까닭이리라.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위기에 대해서 공포심를 갖지 않으면 언제 멸망하지 모른다. 특히 “백악관 상황실”저자 마이클 본이 잘 말하듯이, 핵 문제는 가장 위험한 것이다. 대통령 이동시 마다 “핵가방”을 들고 따라다니는 특수경호원 모습이 언론에 자주 노출되고 있기에 잘 알 것이다. 

 

미국 대통령 백악관 상황실 위기상황관리 실제 보기==>

 

광우병 파동이나 작은 “먹거리” 문제가 큰 국가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슴을 잘 알 것이다.   왜 “먹거리”문제에 모두가 예민한가?  불안이 자기자신에게 바로 닥칠 지 모른다는 불안에  있다.  잘못 먹으면 체내에서 “암”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먹거리”문제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핵 공포의 근저에는 방사능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암’으로 발전되고 결국 암으로 죽게된다는 구체적인 지식의 인식 결과에 있다.

 

방사능 음식물 핵공포는 영국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여실히 증거해 준다.    소련 비밀경찰총수이었던 리티비넨코가 영국 런던의 한 식당에서  먹은  “스시”에 주입된핵물질 “폴로늄 210”에 감염되어  즉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배신한 비밀경찰 총수를 핵물질을 투입하여  살인한 사건이었다.  이런 사건은 가히 아가사 크리스티의 탐정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일이지만 실제로 런던에서 일어났다.   핵방사능 물질인 폴로늄으로  사인이 밝혀지자  모스크바에서 런던 그리고 리티비텐코가 먹은 스시 식당 주변등  리티비넨코의 이동경로에 따라 만약의  방사능물질 감염(radiation)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방사능 감염 여부를 확인을 하라고 영국 보건 당국이 안내방송과 뉴스를 보내었다.   그러자 잠재적인 방사능 감염 여부 문의한 런던시민의 수가 다음 월요일까지 즉  3일내에 1100명이나 나타났고 전화문의 숫자는 3천명을 넘어섰다.   바다 생선을 잘 먹지 않는 영국 런던 사람들임을 볼 때 이만큼 핵공포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사건이었다.

 

핵물질을 최초로 발견한 프랑스 여성 과학자  “퀴리부인”은 자신이 발견한 이 폴로늄에  피폭되어 사망했다.  플로늄은 방사선중 가장 약한 알파선 물질이다. 

 

반면,  2011년 후쿠시마 원전폭발 사고로 인해 인체에 훨씬 더 무서운 영향을 미치는 “요오드”와 “세슘”, 그리고 이보다 더 강력한  “플루토늄”이 검출되었다.  인체에 치명상을 입히는 “플루토늄”과 “스트론튬”이 검출되었다는 것은 대형핵사고인 것이다.    요오드와 세슘의 피폭 법정한도 기준치는 공표되어 있지만 “스트론튬”은 아직까지 기준치도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럴게 엄청난 “검은 백조” 사건이 터져도 정부는 “괜찮다! 인체에 큰 영향이 없다”라는 말만 반복한다.

 

“검은백조” 위기가 일어나도 무감각해진 대한민국의 현 상황인 것이다.  이렇게 “블랙 스완”의 사건에 대처하는 정부나 국민의 대처 태도는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검은 백조”란  전혀 예상하지 못하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을 뜻하는 용어이다.   뉴욕대 교수인 나심 탈레브가 2007년 펴낸 “블랙 스완”이라는 책으로 널리 퍼진 용어가 되었다.

 

여기서 잠깐 생각을 다시해 보자.

 

2010년 “천안함” 폭발로  무고한 군인이 영문도 모른 채 희생되었다. 

 2010년 “구제역”으로 살처분한 돼지와 소의 숫자가 3백 5십만 마리를 넘었다.  아무리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죽은 영혼이 3백5십만이 넘었는데 어느 누구 책임지는 행정부처 당국자 하나 없다.  

