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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포토 essay/산사의 아침-문화유산 탐방기

내장산 백양사 쌍계루

by 추홍희블로그 2013. 11. 18.

며칠 전 포스팅한 경북 풍기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왕의 친필 현판을 내건 유교사원)으로 잘 알려진 소수서원이 불교사원을 그대로 유교사원으로 간판만 바꿔 달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시피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국가의 공인된 종교로 삼아서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처럼 칼을 휘두르고 불상을 폭파시켜버리는 무모하게 모든 불교 사원을 탄압한 것은 아니었고, 또 신라와 고려시대 내내 불교 사원은 국가 종교로써 지배계층 기득권상층부에 속해온 것과 같이 조선시대에도 그런 역할은 (영향력은 줄어 들었을 테지만) 계속 유지되었다. (그 정도와 사실에 대해서는 전 알기 어려운 아이던노!의 영역이지만).

숭유억불의 정책을 펼친 조선시대에도 상층지배계층 유학자와 불교사원은 전답 지주들로서 기득권층을 형성하며 서로 교류하여 왔다.

금수강산 명산 명찰 명승 명루 하나가 내장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백양사 쌍계루이다. 쌍계루(6.25한국동란 때 불타서 지금 누각은 최근에 새로 지은 것) 누각은 고려시대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족 지배계층 유학자와 불교승과의 교류 내역을 잘 알려주는 준다.

쌍계루에 오르면 고려말 유학자 포은 정몽주 선생과 여말선초 삼봉 정도전선생 조선중기 유학자 하서 김인후 선생 등의 한시 간판이 걸려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쌍계루에 걸린 시는 절에 걸려 있는 한시이어서 그런지 유학자 선비와 스님들간의 교류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면 한시 해석을 제대로 해내기가 어렵다.

누각에 쓰여진 글은 한자로 쓰여져 있다. 첨부 사진 참조.
그래서 조금 해석을 필요로 한다. 한자를 바즈런히 써놓은 해서나 또는 전서도 요즈음 세상에서는 읽기 어려운 데 더욱이 글자체가 행서나 초서로 쓰여져 있으면 더욱 해독하기가 어렵다.

한자를 한글로 적어보고 그 뜻을 헤아려 적으면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樓頭識面兩三僧 (누두식면양삼승)쌍계루 누각 위의 두 세명의 스님들 안면이 익은데
持守前規喜爾能 (지수전규희이능)이들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규칙들을 분수껏 지키오니 기쁘지 아니한가.
絶澗言因淸叟懇 (절간언인청수간) 깊숙한 산 골짜기는 청수스님의 간절한 발원을 말해주고
烏川句爲牧翁增 (오천구위목옹증)포은 선생의 시가 목은 선생을 더욱 빛내주네.
曾聞寫記庵爲幻 (증문사기암위환)예전에 듣기로는 누각기를 환암대사가 멋지게 옮겨 썼다고 들었는데
今見隨行號偶澄 (금견수행호우징)이제 보니 수행승의 호는 우연하게도 (맑을)징(澄)자이네.
扶病懶經頑石路 (부병라경완석로)아픈 몸을 이끌고 딱딱한 돌길을 천천히 걷어 가는데
春風不負少年登 (춘풍부부소년등)봄 바람이 불어와 어린 시절 올랐던 일이 되살아나네.

여기서 제가 해석을 제대로 해내기가 어려운 대목은
“絶澗言因淸叟懇 (절간언인청수간)
烏川句爲牧翁增 (오천구위목옹증)
曾聞寫記庵爲幻 (증문사기암위환)”이었다. 그 이유는 구체적인 스님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저 같은 나그네는 글귀만으로는 해석해 내기가 어렵다. 누각과 절의 역사를 알아야 해석이 될 것 같다. 따라서 나는 한국학연구원 등을 이용한 문헌 자료 검토를 통해서 나름대로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烏川句爲牧翁增 (오천구위목옹증)=>
오천(烏川)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본관이고 따라서 하서 선생이 포은 선생의 시에 댓글 화답한 한시이므로 오천은 정몽주 선생을 이른다.

“絶澗言因淸叟懇 (절간언인청수간)=>.
절간絶澗은 깊숙한 산간 계곡 골짜기를 말하고 따라서 “깊숙한 산간 골짜기의 물이 너무나도 맑구나”라고 해석할 수 여지도 있겠으나 한국 고전번역원을 통한 목은이색 선생의 “장성현백암사쌍계루기(長城縣白巖寺雙溪樓記)” 그리고 삼봉 정도전 선생의 “정토사기” 등을 좀더 살펴 보면 백양사를 1377년 중건발원한 “청수” 스님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역사를 구체적으로 모른다면 한시 해석이 제대로 되지 못하리라.

曾聞寫記庵爲幻 (증문사기암위환)예전에 듣기로는 누각기를 환암대사가 멋지게 옮겨 썼다고 들었는데=>
환암(幻菴) 대사(1320∼1392년)는 목은 이색 (1328~1396년)과는 젊어서부터 글벗(문우) 절친이었다고 하고 무학대사에 연결된다고 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청산은 나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의 작가 나옹 대사(1320-1376년)는 무학대사의 스승이었고, 무학대사(1327∼1405)는 조선개국 이태조의 스승이었다.

하서 선생이 답한 포은 정몽주 선생의 한시 해석은 쌍계루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카피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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