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권력자는 누구인가?
최후의 권력자는 누구인가? 대법원과 사법부
독립
추홍희 편역
최후의 권력자는 누구인가? 대법원과 사법부 독립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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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
6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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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헌법 위기의 개념과 소재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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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사이에 권한 다툼-헌법 제107조제2항 헌법 해석의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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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미국은 어떻게 헌법 위기를 돌파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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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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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독립 원칙과 사법 심사 judicial review 제도-마버리 케이스 |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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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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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심사 Judicial Review 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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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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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버리 케이스 Marbury v. Madison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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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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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버리 케이스 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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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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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버리 케이스 법적 쟁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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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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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버리 케이스 판결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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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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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버리 케이스 판결 이유에 대한 비판적 견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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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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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산당을 불법화시킨 법률에 대한 대법원의 위헌 법률 심사 |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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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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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미국 공산당 대 반정부활동 통제 위원회 사건 Communist Party of USA v. SACB |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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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사건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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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법률 쟁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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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판결 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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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판결 이유-다수 의견-프랑크프루터 대법관 |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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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판결 이유-반대 의견-블락 대법관 |
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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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판결 이유-반대 의견-다글라스 대법관 |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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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판례 해설-정당 불법화 법률의 위헌성 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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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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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미국 공산당 Communist Party of USA 대법원 파기 환송 판결 |
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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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사실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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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판결 이유- 다수 의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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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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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판결 이후 새로운 기준을 확립한 판례 |
4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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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예이츠 판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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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브랜든버그 판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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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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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해산 헌법 재판-호주 대법원 CPA 케이스 해설 |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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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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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A 사건 전개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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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호주 공산당 해산 사건의 역사적 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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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공산주의 국제적 팽창에 대한 자유 세계의 공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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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공산당 해산 법률의 제정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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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공산주의자에 대한 태도-형법상 내란 선동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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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공산당원 친소 발언 형사처벌 공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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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사무총장 샤키 형사처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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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공산당 해산 법률 입법 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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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공산당 해산 법률 제안 설명- 멘지 수상 연설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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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해산 법률안에 대한 야당의 반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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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위헌무효 헌법소송 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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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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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해산 법률 위헌무효 판결-The Communist Party Ca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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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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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해산 법률 위헌 소송 헌법 재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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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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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쟁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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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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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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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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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헌 무효 판결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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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권력 분립과 사법부 독립의 원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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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입법부와 행정부 행위에 대한 사법부 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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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급박하고 현존한 위험의 존재와 법원의 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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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국가 안보는 정책 판단의 영역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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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법의 지배 rule of la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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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죄형 법정주의와 소급입법 금지 원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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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민주•대의•정당 정치의 토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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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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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판결 이후 국민투표 전개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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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위헌 무효 판결에 대한 정부 여당의 반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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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 개정으로 공산당 해산 추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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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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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최종적인 헌법의 수호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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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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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지배” 개념- 다이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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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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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민족민주당 (NPD) 정당 해산 심판 |
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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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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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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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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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쟁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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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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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경과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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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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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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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법정 의견 (3인 재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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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반대 의견 (4인 재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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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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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D 사건 해설-적법 절차와 재판의 공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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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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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정당해산 심판 사례 5 요약 |
157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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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선거 부정 개표 선거 소송-법과 정치의 경계선 |
1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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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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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대 고어 케이스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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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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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쟁점과 판결 이유 판결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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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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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이 중요한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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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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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판결이 최고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고어 후보의 대선 패배 연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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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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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투표 제도-스위스 헌법에 대한 다이시의 견해 |
172 |
최후의 권력자는 누구인가? 대법원과 사법부 독립
들어가기
헌법 위기의 극적 상황을 극복하고 국가의 안전과 질서를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최후의 권력자는 누구인가? 대통령인가? 국회인가? 대법원인가? 헌법재판소인가? 국민인가? 누가 국법 질서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최후의 권력자인가?
이 책은 법의 지배와 권력분립, 사법부 독립의 법적 개념과 역학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미국 독일 호주의 헌법 재판 케이스를 소개 설명한다.
최후의 권력자는 누구인가? 대법원과 사법부 독립
1. 헌법 위기
1.1 헌법 위기의 개념
우리나라 헌법상 권력 구조는 단임제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 만약 다음 선거에서 새 정권이 들어서는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의 마버리 사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 바대로, 신 구 정권은 기존의 명령을 집행하는 것을 두고서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나타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헌법재판소의 최종판결이 정당 해산을 청구한 현정부의 임기 내에 내려지고 난 후 그리고 선거를 통해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경우라면 어떻게 될까? 새 행정부는 미국의 제퍼슨 정부의 사례에서처럼 이전의 정부에서 실행된 명령을 제대로 집행하기를 거부하거나 또는 협조하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만약 새 행정부가 기존의 명령을 집행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휴지조각에 불과할 운명에 놓이게 된다. 헌법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같이 사법부 우위의 제도가 존재하는 국가도 아니고 또 최고의 사법부 기관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이 둘로 나뉘어지고 쪼개진 사법부 제도이므로 헌법 위기 constitutional crisis의 범위와 정도가 보다 크게 나타날 위험성이 존재한다. 물론 미국과 같은 연방제 국가가 아니라 동일한 법치 영역의 단일국가 체제이므로 연방제 국가와 같은 “헌법 위기”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정당 해산 명령에 대한 실효성이 새로운 차기 정부의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면 그것은 헌법 위기의 상황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헌법 위기의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헌법- 실제로 작동하며 힘을 지닌 헌법”[1]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성찰을 요구할 것이다.
1.2.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사이에 권한 다툼- 헌법 제107조제2항 헌법 해석 문제
최후의 심판자의 역할을 하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하여 다시 대법원에 소구하는 헌법 위기 상황이 노출되었다. 왜냐하면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의원직 상실 부당"에 대하여 국가 상대 소송 행정 소송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2]
헌법 제107조제2항 헌법 해석의 문제
헌법 제107조제2항 규정을 보자. “명령•규칙 또는 처분이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되는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경우에는 대법원은 이를 최종적으로 심사할 권한을 가진다.” 이 헌법조문이 규정하고 있는 행정 재판과 헌법 재판간의 권한 배분 정도에 대해서는 현재 이론적으로나 실무적으로 이견이 크게 나뉘어져 있다. 헌법 제107조제2항 규정은 명령 규칙 처분의 최종적 심사권을 명시한 권한의 소재 즉 관할권이 대법원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을 뿐, 추상적(본안적) 규범통제(행정입법의 사법 직접 심사)의 허용에 관해서는 입법자의 재량에 맡겨져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 헌법은 정당해산 심판 건에 대해서 헌법재판소가 관할권을 갖는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을 뿐이고, 헌법재판소가 내리는 명령의 법적 성격에 대해서는 어떤 규정도 명시적으로 두고 있지 않다.[3] 따라서 헌법재판소의 정당 해산 금지 명령에 대한 법적 효과에 대해서 다툼이 발생할 여지가 충분하다.