 

 

후쿠시마 원전폭발 사태를 맞아하여 정부 당국자가  “편서풍 때문에 방사능이 한반도 상륙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태도는 기가 찰 노릇이다. 예술이 아닌 과학마저 부정하는 자들의 태도는 한심하기를 넘어서 매우 위험하다.  기본적인 과학지식마저 부정하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 나치스의 선전부대 괴벨스의  잘못에 버금간다.

 

과거 한 때 무조건 숨기는 것이 상책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분서갱유가 말해주듯이 정보의 차단은 통치술의 하나로 작용했다.  그러나 새로운 네트워크 세상에서는 정보의 단절이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을 가져온다. 정보의 경제학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세상이 되었다. 정보 흐름은 국가와 개인의 “신뢰”형성에 가장 기본이 된다.  제도경제학의 최신 연구결과가 말해주즛이 신뢰는 국가 부의 형성의 원천이 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동란이 터지고 3일만에 수도 서울이 적군에 점령당하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수도 서울을 사수한다’는 육성 라디오 방송을 내보냈다.  그러나 서울을 사수한다던 이승만대통령은 이미 서울을 버리고 방송당시  대전으로 피신하고 난뒤이었다.  대통령의 말을 믿고서 피신하지 못한 수많은 양민은 고귀한 목숨을 희생당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명령을 받들어 한강 다리를 폭파한 하급군인은 총살당하고 마땅히 책임을 져야할 고관대작들은 평생 대대손손  호의호식하고 있다.

 

위기상황에서 국가의 배신은  한국만의 예외적 상황이 아니다.  미국과 일본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겉과 속이 다르다.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세상에서는 말 대신 기호나 상징 조작이 스며들고 혼란이 가중된다.  미국과 일본의 단적인 예를 하나 보자.

 

1929년 10월 24일, 역사상 가장 큰 대공황을 몰고 온 미국 뉴옥 주식시장이 폭락한 날이다. “검은 목요일”이라는 별칭이 말해 주듯이 시장은 죽음의 공포로 빠져들었다.   이 때 유명 주간지 “타임”은 “미국의 주요 은행들이 주식시장의 공황을 막기 위해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현재 미국의 금융은 안전하다”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내었다.  그러나 “검은 화요일”은 진정시킬 수가 없었고 그 후 3년동안 미국 주식시장 주가는 1929년 9월 대비 85%이나 폭락하였다. 주식이 휴지조각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1백년만의 위기”라고 하는 2008년 금융위기를 맞이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2011년 동일본대지진 후쿠시마 원전사태 때 일본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터지고 난 후 1달이나 지나서야  후쿠시마 핵사고를 체르노빌 수준과 동급인 7등급으로 상향조정하고 주민들의 대피범위를 30km로 확장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토록 심각한 사태에서 정보를 감추기에  바빠 막상 국민들의 생존문제를 등한시한 치명적인 결함을 나타내었다.  “유해하지 않는 수준이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정부를 신뢰한 사람들이 계속 속고만 살 수 있을 거리는 생각은 큰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방사능에 피폭당한 사실을 알면 그에 대한 분노와 책임규명의 함성은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무척 높아갈 것이 분명하다. 

 

한국은선진국보다  더욱 위기에 민감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나라가 작고 주변강대국에 당해온 역사를 보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아무리 쉽게 뜨거웠졌다가 쉽게 가라앉는 “냄비근성”을 가진  한국이라고는 하지만 위기에 대한 무감각으로는 국가의 사직과 국민의 안녕을 지켜낼 수가 없을 것이다.  위기에 대한 무감각한 현재대로의 한국을 보면 임진왜란 전 율곡 이이의 “10만양병설”이 무시된 당시 조선의 무능력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웃나라 일본에서 국제원자력기구가 정한 핵방사능 누출 등급 최고등급인 7등급 체르노빌과 같은 큰 핵폭발 사고가 터져도 한국 정부는 “펀서풍 때문에 방사능이 한반도에 상륙하지 않으며, 따라서 한국은 안전하다”고  발표했다.  

