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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수필/레테의 강

기억과 망각

by 추홍희블로그 2011. 1. 7.

밀란 쿤데라는 그의 저서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권력에 대한 저항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고 말한다. 
쿤데라가 증거하는 체코의 독재체제의 사진 조작술은 오늘날(*최근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 사진 편집) 아랍의 독재국가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독재체제유지술책의 하나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보면 마찬가지로 기억은 전체주의 독재체제의 거대한 정권기만술에 대한 약한 무기의 하나라고 말한다.  독재체제는 말의 개념마저도 새로이 바꾸어버리고 인민들의 기억을 지워버리고자 하는데  국가체제가 동원하는 문화적 망각증에 대한 하나의 투쟁도구가 기억이다. 


보수우파는 전통을 강조한다.  전통적 질서를 부르짖고 지난 과거의 화려했던 면을 강조한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부장적 질서를 전통으로 유지하려고 한다.  보다 가까이는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을 향수로 자극한다.

반면 진보좌파는 고도성장 속에서 가리워진 민주정의질서의 파괴의 아픔과 상처를 꺼내 반박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일어난 폭력과 억압의 그늘을 분명한 증거로 제시한다.


 

이렇게 보면, 보수편이거나 진보편이거나 간에 기억은 모두 하나의 치유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한반도를 전쟁의 도구화로 삼으려는 보수우파가 모토로 하는 “상기하자! 6.25”처럼 기억은 하나의 약방의 감초가 되고 고통을 잊게하고 향락을 가져오는 대마초같은 마약이 되는 것이다.  기억이 없으면 보수우파의 선제적 공격도, 진보좌파의 수세적 반격도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기억은 우리 모두에게 과거의 고통의 삶에서 목적적 미래를 제시하는 하나의 연결끈이며 없어서는 아니되는 마약인 것이다.

 

따라서 기억의 정반대인 망각은 프로이드가 파악한대로 억압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기억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기억은 아편과 같은 것이어서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은 하루라도 자기 이름이 신문방송에 나오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기억의 이런 면에서 제5공화국에서 9시뉴스 프로그램 때 “땡!전뉴스”를 만들어낸 것이며 수많은 찌라시나 눈요기감 신문방송이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전화하고 끊임없이 사랑의 안부를 묻는 것과 같이, “잊혀진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처절한 몸부림을 치는 것- 바로 기억의 작용이고 이게 우리 삶의 과정이다. 

 

반면
"사람들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말한다.  기억이 인생 길을 유지하는 마약인 것과 같이 그반대인 망각 또한 삶으의 치유제가 된다.  그리스 로마 신화 “레테의 강”이 말하는 바와 같이 망각이 없으면 우리 인간은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지 못하고 그저 미쳐 죽고 말지 모른다. 
“아프고 슬픈 상처는 잊어야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마약을 투입하고 수면제를 먹기도 한다.  “살기 위해서 먹는다”고 하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 잊기를 한다.  세상으로 부터 벗어나 잠시 휴식과도 같은 수면을 통해서 잊혀지기를 바란다.  불면의 고통도 “세월이 약”인 망각이 주는 선물에 사라지고 만다.  “살기 위해서, 잊어야 하는” 망각의 기능을 인정하게 된다.

 

그럼 여기에서 창과 방패처럼 모순과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하는 방법론의 문제가 발생한다.

 

잊혀야 할 것을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해결의 주제가 방법론으로 옮겨진다는 것은 영국 수상 처칠이 말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시각과 세익스피어가 말하는 인생 7막론 즉  마지막 망각단계론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망각론적 시각은 오늘날 보다 진전된 진화심리학의 강력한  논거로 반박될 수 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희곡 “좋을대로하세요(As You Like It)”에서 “이 세상은 하나의 연극무대요, 우리 인간 남녀는 무대위의 배우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는데 그의 인생7막론을 보면, 우리 사람들은 어머니 젖을 먹는 유아기, 학교가기 싫어하는 배움의 아동기, 연인의 미세한 부분까지 찬미하는 사랑에 빠진 연인기, 명예를 위해서 죽음도 불사르는 싸우기좋아하는 군인기, 기름진음식먹고 세상바른말 잘하는 정의(justice)기, 입과 다리에 힘빠지는 노인기, 그리고 이빨빠지고 눈도희미해지고 먹지도 못해 모든 것이 잊혀지는 제2유아기 즉 세상에서 깡그리 사라질 노망기- 이렇게 인생7막으로 전개된다고 인생 흐름을 말한다.

 

정말 우리 인간의 무대 장면은 인간 육부와 오감이 사라지는 그렇게 완전한 망각으로 사라지는 사라짐일까?   진화심리학이나 융의 집단심리학개념이나 사회적심리학의 논거에 보다 관심을 기울인다면 인간의 망각적 존재를 부정하리라.  한 마디로 우리는 죽음으로써 완전히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오래 전 묘비로 들어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 더욱 새로워진 것처럼 우리 인간은 망각적 존재로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보들레르 ("벌거벗은 내마음"에서)의 의문과 같이,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은 기실 부질없는 호기심을 채우는데 소비되고 있다.   또 한편 가장 인간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야 할 진정한 문제들은 우리 보통사람들의 일상속에서 아무런 호기심을 자아내지 못하고 있다.

 

다람쥐 쳇바퀴같은 삶에서 부질없는 질문일지 몰라서  나는 오늘 내 젊은 30년전 20살도 안된 청년기의 의문을 다시 캐내 본다.


"바람이 별빛마저 꺼트릴 것 같은 밤에 추억의 램프에 불을 밝히자.
내 눈물로 밝힌 등잔엔 슬픈 옛날이 고운 불꽃 되어 일렁이는데 지금 그대는 어디 있는가?
옛날에 우리어깨동무하고 별을 바라보던 언덕길엔 가랑잎 날리고 창밖엔 겨울이 기웃거리는데 지금 그대는 어디 있는가?
추억의 램프엔 아름다운 옛날이 그리운 옛날이 고운 불꽃 되어 일렁이는데 깜부기며 불던 그 사람 그대 어디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