헌법상의 처분 개념
우리 헌법에는 ‘처분’에 대한 명시적인 개념 ‘정의’ 조항이 존재하지 않는다. 행정소송법 규정에서 정의하는 개념을 보면, “제2조 (정의)① .. ‘처분’이라 함은 행정청이 행하는 구체적 사실에 관한 공권력의 행사 그 밖에 이에 준하는 행정작용을 말한다.” 헌법에 명시적인 정의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처분 개념 해석 기준에 대한 제헌 당시 헌법 기초자들 중 대표적인 한 사람인 유진오 교수의 설명을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해당헌법조항]은 대법원이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모든 명령, 규칙과 처분이 헌법과 법률에 위반되는가 안되는가를 최종적으로 심사할 권한이 있는 것을 규정하였는데, 명령과 규칙이 헌법 또는 법률에 위반되는 여부를 법원이 심사할 수 있음은 세계 각 민주국가에서 인정되는 원칙이므로 특히 설명의 필요가 없고, 본 항의 중점은 행정처분을 주로 하는 국가의 처분행위를 법원이 심사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대법원은 모든 명령, 규칙과 처분이 헌법 또는 법률에 위반되는 여부를 최종적으로 심사할 권한이 있다 하였을 뿐이므로 …. 모든 행정소송은 처분을 행한 행정청의 소재지를 관할하는 고등법원이 관장하도록 규정하였다. 위법한 행정처분에 대하여 여하한 정도와 범위에서 출소를 허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행정소송사항을 특별히 제한하지 않고 위법한 행정처분에 대하여서는 전면적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였다.”[4]
위의 설명에서와 같이 집행 명령에 대해서도 사법 구제 절차가 전면적으로 허용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헌법 재판과 행정 소송의 경합관계
이론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금지명령의 내용과 성격에 따라서는 대법원의 사법심사 대상이 되는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간에 판결이 엇갈리는 행정소송의 사례가 나타난 사실들을 참고한다면 헌법재판소가 사실심리 후 어떤 명령을 내리게 되는 경우 그것이 다시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해산명령 발동 (가처분 발동의 경우는 두말할 필요 없고), 당사자인 정당은 정당 구성원의 정치적 기본권 침해 확인 헌법 소송이나 헌법 소원 등을 통해서도 또는 행정소송을 통해서 사법구제절차를 밟을 수 있는 길이 놓여 있기 때문에 헌법재판소는 이율배반적이고 미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위험성이 크다. 만약 헌법재판소의 명령/가처분(헌법재판소의 명령을 행정부가 간접적으로 집행권을 행사하는 경우를 포함하여)에 대해서 하급법원이 다시 심사하게 되는 모순점이 대두될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난다고 하더라도 “헌법재판소가 위헌으로 결정한 법령을 적용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확정판결에 대해서는 헌법소원이 가능하다고 판시한 헌법재판소 판례 96헌마172.173(병합)에 따라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의 확정판결 후에도 다시 재심사할 수 있다는 순환론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헌법 위기 상황을 예정하여 해결 방법을 제시한 헌법상의 명시적인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헌법 107조2항 규정의 불명확성에 대한 헌법 해석
헌법 제107조제2항 규정의 불명확성에 따른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간의 헌법해석 권한에 대한 갈등관계가 존재한다.[5]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간 갈등관계 중 특히 헌법해석 권한에 관해서는 특히 그 귀추가 주목된다. 대법원 1996.4.9 선고 95누11405 판결. 헌법재판소는 양도소득세 부과에 있어 투기거래의 경우 실지거래가액을 기준으로 한다는 구소득세법 시행령(제170조제4항제2호)의 위임 근거규정인 구소득세법 제23조제4항 단서에 관해 동 법률조항이 실지거래가액에 의한 세액이 기준시가에 의한 세액을 초과하는 경우까지 포함하여 대통령령에 위임한 것으로 해석하는 한도 내에서는 위헌이라는 한정위헌결정을 내린 바 있다 [1995.11.30.선고, 94헌바40등(병합)결정]. 그 이후에 대법원이 양도소득세부과처분 취소소송에서 위 헌법재판소 결정에도 불구하고 그 부과처분의 전제가 된 위 구소득세법 및 동법시행령 규정들은 합헌이라는 판결을 하면서 행정소송의 심리에 있어 요청되는 헌법해석은 대법원이 그 최종적 권한을 갖는다고 판시한 것이다. 이 판결에 대해 헌법소원이 제기되었는데, 동 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재판을 헌법소원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는 헌법재판소법 제68조제1항은 헌법재판소가 위헌으로 결정한 법령을 적용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재판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한도 내에서 위헌이라고 판시하고, 위 대법원판결에 대한 헌법소원을 받아들여 동 판결을 취소하고 있다. [1997.12.24선고, 96헌마172.173(병합) 결정].”[6]
1.3 미국은 어떻게 헌법 위기를 돌파했을까?
헌법상 명문 규정이 미비하거나 불명확한 상황에서 초래된 사상초유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헌법 해석에 있어서의 국제법적 이해가 도움이 된다. 자국의 법원 legal sources과는 다르기에 직접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고 해도 설득력 있는 persuasive 사례를 발견하고 원용함으로써 문제 해결의 훌륭한 길잡이의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헌법 위기를 어떻게 돌파했을까? 왜 미국 연방대법원은 행정부에 대한 의무이행명령이나 금지명령에 대한 소에서 사실심리 권한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게 되었을까? 미국 연방 대법원은 직무집행명령, 금지명령, 의무이행명령의 경우 사실심리 권한이 없다고 대법원 스스로 위헌법률임을 결정했는데 그 판단이유를 보다 깊이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사법심사의 헌법상 원칙을 수립하고 헌법기관간의 권한 배분 문제를 해결하게 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마버리 사건을 참조하라.
2. 사법부 독립과 사법 심사 제도 judicial review
마버리 Marbury 케이스
미국은 연방대법원이 위헌법률 심사권과 위헌명령심사권한을 동시에 행사하고 있다. 미국의 대법원이 어떻게 헌법 위기의 상황 속에서 헌법을 수호해 냈는지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나라의 헌법 위기와 그 해결책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7]
“마버리 사건 Marbury v. Madison”[8]은 미국에서 위헌법률심사 제도를 헌법 원칙으로 수립한 최초의 판례이다. 마버리 사건은 미국의 연방 대법원이 어떻게 행정부와 입법부를 기속(羈束 얽어 매어 묶음 binding)하며 헌법 수호자로써의 최고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1). 사법 심사-행정부와 입법부의 행위에 대한 사법부의 최종적인 견제
사법 심사 judicial review 제도는 의회의 제정법률 또는 행정부의 명령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여겨질 때 이를 사법부가 최종적으로 final 심사하여 그것을 무효로 되돌릴 수 있는 헌법상의 제도를 말한다. 사법심사 제도는 권력분립의 최종 표현으로써 행정부와 입법부의 독주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사법부에 의한 권력 견제 legal check 장치”로써 이해되고 있다.
사법 심사 제도는 헌법상의 명문규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법원의 판례로써 확립된 헌법 원칙이다. 미국에서는 “마버리 사건”판례를 통해서 사법 심사 제도가 헌법상의 원칙으로 확립되었다.
왜 그리고 어떻게 다수의 법관으로 구성된 대법원이 “최종적인 헌법 수호 the final, respected arbiter of that law”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을까?
미국의 건설을 책임진 미국의 건국 영웅들의 한 사람인 토마스 제퍼슨의 다음과 같은 말을 확인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정부 모든 부문의 권위, 안녕, 국민의 도덕과 사회의 모든 행복은 고결하고 훌륭한 재판의 운영에 달린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법권은 입법부와 행정부로부터 분명히 구별되고 이들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 또한 사법부가 입법부와 행정부를 견제해 내야 한다는 것은 이들이 사법부를 견제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법관은 항상 법률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있고 모범적인 도덕을 가진 매우 인내심 있고 냉정하고 주의력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립적인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해서는 아니되고 또한 법관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단체와도 의존관계에 있어서는 아니된다. … 법관의 임기는 그가 위법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 한 보장된다.”[9]
이러한 독립된 성격을 가진 법관들로 사법부를 구성하고, 연방 대법원은 사법부의 최고 지위를 차지하며 이들 대법관이 내리는 판결들은 헌법 수호의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해왔다. 하지만 이런 대법원의 역할은 헌법상 명문 규정에 의해서 담보된 것이 아니었다.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2). 마버리 사건이 일어난 정치적 배경
행정부와 사법부 간의 대립과 긴장 관계 형성
마버리 사건은 신생독립국 미국에서 공화파와 민주파의 양 정파간의 정치적 분쟁이 극심한 때 일어났다. 1800년 당시 미국은 국외에선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이 격화된 가운데 미국과 프랑스와의 준전시 상황이 벌어지고, 프랑스 혁명 (1789년–1799년)에 대한 시각 차이, 건국과정에서 중앙집권파와 지방분권파의 이념적 대립이 격화되고, 내란죄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고조되는 등 정치•사회적으로 혁명기의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10]
영국과의 식민지 전쟁을 벌이고서 1776년 독립한 미국에게 프랑스는 강력한 우방이었으나 프랑스 혁명이 발발(1789년)한 후 미국은 영국과 우호관계를 맺게 (1794년) 되고, 프랑스와는 우호조약을 폐기 (1798년)하며 해상전쟁에 돌입하게 되는 상황(1798년–1800년)으로 돌변했다. 이러한 신생독립국의 국내외의 혼란된 정치상황에서 반란죄가 큰 이슈가 되었고 제퍼슨은 친프랑스파로서 내란죄 폐지론의 입장에 섰다.
1796년 대선에서 공화당파(중앙집권주의자; 연방정부+대법원권한 강화) 아담스 후보가 제퍼슨 후보에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4년 후 1800년 대선에서는 제퍼슨이 주도하는 민주당파(지방분권주의자; 권력분립과 견제와 균형원칙 강조)가 승리하였다.
1800년 12월 6일 끝난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아담스 대통령은 신임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의 과도기간을 이용하여 1801년 1월31일 자신의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인 마샬을 대법원장에 임명하고, 16명의 순회법원 판사와 42명의 치안판사(JP)를 한꺼번에 대거 임명하였다. 퇴임 대통령이 야밤에 도주하듯이 급히 법관들을 임명 (제퍼슨 신임 대통령은 마샬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하는 것에 반대했다)한 것을 빗대어 이를 “Midnight Judges Act”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법부 법관은 임기가 보장되기에 새정권이 출범하기 전에 법관 인사들을 채우면 사법부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시킬 수가 있다고 여기고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인사들을 서둘러 임명한 것이다. 마샬은 1801년에서 1835년까지 34년간 대법원장으로 재직하였다.