 

 

한편 한국 정부가  4개월전인 2010년 11월 7일 발표하기를 백두산에서 가스분출했는데 이것은  마그마에 녹아있던 이산화황이 분출되었을 가능성이 크기에  백두산 폭발에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눈앞에 벌어지는 최고등급의 핵참사에는 아랑곳하면서 방사능핵사고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도 안되는, 그리고  언제 일어날지도 모를 확률 1%도 안되는 자연재해 가능성에는 소리 높히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정치가들의 바보들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대재앙위기에 대한 이해도를 높힐 필요가 있다.

 

 

역사로 알 수 있는 대재앙들을 잠깐 살펴보자.

 

유럽인구의 1/3을 앗아가고 대륙을 황폐화시킨 중세 시대때의 흑사병,  최근 20세기 들어서 양차 세계 대전에서 파괴된 인명 규모를 보면 끔찍함을 넘어선다.   세계 대전를 제외하고도 대재앙적 수준의 위기는 그것을 열거하는 데 끝이 없을 것 같다.

 

세계적인 사건을 제외하고 우리나라만으로 범위를 좁혀도 한없이 위기의 연속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보고 들은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서 굶어죽어간 “절량농가(絶糧農家)” 시절,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했던 식량 위기도 역사상 반복된 사실이다.  쌀이 남아도는 현재 잊혀진 단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보릿고개”란 말은기나긴 겨울을 지나 오면서 쌀은 떨어지고 새로운 봄철에 보리를 재배하여 먹을 것을 마련하기 전까지 그 사이를 뜻한다.  쌀은 떨어지고 입에 먹어가기 힘든 보리밥이라고 먹을 수 있으려면 그 사이에 주린 배를 움켜지고 살아남아야 했었다는 궁핍의 시대를 나타내는 말이다. 

 

“보릿고개”등 내자신 직접적으로 겪어보지 않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제외하고 내가 직접 겪고 보고 들은 지나간 사건들을 우선 머리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본다.

 

냉전 위기,  핵위기, 김신조 무장 공비 침투 사건, 평화의 댐 수몰위기, 80년대 Aids 인구 멸종위기, GM 식량 위기, 베트남 패망, 한반도 전쟁위기, 핵미사일 발사위기,  대연각 화재, 이리역 폭발사고,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사고, 지하철 폭발 참사,  IMF위기, 조류독감 위기….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6.25 전쟁 이후에도 끊임없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수 많은 위기속에서도 그저 “살아남은 것”에 감사를 드려야 할 따름일까?

울리히 벡의 “위험 사회론”같은 사회학적 시각으로 위기의 구조를 완전히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위기”는 수 없이 반복된다.  10년전 세계은행 보고서를 보면, 1970년대 후 30년동안 93개국에서 112번의 은행위기가 발생했다고  보고한다.  자연재앙이 아닌 인간재난인 은행위기가  100번이나 발생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위기의 발생 순간을 예측해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는데  위기가 수없이 반복되었다.  사람들은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이번에는 다르겠지!(is this time  different?)”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광기 패닉 붕괴의 금융위기 역사”를 탐구한 팔 스 킨들버그의 통찰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킨들버그의 결론 하나를 보자. “지금까지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광기에 대한 글을 썼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특정한 시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멍청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은 멍청한 돈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눈먼 자본이라고 부르는 이 돈은 탐욕을 통해 몸집을 불리면서 ‘과잉’과 ‘투기’ 그리고 ‘혼돈’을 초래한다.”

 

위기의 발생 순간을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심각한 위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역사가 새롭게 쓰여진다.   미래를 알아내는 것은 아무래도 인간의 힘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  위기의 발생은 아무도 모른다고 치자.  그러나 위기가 일어나면  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살아남아야 하는 명제를 가지고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모든 인간은  죽게 마련이다.”

 

“위기”란 한자 어원의 의미는 다들 잘 안다. “危機”란 말은 “위험”과 “기회”의 상호배타적인 말의 조합이다.  그러나 “위기”라는 말을 창과 방패의 “모순”이라는 말처럼 옥시모론이라고 보지 않는다.  위험을 기회로 역전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다이너마이트 위에 올라앉아서 ‘괜찮아,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우린 안전해’라고 중얼거리는 멍청한 인간”을 구별해 내야 할 것이다.

 

프로이드는 우리 인간에게 생존본능 뿐만 아니라 “죽음의 본능”도 있다고 주장했다.  프로이드가 말하듯, 위기의 본질에 맞서 싸우지 않는한 위기는 극복될 수 없다.

 

역사는 CARR가 말하듯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개념이다.  우리의 스토리는  살아나기 위해서 필요하다.  투우사처럼 소뿔을 마주 잡아야 한다.  위기의 발생이  자연의 복수일지라도, 또는 인간 재앙일지라도 위기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자신들이 위기에 잡혀 먹히고 말 것이다.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기의 실체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공포 때문에 자신의 자식마저 삼켜버리는 우를 범하는 “크로노스”가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고야의 에칭판화 1799년,  “이성이 잠든 동안 괴물이 태어난다”,  잠든 화가가 악몽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사진 고야의 El Coloso (The Giant; The Colossus), Oil on linen, Painted 1808 – 1812, 115 cm x 105, Museo del Prado, Madrid, Spain>

 


스페인 화가 고야(1746-1828)의 그림 “자기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21-3년.

로마의 신화에서 사투르누스는 자식들에게 살해당하리라는 예언 때문에 자식들을 잡아먹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팬(Pan)”은 사람들을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게 만드는 마술을 가졌다.  공포를 뜻하는 영어 “패닉”은 바로 이말Pan에서 유래한다. 사람들이피리를 부는  팬신이 나타나면 놀라는 까닭은 숲속에 사는 팬신이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손자병법에서 “밤에 소리를 지르는 것은 겁을 먹었다는 증거”라고 말하는데 그리스 신화에서 팬신이 무서워서 피리를 부는 것이었으리라.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달밤에 피리를 분 사연도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한쪽으로 휩쓸리는 군중심리(herd mentality)를 “양떼 심리”하고 명칭하는데  이것은 팬신의 하반신이 양의 다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 의미가 통한다.   사람들이 놀라면 양떼처럼 우르르 한쪽으로 몰려 도망가는 모습을 고대 그리스사람들도 파악한 모양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팬(Pan)신은 반인반양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공포에 떨면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말해준다.

 

아래 사진에 팬신은 피리를 부는 사람으로 팬신의 하반신은 양의 다리를 하고 있다. 

 

 

 

내가 학원에 나가며 배운 “팬 플루트”라는 악기가 바로 이 “팬”신이 부는 악기이다. 

 

 

 

<사진은 내가 간직하고 있는 팬플루트임-내가 팬플루트 연주 실력을 갈고 닦아서 유투브에 올리겠다는 야망과 포부를 미리 밝히는 검니다^^* > **저의 대문 프로필 사진으로 내걸고 있는 그림은 오늘 글에 인용한 유명한 "비명" 을 그린 노르웨이 국민 화가 뭉크의 그림입니다.

 

팬플루트의 음악의 유명한 Zamfir 그의 “외로운 양치기 (Einsamer Hirte; the Lonely Shepherd)한 번 들어보세요.

 

 

인간은 무엇을 모르면 두려움을 느낀다.  죽음에 대한 불안도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미지의 불안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죽게 마련이기에 죽는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미래가 펼쳐질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공포를 느끼면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놀라서 달아난다.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손자병법에서  “36계”를 조언하고 있다. 그중 마지막36계가 “走爲上”인데  이는 죽을지도 모를 큰 위기상황이  닥치면 먼저 도망쳐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은 곰을 만나면 먼저 도망부터 치고난 다음에 공포를 느낀다는 제임스-랑게 심리학 이론으로 보면 분명 타당하다. 

 

 

<심리학 기억 이론 정리 표- 대학 심리학 교과서>

 

 

동양의 고전에서 말하는 인간관계론과 생존술은 최근 진화심리학의 연구결과가 지지해준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사람의 아버지인 “예수”도 일단  이집트로 피신했기 때문에 새생명의 삶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니이체의 현명한 인식대로, 사람들은 위기가 닥치면 겁에 질려 생각마저 포기해 버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부족한존재다.  그러나 위기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불난 극장에서 과잉반응을 보이는 “양떼 심리”의 폐해를 사전에 막을 수가 있다.