하지만 정권교체기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급하게 이루어진 까닭에 마버리를 포함한 원고들은 미처 아담스 대통령의 퇴임 일인 1801년 3월2일까지 임명장을 전달받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마버리는 제퍼슨 대통령의 새정부 국무장관인 매디슨 Madison에게 전임 대통령이 서명한 법관 임명장을 교부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마버리는 매디슨에게 자신의 법관 임명장을 교부하라는 “의무이행 집행명령 Mandamus”의 소송을 연방대법원에 제기하였다. 사건 이름이 Marbury v. Madison이고 이는 원고와 피고의 이름을 각각 나타낸다.
보통의 대법원 소송사건은 하급법원부터 차례로 올라가 연방대법원은 항소심, 최종 상소심을 관할하게 되는데 마버리 사건은 1798년 의회가 제정한 법원조직법 Judiciary Act에 명시된 하급법원이나 정부 관리에게 연방대법원이 직무 집행할 수 있다는 규정을 근거로 원고가 행정부에 대해 의무이행의 집행명령을 내려달라고 대법원에다 Mandamus 소를 직접 청구한 것으로써 당시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3). 마버리 사건과 사법 심사 제도의 확립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연방대법원의 입장은 쉽게 판결을 내리기 어려운 진퇴양난의 상황임이 분명했다. 마버리의 청구를 인정하여 원고승소의 판결을 내린다면 행정부가 법원의 명령을 무시할 것이 분명하였고 또 그런 변명의 수단들을 행정부가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피고 행정부는 재판 참가를 거부했었다. 이런 가운데 만약 연방대법원이 재판관할권이 없다고 판단한다면 즉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다면 대법원이 헌법과 법률에 열거된 자신의 정당한 권한을 포기하고 행정부의 압력에 굴복하였다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했다. 반면 행정부에게 의무이행명령(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다면 행정부가 집행을 거부할 것이 분명해 보여서 최고 사법 기관으로써의 대법원의 권위가 타격을 받게 될 처지에 놓였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법률을 통과시키고 정식으로 법률 효력을 발휘한 의회 제정의 법률에 근거하여 즉 “의회 주권(의회우월주의 parliamentary sovereignty)”원칙의 대의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서 대법원은 마땅한 재판권을 가졌으므로 대법원이 재판권을 포기할 법적 이유가 없었지만 한편으론 법원의 판결이 집행권이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의 도래 즉 사법부가 행정부에 종속되어 있다는 결과가 된다면 그것은 사법부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대법원은 딜레마[11] 상황에 빠진 것으로 보였다. 당파적인 대립이 극심했던 당시 구정권과 신정권의 힘겨루기의 양상이 벌어진 정치적 혼란 상황에서 마샬 대법원장은 어떻게 어려운 법적 난제를 해결해 낼 수 있었을까?
(4). 마버리 사건의 법적 쟁점
마버리 사건에서 법적 쟁점은 다음 3가지로 요약되었다. ① 원고는 임명장을 교부 받을 권리가 있는가? ② 원고에게 그 권리가 있고 또한 법률상 구제수단이 존재한가? ③ 법률상 구제책으로써 연방대법원이 명령을 내려야 하는가?[12]
이 같은 법률 쟁점에 대해서 대법원은 ① 새행정부가 내린 임명 보류 결정에 따라 법관 임명장을 정식으로 전달받지 못해서 소를 제기한 원고에게 임명장을 교부를 요구할 권리가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대통령이 퇴임 이전에 정식으로 서명했고 당시 국무장관이 서류를 봉인하는 등 법관 임명에 따른 절차적 요건이 완결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② 그에 따라 원고에게 권리가 발생했고 또 그 권리가 부당하게 침해 당했으므로 원고에게 법적 구제를 주어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3번째 요건에서 ③ 연방대법원이 그러한 법적 구제를 마련해 줄 사항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당시 1789년 법원조직법에서 연방대법원이 연방정부 공무원의 집행명령에 대한 재판권을 갖고 있다는 규정은 연방대법원의 권한을 규정하고 있는 연방헌법 3조 규정을 위반하여 법률 무효(strike down)가 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부연하면 헌법해석상 연방대법원은 헌법의 명시 규정대로 대사•공사•영사에 관련된 사건에서만 “원심 original” 재판 관할권을 갖고 그 밖의 사건에는 “상소심 appellate” 재판권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다.[13] 이러한 판결에 따라 원고는 대법원의 최종적인 심판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원고의 소 청구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었다.
연방 대법원은 최종적인 위헌 법률 심판권 the final, respected arbiter of constitutional law을 확인하면서 해당 법원조직법의 규정을 위헌무효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미국 헌법상 최초로 “사법 심사”제도를 확립하게 된 결정적인 판례가 되었다. 마버리 사건으로써 확립된 사법심사 제도는 연방대법원이 입법부와 행정부로부터 독립된 최고의 헌법 수호 기관임을 확고히 지켜주게 되었다.
(5). 판결이유에 대한 비판적 견해-삼권 분립 원칙
토마스 제퍼슨의 비판에 따르면, 문제된 법관 임명장이 아직 발송되지 않았기에 당시 보편법 Common Law 원칙에 따라 법률적 효력이 아직 생기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어 신임 대통령이 임명을 거부한 행위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재량권의 행사에 해당된다고 주장할 여지도 충분하였다. 미국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제퍼슨은 주프랑스 대사를 지냈고 프랑스혁명에 호의적인 생각을 가진 계몽주의자 변호사였다. 개념법학적인 태도가 강한 대륙법제에서는 근래까지도 행정부의 재량행위에 대해서는 사법심사를 부정하는 흐름이 강했다는 점을 참조하라.
무엇보다 사법심사가 국민주권의 원칙하에서 국민 대표인 의회에서 다수결로 입법한 법률을 폐기한다는 것은 다수결의 민주정치 원칙에 위반하는 결정이며, 사법심사가 행정부와 입법부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여 3권 분립의 원칙을 훼손시킬 위험이 있었다. 다시 말해 사법부의 영역은 국민의사의 대표인 의회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에 대해서 법해석과 법적용을 할 뿐 입법부의 권한을 심사할 수 없다고 주장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마샬 대법원장은 연방대법원에게 부여된 권한에 대한 헌법 해석을 하면서, 당시의 법원조직법 규정을 위헌 법률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연방대법원의 원심 재판권을 스스로 제어하였고 대신 사법부가 의회와 대통령이 통과시킨 법률에 대한 위헌 심사 권한을 가졌다는 사법 심사 제도를 확립하고 사법부 우위의 빛나는 전통을 정립해 나갈 수 있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러한 사법 심사 제도가 헌법 원칙으로 확립되기란 말처럼 결코 쉽지 않았다는 점은 당시의 정치적 딜레마 상황을 인식하면 수긍될 것이다. 신생 독립국 미 건국의 영웅들이 활동하던 당시는 정치적 대표 기관인 입법부의 권한이 매우 높았다. 대의제 민주주의 representative democracy 헌법을 제정한 건국 당시는 바로 “의회 주권 (의회우월주의 parliamentary sovereignty”원칙이 지배하고 있었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다수결 원칙 majoritarian legitimacy에 민주주의 정통성을 확보한다. 대의 민주주의에 의해 선출된 건국 영웅들은 정치적 토론과 합의에 기초하여 각종의 법률을 제정하였고 이러한 인간 이성의 발현과 성숙한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건국의 기초를 튼튼히 다져갔다. 건국 당시 “사법부는 비교할 것도 없이, 3부 중 가장 약한 부이었고”, “힘도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고 오로지 법률 판단만을 할 뿐이며, 심지어 자신의 판결을 실질적으로 집행하기 위해서는 행정부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만큼 그 기능상 가장 위험성이 없는 기관 the least dangerous branch”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3권분립의 이론을 주창한 몽테스키외는 그의 “법의 정신” (1748년)에서 “법관은 법의 문언을 발표하는 입에 다를 바 없으며, 법의 효력이나 엄정성을 변화시킬 수 없는 수동적인 존재”이라고 파악했다. 당시의 법원은 주어진 법률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집행하는 존재일 뿐 스스로 법을 창설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시 극심하게 대립된 당파적 정세를 고려하면 연방대법원이 연방의회가 제정하고 연방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서명하여 정식으로 법률 효력을 가진 법률에 대해 사법부가 최종적으로 다시 심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는 판결은 실로 담대한 결정이었다. 마샬 대법원장이 당시 딜레마에 처한 상황을 그의 판결문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는데 이는 크게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이 사건의 독특함, 이 사건은 전례가 없는 초유의 특이성, 그리고 여기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점을 해결해 내는 지난함 때문에 본 대법원의 판결문에 나타난 법원칙을 낱낱이 밝히고자 한다.”
정치적•법적 딜레마에 처한 상황 속에서 사법 심사 제도를 확립한 마샬 대법원장은 위대한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 길이 존경을 받고 있다. 그 표상은 연방대법원 빌딩에 새겨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법률가 18인의 조각상 가운데 마샬이 들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미국 연방 대법원 빌딩에 새겨진 세계 역사상 최고의 법률가 18인의
부조상 일부>[14]
(6). 판결 이유
연방대법원에서 변론 재판이 1803년 2월 11일에 열렸고 10여일 후인 1803년 2월 23일 대법관 전원일치 (6:0)의 판결이 내려졌다. 판결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정리된다.
미국 연방 헌법은 대통령이 상원의 자문과 동의를 거쳐 대사 공사 영사 그 밖의 모든 미국 관리들을 지명하고 임명하며 임명장을 부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행정부의 재량에 따라 임명되는 공무원이라면 법원의 사법심사의 개입이 불필요하지만 법관같이 법률에 의해서 정해진 직무가 있고 또 구체적인 임명 절차가 규정되어 있는 경우에는 법원이 그 그러한 권리의 존재 확인과 또 그 권리가 침해된 경우 법적 구제 절차를 명령할 권한이 있다.
마버리 소송은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마버리는 치안판사(JP) 임명장을 의회가 제정하고 대통령이 서명해서 효력을 발생한 법률에 따라 그의 자리는 5년간의 임기가 보장되기 때고 또 일단 정식 임명장이 발부된 후에는 임의대로 취소될 수 없는 법적으로 보호된다. 이러한 법적 요건에 대한 원고 마버리의 청구 기초 사실이 확인되는 바 원고의 소 제기는 충분히 법원의 사법심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대법원이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여기서 우선 해당 헌법 조항을 살펴 보자. 제 3 조 (사법부) 제 1 절. “미국의 사법권은 1개의 대법원 (one Supreme Court)에, 그리고 연방 의회가 필요시 제정하는 법률에 의해 설치되는 하급 법원에 속한다.” 제 2 절…제2항. “대사와 그 밖의 외교 사절 및 영사에 관계되는 사건과, 주가 당사자인 사건은 연방 대법원이 원심의 재판 관할권을 가진다. 그 밖의 모든 사건에서는 연방 의회가 정하는 예외의 경우를 두되, 연방 의회가 정하는 규정에 따라 법률 문제와 사실 문제에 관하여 상소심 재판 관할권을 가진다.”
헌법 조문의 문구를 그대로 적용 해석하면, 연방대법원이 대사 공사 영사와 관련되지 않는 소송에서 사실심리 원심 재판권을 보유하는 것은 헌법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연방 대법원은 헌법 명시 규정 이외의 “그외 정부 공무원에 관련”된 소송에는 항소심 재판권만 있을 뿐이고 사실심리 원심 재판권이 없다는 결론이며 따라서 대법원은 원고청구의 소를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은 있지만 집행 영장을 발부할 성격은 아니라고 결론을 지은 것이다.
(여기서 헌법 해석의 핵심 문제는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헌법상의 명시 규정에는 없는 사항인 정부 공무원의 재판권에 대한 내용이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는 명문 규정이 새로이 들어가 있는데 이러한 법률이 사법부의 최고 수장인 대법원의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고 또 그렇다면 대법원은 헌법이 법률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최상위법이라고 판단할 수 있으며 따라서 법률을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단할 권한이 대법원에 부여되어 있느냐의 여부에 있었다.)[15]
마버리 사건의 판결문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입법부의 권한은 규정되고 제한된다. 그리고 그러한 제한이 오해되거나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헌법을 성문헌법으로 제정해 놓은 것이다. …
법률 문언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사건이 원심 재판에 속하는 사건이라면 항소심 사건이 아닌 것이며, 만약 항소심 사건이라면 원심이 될 수 없는 것이다. …
항소심 재판의 핵심 요소는 원심 법원에 제기된 소송에 대해 파기 정정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새로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비록 정부 공무원에게 어떤 서류의 교부를 명령하는 집행 명령의 소를 법원에 제기할 수는 있다고 해도, 정부 공무원에게 어떤 서류의 교부를 법원 명령을 발부한다는 것은 사실상 원심의 명령을 인용한다는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것은 항소심 재판권에 해당되지 않고, 원심 재판 법원이 맡아야 할 사항인 것이다. …
따라서 법률에 의해 대법원이 정부 공무원에 대해 원심사실심리 재판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헌법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그러므로 주어진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더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 본안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항소심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
헌법은 헌법을 위반한 어떠한 입법행위도 통제한다는 것과,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 입법부가 일반 법률에 의하여 헌법을 개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해서 다툴 수 없는 간단한 명제이다. 이 두 가지 선택 사이에 중도란 있을 수가 없다. …
헌법이란 보통의 일반적인 수단으로는 고칠 수가 없는 최고, 최상위의 법이라고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일반 법률과 같이 입법부가
변경을 원할 경우 제정법률과 동일한 수준에서 변경 가능하다고 볼 것이다. 만약 앞 문장에서 전반부가 옳다면, 헌법에
위반하는 제정법률은 법 law이 아니다. 만약 앞 문장에서 후반부가 옳다면, 성문헌법은
무제한적인 권력을 제한하는 것을 국민에게 떠맡기는 어리석은 시도라고 본다. …
모든 성문 헌법의 제정자는 헌법이 국가의 근본법이자 최상위법을 형성하는 것으로 여겼을
것은 분명하다. 또한 논리적으로, 헌법에 위반한 입법부의 법률은 무효가 된다는 것은 헌법상 모든 정부의 기본 개념이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사법부의 영역이자 사법부의
의무는 무엇이 법인지를 선언하는 것이다.
…
(왜 헌법 수호의 책임이 법관에게 주어져 있는가?) 법관의 선서 내용을 보자. 법관은 다음과 선서한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이든 가진 사람들이든 똑같이 공평한 권리를 가지고 있기에 모든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사법 정의를 실천할 것이며 또한 미국 헌법과 법률에 마땅히 따라서 나의 모든 능력과 지식을 다해 나에게 주어진 모든 임무들을 끝까지 그리고 사심없이 완수할 것을 엄숙하게 선서합니다.”[16]…
만약 헌법이 정부에 대한 통제장치를 두고 있지 않다면 왜 법관은 미국 헌법에 따라서 그의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선서를 한다는 말인가? … 법관에게 다른 선서를 명하거나 또는 법관의 선서를 빼앗아가는 것은 똑같이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
헌법의 특별한 조문들은 모든 성문 헌법에 핵심적인 법원칙을 재확인하고 더욱 강화시키는데 바로 그것은 헌법에 위반하는 법률은 무효이며 또한 이 원칙은 정부 부처 뿐만 아니라 법원 역시 기속한다. 이러한 법원칙은 완전하게 적용되어야 한다.”[17]
3. 미국 공산당 불법금지 법률에 대한 헌법 재판
3.1. 미국 공산당 대 반정부활동통제위원회 사건 Communist Party of USA v SACB
(1). 사건 개요
Communist Party of the United States v. SACB 367 U.S. 1 (1961)
1960년 10월 11-12일 변론, 1961년 6월5일 판결
정당 해산이라는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판례법국가 미국에서 연방의회는 공산당을 해산시키는
것에 버금가는 효과를 가져오게 하는 특별법률들을 제정하고 정비하였다.[18] 1940년 스미드 법률에 이어서 1950년 한국전이 발발한
그해 8월에 국가안전법을 제정하고 공산주의자들의 반정부 활동을 조사하는 “반정부활동통제위원회(SACB)” 정부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1950년 ISA법률에 의해 공산활동단체에 해당되는 단체는 법무부에 등록을 하도록 강제했다. 등록명령을 위반한 단체에는 최고 10,000 달러의 벌금, 개인에는 최고 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었다. 만약 해당단체가 등록을 스스로 하지 않으면 법무부는 SACB위원회에 회부하여 이 정부위원회에서 청문회 조사 과정을 통해서 결정하고 등록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상원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는 5인의 위원으로 구성되는 SACB위원회의 결정에 불복하는 경우에는 연방항소법원에 사법심사를 제기할 수 있었다.