 

 

뉴스 신문방송은  하루 한시가 멀다하고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끔 하는 사건 사고 소식을 전한다.

 

 위기는 국민을 단결하게 만든다.   손자병법에서 논하는 병사심함즉불구 무소왕즉고(병사들은 극심한 위기에 빠지면 오히려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빠져나가라 길이 없으면 더욱 단결하게 된다) 이런 위기의 기능 때문에 정치가가 존재한다.  북한이 백두산 화산 폭발 대비 남북한 당국자 회의에 나온 배경이 여기에 있다. 

 

 

위기상황에서 영웅이 탄생한다는 조셉 캠벨의 신화적 “영웅”론은 아직도 유효타당하다. 

 

우리는 위기 상황에서 위험을 기회로 역전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재난 자본주의” 저자 나오미 클라인은,  카트리나 태풍 한 방으로 미국이 여러 해 걸쳐도 해결 못할 일을 해 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가 1998년 IMF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범국민적 “금 모으기” 운동을 전개한 것을 기억해 보라.  일제시대 때 “국채 보상 운동”은 실패했지만 IMF 위기 극복 운동은 성공했다.

 

금융위기를 맞은 미국과 일본의 경제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면 국채 구입 운동이 일어날지 모른다.  “성조기를 든 아버지” 재목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TV영화가 있다.  전쟁은 돈이 없으면 더이상 지속하기 힘들다.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국채를 팔기 위해서 재무부가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구조를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다.  세계는 지금 군사전쟁이 아니면 경제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2차대전 때 루즈벨트 대통령이 직접 국채 판매를 장려하였다.

 

 

마찬가지로 어떤 위기상황이 닥치면 그 위기를 극복하자고 국가는 국민 단합을 외치고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고자 할 것이다.  실제로 1931년 사설 하나를 보면, “국민들의 자신감은 기업들이 새로운 자신감을 얻도록 힘을 불어넣을 것이다.  자신감은 더이상 좋은 서비스에 대한 선택적 보상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확고하고 지속적인 의무다”라고 애국심에 호소하였다.  “의무로서의 자신감(duty to confidence)”을 개념은  후쿠시마 원전사태 결과로 제정할 일본 부흥법의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국가가 애국심에 호소하는 그때는 국민 개인의 삶은 피폐해진다.   전쟁을 하게 되면 물가가 오르고 결국 국가재정이 고갈되어 나라가 무너진다.  이는 세계 역사가 말해준다.  멀리가지 않더라도 바로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태평양전쟁을 벌인 일본이나 세계 양차 대전의 유럽 국가들의 사례가 여실히 보여주는 사실이다.  

 

잠깐 길 “도(道)”자의 한자 어원을 살펴보자.  군사 작전처럼 우리는 지도를 보며 앞길을 개척해 나간다.  “로드 맵”은 나침반이고 등대의 역활을 한다.  그 “길”이란 뜻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의 머리를 베어가야 하는 세상임을 말해 준다.  머리 “수”에 물 수 변이 생겨서 “도”라는 글자를 만든다.  길은 한 마들에서 다른 마을로 통하는 역활을 한다.  그런 길을 가기 위해서는 마을 동구 밖에서 악령을 쫓아내야 했다.  악령을 쫓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머리를 들고 가야 했다고 한다.  그게 길이다.  나는 길 “道”의 어원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 인간의 선제적 공격이 삶의 본능임을  깨달았다.  전쟁에서는 내가 살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남의 머리를 베어야 살아남는다는 정글의 법칙이 통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마겟돈” 전쟁은 최후의 전쟁일까?  인간 세상에서 위기의 끝은 언제 어디서일까?  지구의 종말은 과연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공포는 어떻게 생기는가?  