1950년 11월 법무부장관의 요청에 따라 SACB위원회는 미국공산당에 대한 조사 청문회 활동을 개시하였다. 활동은 51년 4월 23일부터 1952년 8월까지 1년 이상 계속되었다. 청문회는 다수의 증인들로부터 직접적인 증언을 들었고 방대한 분량의 문서 서류 증거들에 의존했다. SACB는 251 페이지에 달하는 결론 보고서를 작성하고 1953년 미국공산당CPUSA은 “공산주의 활동 단체”임을 확인하고서 법률에 따라 공산주의 활동 불법단체로 등록할 것을 명령내렸다. 이에 대해 공산당은 SACB의 결론을 부정하고 연방항소법원에 사법심사를 제기했다. 사법심사 제도는 정부가 내린 사실 발견과 확인 작업부터 완전히 새로이 내릴 수 있는 제도이다. 공산당은 항소법원에서 SACB의 결론에 영향을 미친 정부측 주요 증인들의 증언을 뒤집는 법정 소송을 진행했다. 공산당은 공산당을 불법단체로 확인한 국가안전법률(ISA)은 위헌법률임을 주장하였다. ISA법률이 통과된 후 11년 만인 1961년 6월 5일 연방대법원은 위헌성 여부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1)
법률 쟁점
l 미국공산당을 불법화하는 조항이 사법절차 없이 특정인을 처벌하는 것을 금지하는 헌법원칙을 위반하는지 여부
l 반정부활동통제법률상의 등록 조항이 언론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1조를 제약하여 위헌에 해당되는지 여부
l 당간부들에게 등록 의무를 부과한 규정이 수정헌법 제5조가 보호하는 진술거부권을 침해하는지 여부
l 맥카란 법률 조항들이 애매모호하고 불명확하여 위헌에 해당되는지 여부
l 법률에서 공산주의 활동 단체로써 미리 규정한 것은 헌법상 적법절차 요건을 위반하여 위헌에 해당되는지 여부
l SACB위원회의 공산당에 대한 편견이 심하여 헌법상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지 여부
(2) 판결 주문
a. 항소법원과 SACB위원회가, 공산당은 소련에 의해 “실질적으로 지시, 조종받고 또는 통제 받았다”는 결론을 내림에 있어서 법률 해석을 잘못 적용하였거나 또는 그러한 사실을 확인 결정하는 과정에서 잘못을 범하지 아니하였다.
b. 항소법원과 SACB위원회는, 미국공산당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기본적으로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림에 있어서 법률 해석을 잘못 적용하였거나 또는 그러한 사실을 확인 결정하는 과정에서 잘못을 범하지 아니하였다.
c. 등록 조항의 결과적인 효과에도 불구하고 등록 규정 그 자체가 사법절차 없이 특정인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을 금지하는 헌법원칙을 위반하는 조치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d. 공산주의 활동 단체의 간부와 구성원들의 주소와 성명, 인쇄 시설 등 법무부에 등록하도록 한 등록 조항의 위헌성 여부는 현재 시점에서 위헌성의 판단을 하기에는 아직 이르므로 연방대법원은 이 부분에서 판단을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e. 등록조항은 헌법상에 보장되는 언론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에 해당되지 않는다.
f. 공산당 간부들에게 등록과 또 등록시 서명하게 한 규정이 수정헌법 제5조 를 위반한 위헌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현재 소송 단계에서 제기되기에는 아직 이른 문제이므로 연방대법원의 이번 판결에서는 그 부분에 대한 법률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g. 1954년 법률은 수정헌법 제5조의 적법 절차 요건을 위반하지 않았다.
(3) 판결 이유-다수 의견 (프랑크프루터 대법관)[19]
1961년 판결문만 하여도 202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판결이유를 보면 실질적인 위헌성 판단 부분에 대해서는 결론을 회피하고 판결 이유의 많은 부분을 법기술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어 판결문 읽기는 지루하고 또 결론 도출의 법논리가 명쾌하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나타난다. 당시 법률 규정이 부분적으로 꽤 수정되어 온 법률 개정의 역사를 감안하면 즉 당시 법률이 정당 해산을 명령하는 수준은 아니었고 또 불이익의 박탈을 구체적으로 시도하는 수준이었으므로 법기술적인 측면에서 의회의 입법권을 정면으로 거부하기에는 쉽지 않는 상황이 존재했다. 법률 제정 직후부터 10년의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이 수많은 중간재판이 전개되어 온 재판 과정과 또 공산당 간부들이 관련된 형사 재판에서의 판결들을 함께 고려해야 미국 공산당 해산 심판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있으리라.
프랑크프루터 대법관의 다수의견을 부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SACB법률은 사법절차 없이 특정인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다. 이 법률은 특정 단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단체가 연관되어 있거나 연관되어 있지 않은 열거된 활동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입법부가 미리 규정한 대로 처벌을 하기 위해서 한 개인을 골라내는 것은 그 개인의 이름을 특정하거나 또는 행동-왜냐하면 이것은 과거의 행동에 해당되기에 특정인을 지정하는 것으로 작동될 수 밖에 없으므로-을 특정하든지 간에 그것은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 하지만 SACB법률은 그러한 부류의 법률이 아니다. 그 법률은. 어떤 단체가 특정 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지시, 지배, 통제하에 놓여 있고 또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운영되고 있음이 법률안이 공포된 이후에 발견된 경우 그 단체의 등록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
또한 그 법률은 법률에서 규제하고 있는 행동을 매우 특별하게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어서 확률적으로[20] 법률에서 규정한대로 속할 단체는 매우 적을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국민의 권리를 박탈하거나 소급입법처벌의 법률이 아니다. 의회는 행위가 여러 사람들이든 또는 한 사람만이 결부되어 있든지 간에 공공의 복리에 해악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를 단속하기 위해서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 법률의 시행으로 법률로 규제된 행동에 결부된 사람들이, 많던 적던 간에, 그들 자신들의 현재의 행동들을 나타낸 과정을 단순히 변경함으로써 규제를 회피할 수 있다면 권리 박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의회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관장하고 있는 외국의 영향력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지배하거나 통제되는 단체 그리고 필요하다면 무슨 수단을 쓰던지 간에 현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 일당 국가 독재 정권을 수립하려는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주로 움직이는 단체에 대해서 등록을 강제하고 또 당원 명부 등을 포함해서 정보 제출을 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은 수정헌법 1조상 금지된다는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공산당은 주장했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은 그러한 수정헌법 1조상 그러한 금지가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만약 금지된다고 한다면 SACB법률의 개정안과 또 민주주의의 실현을 보장하려는 법률의 큰 취지를 우습게 만들어 버릴 지 모른다. ….
등록 전까지 간여한 당간부나 당원들의 명단을
작성하게 한 조항은 현재의 당원과 당간부의 명부를 작성해야 할 의무를 회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타당한 수단에 해당된다. 단체가 당간부와 당원의 가명을 작성해야
할 등록 조항 또한 합헌이라는 것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재정 보고 의무 조항이나 단체나 단체의 소속원이 소유하거나 또는 통제하고
있는 모든 출판 인쇄소의 명부를 보고해야 할 조항 역시 수정헌법 1조가 보호하는 언론의 자유권을 침해한
것으로 볼 수 없다.
공산주의활동단체의 금융 거래와 이 단체가 관계하는 출판 매체의 실체를 공개해야 할 공개 의무는 법률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 필요하고 또 외국의 지배하에 있는 단체들이 단체의 성격, 본질, 연결고리에 대한 배경 정보를 올바르게 나타내어 일반이 그 단체들의 활동을 평가할 수 있도록 공개하도록 한 것으로 보았기에 의회가 부당하게 규정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
단체가 등록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에 지정된 직원이 등록 서류를 제출하게 한 조항에 대한 위헌성의 반론은 현재 소송 단계에서 제기하기에는 때이른 주장이라고 보여진다. 그러한 조항들에서 규정하고 있는 의무사항들은 당이 등록을 거부하기 이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그러한 조항들의 적용 여부는 전적으로 미래에 일어날지 모를 사항이고 추측 예단에 해당된다. ….
연방대법원은 SACB법률의 강제진술 규정이 법무부의 위임 명령과 진술서 양식에 나타난 바와 같이 진술거부권을 침해한다는 반론 또한 현재 시점에서 때이른 주장이라고 판단한다. 자신에게 불리한 형사상의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진술거부특권은 일반적으로 형사 사건에 관련되어 유죄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할 특정 개인이 행사하여야 할 특권인 것이다……진술을 하여야 할 당간부가 진술거부권을 행사할지 여부에 대해서 연방대법원으로서는 현재 시점에서 알 수 없는 사실이다…..
연방대법원은 이전의 판결에서 외국의 공산주의 독재정권에 의해 지시받고, 특별히 정해진 목표들을 가지고 있고, 전세계적인 공산주의자 단체를 매개로 하여 전 세계에 걸쳐 공산주의 국가 독재 정권을 수립하고자 하는 등 세계 공산주의 운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회가 확인한 것은 SACB위윈회가 재확인해야 할 사항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SACB법률은 적법절차를 위반한 조항이 없다고 판단한다……
법무부장관이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특정 단체에 대해서 등록 명령을 요청할 수 있는 조항이 법률에 의해 적절한 것인지 여부는 다음 기회에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
의회가’ 미국에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하고자 하는 개인들, ‘공산주의자 모임’, ‘공산주의자 운동’, 공산주의자 단체가 존재한다고 법률 조항에 선언한 내용이 헌법상 적법절차 원칙이 보장한 공산당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고 볼 수 없다. 문구를 엄밀히 따져보면, 의회의 사실 확인 내용은 SACB에 대한 특정 소송에서 있어서 그 결과를 강제하거나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문구들을 보면 미국내의 단 하나의 공산주의자 활동 단체가 존재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미국공산당을 특정한 것도 아니다.
공산주의자 통제 법률의 제2조 사실 확인이 공산당에게 선입견을 가한 위헌 조항이라고 판단되지 않는다. 이 법률들이 현재 이 소송의 당시 중간재판 단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되었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한없는 의무에 따라서 의회가 필요하다고 간주한 법률의 한 부분에 해당된다…….
공산당이 제기한 다른 헌법상의 쟁점들에 대해서 세심하게 판단해 본 결과 자세한 심리가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이 법률의 타당성 여부에 대한 판단을 불필요하다.
법률 제7조에 의해 법무부장관이 미국공산당을 공산주의자활동 단체로 등록할 것을 강제한 조항이 헌법상 금지되는 사항이 아니다. 연방 항소법원의 판결을 확정한다.”
(4) 판결 이유-소수 의견-블락 대법관 반대 의견
블랙 대법관은 국내안전법률은 위헌이라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의 반대 의견의 결론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내 판단으로는 미국의 국가 안전은 국민들에게 정부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주입하려고 시도하는 것 대신 국민들의 애정에 의존함으로써 보다 용이하게 보장될 것이다. 공산당은 미국에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소수 그룹에 불과하였다. 공산당의 당원수는 정부가 법률의 힘을 통해서 공산당을 파괴하려는 계획을 시도하기 이전부터 이미 줄어들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는 미국 국민들의 절대 다수는 공산당의 정책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과 또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공산당 후보들에게 보여준 태도에서 명백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위험한 사상으로부터 미국을 보호하는 참된 미국적인 방법이다. 물론 그러한 방법이 폭력적인 행위와 반역으로부터 미국을 보호하는 완전무결한 방법은 아니다. 미국을 건국한 헌법 기초자들은 미국 헌법에 우리들이 따르는 것이 보다 현명하다는 것을 구별 지어 놓았다. 그들은 정부에 현재 법을 위반한 명백한 행위들에 대해서 형사처벌을 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정부에게 부여하였지만, 국민들의 의견을 옹호하는 것에 불과한 것에 대해 국민들을 처벌할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부여하지 않았다.
결론을 내리면서 꼭 하고 싶은 말은 미국에서 미국인들의 관습과 사고에 전적으로 낯설은 이념으로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쓰일 지도 모를 공산주의자들과 또 그들에게 동정적인 사람들의 주장들이 그런 소수당을 불법화하는 법률(-이런 탄압 법률이 헌법상 타당한 지 여부를 따져보아야 하는)보다 미국의 국내 안보에 훨씬 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소수자들이 소수자를 탄압하는 법률의 위험성보다 위험이 크지 않는 이유는 공산당과 그 지지자들은 단지 정부 체제에 급격한 변화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안전을 해칠 수 있다는 근거에 의해서 위험한 사상을 가진 국민을 처벌하고자 하는 그런 유행을 타는 형사 정책은 안타깝게도 국가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곤경에 처한 세계 정세 속에서 국가가 직면하고 있는 훨씬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국민들의 힘과 생각을 쏟아 붇는 것을 막을 지도 모른다.
나의 의견으로는 항소법원의 결정을 파기하고 그래서 국민들이 자유와 정의를 진실로 보전하려는 민주 정부(지구상에 마지막 최선의 희망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정부 형태[21])에 언제나 충성을 다할 것임을 완전하게 믿고서 공산주의자들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미국 국민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옹호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5) 판결 이유-소수 의견- 다글라스 대법관 반대의견[22]
다글라스 대법관의 반대의견 가운데 결론 부분만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전제군주정을 옹호했던 토마스 홉스까지도 이러한 묵비권을 그의 “리바이어던 Leviathan”에서 다음과 같이 옹호했다. “무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할 목적의 무력도 행사해서는 안된다는 계약은 언제나 무효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어느 누구도 죽음, 상처, 투옥, 권리를 양도하는 것이 마지막 수단인 상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자신의 타고난 권리를 양도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면령의 보장 없이, 자신을 범죄를 스스로 고발해야 할 의무는 마찬가지 이유로 무효다. 왜냐하면 자신 스스로가 재판관인 곳 즉 자연 상태에서는 자기 자신을 고발할 이유가 없으며 계약 국가에서 고발은 처벌이 수반되는데, 이것은 무력으로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에 구속되지 않는다.”[23]
…..
공산당을 강제적으로 등록하게 할 수는 있다고 해도, 공산당을 대신해서 등록을 하는 당대표자나 직원인 사람 그 누구에게도 면책특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 진술서에 서명을 강제하거나 당간부와 당원의 명부 공개를 강제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지 모른다. 왜 강제 등록 법률이 제정되었는가? 그것은 의회가 (이전 또는 현재의) 꿩 먹고 알 먹기 식으로 불가능한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내 견해로는 의회가 외국에 지배 조종당하는 단체가 선전을 퍼트리고 선동 행위를 하거나 미국내에서 정치를 하는 경우 그 단체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해 완전 공개를 강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사처벌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거나 또는 진술하게끔 하는 법률 제정을 하고 그 법률에 따라 완전 공개를 강제하게는 할 수 없다는 것은 수정헌법 제5조가 금지하기 때문이다. 등록 서류를 제출한다는 것으로 증거를 제출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 등록은 당간부나 직원이 행정부나 입법부가 행하는 조사 과정에서 증언을 하는 것에 해당된다. 단체의 직원, 대표자, 당원을 범죄자로 결부시키는 강제적인 진술 증거에 해당하는 것이다. 무력과 강제력은 연방 법 집행 기관들에게 사용이 금지된 불법적인 수단이다. 강요된 자백이 금기시되는 이유는 적대적인 정권하에서 자유를 수호하려고 한 소수자 그룹이 당해온 오래된 역사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은 비록 멸시를 받을지 모르는 소수자 그룹 모두를 보호하고 있다. 위와 같은 이유들로 나는 다수의견에 반대한다.”
(6) 정당을 불법화한 법률의 위헌성 여부
1950년 8월 의회를 통과한 국가안전법률에 대해 트루만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했지만 이 법률은 의회에서 재의결되어 1950년 9월 23일 법률로 공포되었다.
ISA법률에 따라 만약 어떤 단체가 공산활동단체로 판정되면 이 단체는 법무부에 간부와 회원의 주소, 성명 등을 등록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공산당은 국가 안전법에 따라 공산당을 법무부에 등록할 경우 공산당이 정부 전복을 기도한 범죄단체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옴으로 이것은 형사사건에서 진술거부권을 보호하고 있는 수정헌법 제5조에 위반되는 위헌법률임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은 5대4의 다수의견으로 헌법위반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 법률 자체가 위헌은 아니라고 했지만 연방대법원은 개별구체적 사건들의 판결에서 이 법률의 효과를 부정하게 됨으로써 SACB위원회는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1972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공산당을 불법단체화하려는 법률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미국과 소련의 냉전 대결의 과정으로써 역사적인 조망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3.2. 1956년 대법원의 파기 환송 판결 Communist Party of the United States v. SACB
사실 개요
Communist Party of the United States v. Subversive Activities Control Board 351
US 115 (1956)
1956년 5월30일 판결
1950년 맥카란 법률에 의해 공산활동단체에 해당되는 단체는 법무부에 등록을 하도록 강제했다. 등록명령을 위반한 단체에는 최고 10,000 달러의 벌금, 개인에는 최고 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었다. 만약 해당단체가 등록을 스스로 하지 않으면 법무부는 SACB위원회에 회부하여 이 정부위원회에서 청문회 조사 과정을 통해서 결정하고 등록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상원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는 5인의 위원으로 구성되는 SACB위원회의 결정에 불복하는 경우에는
연방항소법원에 사법심사를 제기할 수 있었다.
1950년 11월 법무부장관의 요청에 따라 SACB위원회는 미국공산당조사 청문회 활동을 개시하였다. 활동은 51년 4월 23일부터 1952년 8월까지 1년 이상 계속되었다. 청문회는 다수의 증인들로부터 직접적인 증언을 들었고 방대한 분량의 문서 서류 증거들에 의존했다. SACB는 251 페이지에 달하는 결론 보고서를 작성하고 공산당을 법률에 따라 공산주의 활동단체로 등록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대해 공산당은 SACB의 결론을 부정하고 연방항소법원에 사법심사를 제기했다.