 


<사진은 히치코크 감독의 유명한 영화 “사이코” 중 목욕탕에서 비명을 지르는 장면.  이 사진은 20세기 가장 인상깊은 사진 장면으로 뽑힐만큼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  이 말은 우리가 알지 못하면 당한다는 뜻으로 이어진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한다. 이제 다시 가장 근원적인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중에 “孟母三遷之敎”가 있다.  세익스피어의 “헴릿”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독백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만약 햄릿이 맹모의 삼천지교의 교훈을 깨우쳤다면 아마도 그런 회의는 하기 힘들었으리라!  맹가의 어머니는   맹자가 태어나자 3번째 이사를 다녔다. 

 

우리는 맹모의 3번째 이사간 동네인 학교에 포인트를 두고 있어서 맹모의 1번째 이사간 곳의 의미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면이 있다.  맹모가 처음 이사간 곳은   묘지가 있는 시골 동네이었다.  맹모가 두번째로 이사간 동네는 사람이 붐비는 도시의 “시장”근처이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3번째 “학교”가 있는 동네로  이사가기 전에 이사를 간 곳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맹모가 가장 먼저 삶의 교훈을 가르친 것은 “삶과 죽음”의 의미이었다.  이를 위해서 맹자의 어머니는  장의사들이 몰려사는 죽음의 동네로 이사갔다.   맹자는 어려서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는 장면을 직접 눈으로 경험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슬픔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중요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깨달었던 것이다.   다음번 이사를 가기 전 맹모가 맹자에게  배움을 확인해 간 것 같다.  맹자의 직접적인 답변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맹모가 맹자의 모습을 보고서 이사를 결정하였다는 것을 볼 때 맹모는아들의 행동을 통해서 교육효과를 측정한 것 같다.

 

맹자의 어머니가 오늘날 한국에서 살아간다면그는 결코 강남 8학군으로 이사를 가질 않을 것이다.  “맹모삼천”은 교육 환경의 중요성보다  스스로의 공부에 보다 강조를 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맹모가 맹가에게 어머니가 베틀 짜듯이 열심히 공부하여야 한다고 타이른 후에야 맹가가 회심하여 도를 이루었다는 것을 보면 그렇다. 

 

“맹모단기(孟母斷機)”의 원문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求學的道理,就和我織布的道理一樣,要一絲一絲的織上去,才能織成一塊有用的布。你讀書也是一樣,要努力用功,經過長時間的積累,才能有成就。像你這樣不用功,怎麼能夠成就大業呢?” 이렇게 보면 맹자가 친구들하고 어울려서가 아니라 맹가 자신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서 학문을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맹모의 교육 방식은 고대서양의 전설과 통하는 면이 있다.  중세 유럽의 일화를 보자.  한 마을에서 토지의 경계선을 정하는  날에 어린 아이를 경계석 위에 앉히고 주위 풍경을 똑똑히 기억하도록 한 뒤에 그 아이의 빰을 갑자기 세게 때렸다. 갑자기 충격을 줌으로써 수십냔 뒤에 경계 다툼이 일어날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경게를 정하는 구역의 위치를 증명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어린아이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방법이 현대에서는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충격요법과 기억의 관계를 말하며 문서가 없었던 고대에는  사람의 기억에 주로 의존하였다는 사실로 볼 때 역사적 일화로써 수긍이 간다.

 

잠재된 기억의 문제는 현대 심리학에서 토론되는 이슈중 하나다.  어렸을 적 뚜렷한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잠복되어 있다가 성인이 되면 어떤 계기에 의해서 되살려진다는 정신분석이론(Recovered memory syndrome )이 있다.    기억 이론은 아직 확고하게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서양 고대 일화처럼 정신적 충격에 의한 강렬한 기억 남기기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요즘 세상에는 “돈이 전부”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이런 세태에서는 경제 서적들이 잿빛 희망을 말하지 않으면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가 어렵다. 그것처럼  희망의 소재를 한 영화가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 반면에 죽음의 주제로 하는 영화는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  물론 베르만 감독의 “제7의 봉인”같은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추구한 고전적인 영화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주제로 다룬 이색적인 일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Departures”라는 제목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차원높은 수작이다.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찾으려면 먼저 죽음의 의미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오쿠리비토”영화에서 무언가를 느끼리라.