사법심사 제도는 정부가 내린 사실 발견과 확인 작업부터 완전히 새로이 내릴 수 있는 제도이다. 따라서 공산당은 항소법원에서 SACB의 결론에 영향을 미친 정부측 주요 증인들의 증언을 뒤집는 법정 소송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측 주요 증인들의 위증이 들어났고, 공산당을 공산당활동단체로 결론내린 SACB의 절차에 법적 하자가 많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항소법원은 SACB의 결정을 그대로 인용하였고 맥카란 법률은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해 공산당은 항소법원의 결정을 파기 환송해 달라고 연방대법원에서 상고를 하였다.
여기서 법적 쟁점은 반정부정부활동통제법률의 합헌성 여부, SACB위원회가 사실 확인을 내리는데 있어서 새로운 법정증거들을 고려해야 되는지 여부이었다.
연방대법원은 증인들의 위증은 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6대3의 다수 의견으로 파기환송의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의 판결 이유문의 주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판결 이유- 다수 의견[24]
“위증을 했다는 주장이 명백하게 받아들여진 세 증인들의 증언이 위원회가 넘어야 할 쟁점들과 관련하여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림에 있어서 다른 법적 쟁점들을 암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증거는 서류상의 증거들로 이루어졌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증인의 증언은 중요할 뿐만 아니라 서류상 증거들은 또한 공산당 활동에 연결되어 있고 또 증언을 통한 위원회의 궁극적인 사실 확인에도 관련되어 있으며, 또 그러한 증언에는 세 증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법률에서 정한 여덟 가지 기준에 따라 사실 확인을 한 것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고 또 직접적인 인용을 하지 않는 곳에서도 세 증인들에 의해 증거가 위원회의 사실 확인 작업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다고 간주할 수 없다. …
이 법정 소송은 의회가 ‘미국의 안전을 위해서 필요하고 자유 미국의 법제도를 지키기 위해서’ 제정한 법률에 근거한 것이다. 완전무결하게 사법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사법제도의 가장 소중한 부분임은 분명하다. ….사법 원칙의 준수는 미국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다. 연방대법원은 모든 연방 법원의 소송에 대해서 감독 기능을 행사하고 있다. 따라서 사법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대법원은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데 그것은 공정한 재판이 명백하게 구현되도록 하는 것으로써 공정한 재판 원칙을 배척하는 주장은 극히 비이성적이거나 무모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 위증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위원회가 결론을 내릴 때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법정 소송 절차 과정에서 새로이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법률에 따라 그런 새로운 증거들을 위원회가 다시 고려하여야 한다는 공산당의 주장을 대법원은 받아들인다.
SACB위원회로 다시 환송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쟁점은 작은 범위의 문제이고 SACB위원회는 공산당의 요구를 대해 큰 폭의 재량권을 가지고 있다. 파기 환송하는 목적은 위원회가 하자 없는 증거에 입각하여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러한 점에서 위원회는 공산당이 주장하는 진실에 대해 청문회를 통해서 확인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세 증인들의 증언이 위증으로 밝혀지는 경우 그러한 증언은 증거로 채택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공산당의 주장들을 진실하다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고 또 별도의 추가 청문회 없이 위증은 증거에서 삭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어떤 경우이든 위원회는 애매모호하다는 주장을 깨끗이 해명하고 완전한 증거에 입각하여 원래의 결정을 재고하여야 할 것이다.”
4. 정치적 기본권-데니스 판결 이후 새로운 기준을 확립한 판례
데니스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명백한 위험의 존재 the clear-and-present-danger” 원칙기준에 대해 위험의 존재에 대한 개연성이 있는 경우 “위험의 중대성 gravity”의 요건을 갖추면 그 기준을 충족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내란 음모에 대한 “명백한 위험의 존재” 기준은 정부 전복의 “위협 threat”이 “급박하다 imminent”거나 또는 정부 전복 기도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 이를 입증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위험의 급박성이나 또는 정부 전복에 대한 성공가능성의 문제를 따지지 않게 됨으로써 정부가 전복될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매우 낮은 경우일지라도 정부가 그러한 위협이 중대하다고 보는 한 헌법상 보호받는 언론 자유에 대해서도 제한을 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국가 안전의 문제는 현 정부가 무너질 위험이 확률적으로 거의 없는 경우일지라도 정부는 언제나 가장 중대한 문제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남용할 위험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25] 1951년 데니스 판결은 1957년 예이츠 판결을 걸쳐 1969년 브랜든버그 판결에서 파기되었다.[26]
4.1. 1957년 예이츠 판결
1951년 연방정부는 14명의 공산당 중간간부들을 스미드 법률 위반으로 기소하였다. 이들은 연방1심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연방대법원에 상고하였다. 1957년 6월 17일 연방대법원은 파기 환송의 판결을 내렸다. 1945년 결성된 공산당 the Communist Party에 대해서 1951년에야 검찰이 기소한 것은 3년 기소 시한을 이미 넘겼으므로 이 시효를 고려하지 않는 1심 판결은 잘못되었다고 연방대법원은 판단하였다.
예이츠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폭력으로 정부 전복을 선동 옹호하는 것에 대해 형사 처벌하는 법률 규정은 정부 전복 목적을 부추기는 “추상적인 원리 abstract principle”에 그치는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는 불법적 행위의 옹호나 선동에 대해 형사처벌을 규정한 스미드 법률을 합헌이라고 인정한 1951년의 데니스 판례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로써 예이츠 판결에 따라 스미드 법률의 적용은 제약이 따르게 되었다. 데니스 판결에서는 폭력적인 정부 전복을 선동하고 옹호하는 행위가 “명백한 위험의 존재” 기준을 충족하는 경우 형사 처벌될 수 있다고 판결했었다.
4.2. 1969년 브랜든버그 판결
1969년 브랜든버그 판결에서 폭력적 정부 전복을 선동하는 것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불법적 행동을 선동하는 행위가 고의를 가졌고 또 그 행위의 발생이 급박한 것이어야 하는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즉 “급박한 불법적 행동을 선동하기 위한 고의 intent to incite imminent lawless action” 기준을 확인하고, 데니스 판결을 파기하였다. 브랜든버그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폭력 선동에 대한 "단순한 옹호 mere advocacy"에 대해서는 형사 처벌할 수 없는데 단순 옹호는 수정헌법 1조가 보호하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판시했다.
“법률 규정이 문언 그대로 따져보면 단순한 옹호 발언도 처벌된다고 하거나 또 단순히 옹호하기 위하여 타인과 함께 집회를 여는 것에 대해서 형사 처벌의 위협을 가해 금지하는 경우 그러한 법률규정은 언론 자유와 적법절차 헌법 조항을 위반하여 위헌무효가 된다. 정치적 표현과 언론의 자유는 헌법상 보호되므로 폭력 또는 불법의 사용을 옹호하는 것을 정부가 나서서 금지하는 것은 헌법상 허용될 수 없다. 다만 그러한 옹호가 급박한 무정부상태를 초래하는 행동을 불러오거나 선동하는 것을 옹호할 때 또는 그러한 행동을 즉시 선동할 것 같거나 또는 불러올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27]
연방대법원은 폭력적인 정부 전복을 선동하고 옹호하는 것에 대해 형사 처벌할 수 있는 경우 ① 급박한 위험 ② 불법적 행동이 일어날 개연성 ③ 불법적 행동을 일으키고자 한 의도 이러한 3가지의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연방대법원의 이러한 기준에 따라, 극히 소수에 불과한 절대적인 정치적 소수자에 의해서 정부가 전복될 위험의 개연성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을 것이고 또 그러한 위험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선동 또는 옹호자가 그러한 불법 행동을 일으킬 의사가 없는 이상 형사처벌되기는 어렵게 된 것이다.