 

<오쿠리비토> http://blog.daum.net/blacksilk/13376188

 

 

우리의 진정한 삶의 의미는 맹모삼천지교가 전하는 것처럼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테마는 “공황”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학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테마를 가르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회피한다고 해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시대 가장 성공한투자 귀재  워렌 버핏이 교과서로 삼고 있는 “증권 분석”이란 책도 초판이 나온 후 약 70년이 지난 후에야 “공황”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공황을 통해 무언가를 배웠다면, 무익한 토론과 논쟁으로 결정을 늦추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문명의 붕괴”)에 따르면문명이 사라지는 재앙은 4가지 형태의 실수에 의해서 벌어진다고 한다. 첫째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실수, 둘째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실수, 셋째 문제를 인식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의지를 강력히 천명하지 못한 실수, 넷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실천하지 못한 실수 이 4가지라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위기 상황을 냉철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잘못한 실수는 어떤 것인지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진실한 답을 찾아야 할 때이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자주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행동하는 양심”이다.  이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라”라는 표현과 같은 내용이다.  가슴에 손을 얹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세를 설득할 때 즉 출애굽기 4장에 나오는 표현이다.  사람의 행동은 이성만이 아니라 감성에 의해서 나온다.   불멸의 시인 단테는 말했다, “신의 정의는 냉혈한의 죄와 따뜻한 심장을 가진 자의 죄를 다른척도로 가늠한다”.

 

이성은 뜨거운 가슴에 손을 얹고서 나올 때 강력하다.  감성과 이성을  총합적으로 판단할 때 최상의 이익을 얻을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나타나는 많은 위기들의 실체를 알고자 하는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의 이성과 감성을 자극하고자 한다.  위기가 닥치고 위기가 지나가는 과정에서 위기를 미리 예측하지 못한 것을 통탄해 하거나, 또는  위기가 지나간 뒤 자기합리화를 하는  즉 심리학용어로 “인지부조화”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TS 엘리어트의 말은 타당한 것 같다.  “세상이 끝나는 소리는 꽝하는 소리가 아니라 흐느끼는 소리이다”.  세상의 종말은 불이나 빛으로 폭발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절망의 잿빛 구름”을 가져오는 것은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우리자신내부에 있다.  아마겟돈전쟁은 우주의 침입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 아닐까?

 

여기 글들은 현대 사회의 위기를  핵심적으로 설명하는 글들을 한데 모은 것이다.   나 자신의 분석적인 글들과 함께 사색의 깊이를 더해 줄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자료들을  모왔다.   이가운대  많은 부분이  영어 자료를 충실히 번역한 것이다.  학문이나 실무 영역에서 영어를 쓰는 영국과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상 어쩔 수 없는 한계다.   그러나 세계화된 지금 한 나라의 사정은 다른 나라에게 바로 동시에 영향을 주고 받는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위기의 실상과 본질을 파헤친 글들을 통해서 자신의 직접적인 인생경험처럼 통찰적 해석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년간을 외국에서 살면서  배우고 읽히고 조언해준 위기 관리 현장 실무 매뉴얼을 첨부하였다.  

 

미래 예측은 지나간 자료의 축적에 크게 의존한다.  우리 모두는 역사가처럼 행동한다.  자기가 경험한 특정한 과거의 일을 사후적으로 느끼고 해석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과거의 경험이 없고 기억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만큼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미래의 앞날을 미리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미리 결단의 행동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결단에 대한 책임을 자기스스로 져야 한다.  과거가 현재가 되고 미래는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는 피드백의 과정에서 되새김질을 하여야 한다.  EH 카가 말했듯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스토리와 대화는 미래의 결단을 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글들이 “지금 여기 현재의” 행동을 이끄는 나침반과 등대가 되길 바란다.

 

위기가 언제 어디에서 벌어질지 그리고 위기가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불확실성의 시대 현대에서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던 우리 모두는 생존적 결단을 요구받고 있다.  불안한 미래를 개척해 나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과, “아마겟돈”과 같은 혼돈의 전장속에서 살아 남기 전략을 가다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도움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