“급박한 불법적 행위”를 선동하거나 옹호하는 행위를 형사처벌하는 법률 규정을 제정할 수 있는 있겠지만, 예컨대 폭력적인 정부 타도를 외치더라도 그것이 추상적인 원칙을 말한 정도라면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또 정부 전복의 현실적 위험이 존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선동 옹호의 행위가 정부를 비판하는 성격에 머문다면 헌법상 보호받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에 해당되어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브랜든버그 판결에 대한 보다 설명을 참조하라.[28]
5. 호주 대법원 CPA 헌법 재판 케이스
5.1. CPA 케이스 역사적 의의와 전개 과정
1. 호주 공산당 해산 법률 위헌 무효 판결의 역사적 의의
호주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한 호주 연방 대법원[29]의 위헌 무효 판결 케이스[30]는 가장 대표적인 헌법재판 사례중의 하나로써 법적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큰 의의를 가진 사건이다. 로스쿨의 헌법 과목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도 언급되는 유명한 케이스이다. 호주 헌법학의 권위자 원터톤은 공산당 해산 법률 위헌무효 판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31]
“호주연방대법원이 1950년의 공산당 해산 법률을 위헌무효로 판결한 사건은 호주 헌법 체제상 가장 영광스런 승리의 역사 중의 하나에 해당한다. 1950년 공산당 해산 법률은 공산당과 그 연관조직들을 불법 단체화하고 또 위험하고 잠재적인 위험성이 있는 공산주의자라고 정부에 의해 판명된 사람들의 국민 기본권을 제약시키려는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다시 말해 그 법률은 모든 국민들의 기본권을 제약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잠재했었다. 대법원의 판결은 법의 지배 원칙을 공고하게 굳힌 영광스런 승리이었고, 정부가 이에 반발하여 정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헌법을 개정하려고 실시한 국민투표가 부결된 결과를 가져왔다. 국민투표의 부결은 한국 전쟁이 부채질한 반공주의 집단 히스테리가 휩쓸던 당시 상황에서 매우 놀라울 정도로 의외의 결과이었다. 비록 국민투표 부결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오랜 영향을 주고 있긴 하지만,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한 위헌 무효의 판결은 생생히 살아 있고 또 기본적 법원칙을 확인해주는 사례로써 현재도 1951년만큼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다. 모든 위대한 헌법 판례들이 그러하듯이, 공산당 해산 위헌무효 판결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32][33]
2. 급박한 공산주의 팽창에 대한 자유 세계의 공포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출간된 1848년 이후 근 1백년 동안 끊임없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이념은 전세계로 날로 확대되어 갔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자유 진영 미국과 공산 진영 소련 사이의 냉전 Cold War 기류는 날로 깊어갔다. 1946년 영국의 처칠 수상은 소련의 위협을 경고한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34]을 하였고, 1945년 소련의 독일 분담 점령 이후 1949년 10월7일 동독에서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1949년 10월 1일 중국에선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하고 공산당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인해서 자유 세계의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공포는 현실적으로 크게 느껴졌다. 자유 진영의 종주국 미국과 영국이 느끼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감은 호주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호주와 미국은 언어와 법률 제도 문화를 비롯하여 민족성이 같은 앵글로 색슨족에 뿌리를 함께 할뿐만 아니라 유럽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이민국가라는 점에서 외부 침입세력에 민감한 태도를 나타낸다는 사실들을 공유하고 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이들 5개 국가들[35]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협정을 맺고 있어 외부 간첩 대처 등 국가적 차원에서의 정보 교류는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들 앵글로 색슨족 국가들에서 반공주의 정치 사회적인 흐름이 동시에 전개되는 이유에 대해서 특별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 카톨릭 단체가 출간한 반공주의 책자들을 그대로 모방한 책자들이 호주에서도 널리 유통되었다. (아래 그림 참조).
1950년 2월 9일 미국의 매카시 상원의원이 미국 국무부내에 공산주의 간첩이 존재하고 이들을 색출해야 된다고 주장하며 반공주의 매카시즘 물결을 주도하여 갔다. 소련은 독일의 히틀러 나찌 정권에 맞서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급격히 부상할 수 있었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였고, 1949년 10월 1일 모택동 주도의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하고 공산당 정권을 수립하였고,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지원을 업은 북한의 남침에 의한 한국 전쟁이 터졌다. 1950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였다.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북베트남에서 수립된 공산정권은 베트남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1954년 제네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인접국의 공산 정권의 수립으로 인해서 공산주의 “도미노 효과”[36]의 공포가 호주 뉴질랜드에게 느껴졌다. 당시의 급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외부 호주 또한 공산주의 세력에 넘어가게 될 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표현해 준 한 주간지의 만평 (1954.7.21일)을 참조하라.
3. 호주 공산당 해산 법률 The Communist Party Dissolution Act 1950년 제정 과정
공산당 해산을 총선 공약으로 제시함
호주 공산당의 당원 수는 2차 대전 중 한 때 최고 20,000여명에 이르렀고, 공산당은1944년 퀸즈랜드주의 주의원 한 명을 배출하였다.[37] 2차 대전 종전 후 공산당 당원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호주의 인구 구성상 노동자 비율이 높아 노조의 활동이 활발했고 특히 그 가운데 부두 항만, 광산, 철도 노동조합 등 강경파세력의 지도부에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1948년 당시의 정부는 사회주의 노선의 노동당 정권이었다. 노동당 정부는 1947년 은행의 국유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이 은행 국유화 법률은 연방대법원의 위헌 무효 판결을 받고 은행국유화가 무산되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이 1949년 광산 파업 사태를 주도하였고 이러한 파업 사태에서 정부는 급기야 전기 생산을 위해서 군대 병력을 동원하고서야 파업 사태를 진정시켰다. 이러한 어수선한 정국이 전개된 가운데 1949년 12월 10일 실시된 총선에서 보수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보수연립정권은 총선 공약으로 공산당 해산을 내세웠고 반공주의 캠페인을 주도하였다.[38] 보수당 당수의 정강 장책 연설에서 반공주의 선거 캠페인의 내용이 잘 드러났다.
<1949년 12월 9일 총선 하루 전 멜버른 헤럴드 일간지 사설>
1949년 11월 10일 당시 야당이었던 보수당의 당수 멘지 Menzies 의원의 총선 공약 연설 중 공산주의 불법화 공약에 관한 부분 번역은 다음과 같다:
“[보수당이 집권하면]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금지하겠습니다. 공산주의를 합법적인 정치 이론으로 취급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큰 관용을 베풀어 왔습니다. 우리들은 자유를 양보하였지만 돌아온 것은 정당한 이유 없이 일어난 일련의 심각한 경제계의 혼란들이었습니다. … 현 정부 여당은 공산주의자들을 정부 위원회에 임명했습니다. 정부는 최근의 탄광 파업 사태에 대해 뜨거운 여론이 들고 일어나선 후에야 개입하려는 것에서 또다시 이러한 줏대 없는 무용한 짓을 보여주었습니다. … 공산주의자들은 종교, 선량한 정부, 법과 질서를 극도로 기만하는 우리의 적입니다. 외부의 적인 침략자 소련 제국주의의 위협이 없다면 오늘날 진정한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호주에서 공산주의는 낯선 외계인이고 파괴적인 해충입니다. 저희 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게 되면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금지하겠습니다. 공산당은 내란선동적이고 불법적인 조직으로 판명되어 해산될 것입니다. 파산관재인이 파견되어 공산당의 자산을 처분할 것입니다. 항소할 수 있는 권리는 주겠지만, 검찰총장은 다른 단체들도 유사 공산주의자 단체로 판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것이며 공산당이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면 이들 새로운 단체 또한 금지할 것입니다. 이제 공산당의 당원은 단 한 명도 정부에 취직할 수 없으며 고용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합법적인 노동 단체에도 취업할 수 없도록 취업 자격조건을 새로이 정하겠습니다. 내란죄나 내란 선동 행위에 관한 법률들을 재정비할 것이며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그러한 법률에 따라 유죄를 받게 되면 정부나 노동 단체에 취업하는 것이 금지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법률들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과 우리 같은 선량하고 양순한 국민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는 곳에서는 어중간한 미봉책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국민이 이길 것입니다.”[39]
보수당 정권은 총선에서 승리한 즉시 총선 공약으로 내세운 공산당 해산 계획에 따라 1950년 4월 27일 공산당 해산 법률안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법안은 의회의 토론 과정을 거쳐, 1950년 10월 19일 상하원 의회를 통과하였다.[40] 공산당 해산 법안은 의회를 통과한 지 하루 만에 총독의 서명을 받고 다음 날인 10월 20일에 즉시 발효되었다.
4. 공산주의자에 대한 정부의 태도-형법상 내란 선동죄로 형사 처벌
적국과 전쟁을 치르는 전쟁 중에서 이민국가들의 문제는 적국 출신의 이민자들이 모국에 대한 협조자가 될 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2차 대전 중에 미국은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일본 이민자들에게 강제 소개령을 발동하였던 사례[41]와 마찬가지로 호주는 공산주의자들을 가상적국인 소련에 대한 동조자라고 여기고 이들을 별도 격리 수용할 방안까지 마련하였다. 소련의 공산 혁명 정권 성공과 미소간의 냉전 기류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국가 충성에 대한 의심은 커졌는데 이들에 대한 경계심을 확인하는 질문은 만약 소련과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소련에 동조할 것인지를 확인하는 가상적인 내용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의 영향력에 의해 지배받고 있기 때문에 만약 전쟁이 일어날 경우 소련에 가담하지 않겠느냐는 의심과 경계심이 공산주의자들을 공격하는 정치 사회의 분위기이었다.
4.1. 번즈 케이스 Burns v Ransley
1949년 6월 14-15일 변론, 1949년 10월 7일 판결[42]
공산당 당원 번즈 Burns는 1948년 9월 15일 보수당과 재향군인회가 마련한 공개 토론회에 초대되었다. 토론 주제는 “공산주의는 개인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이었다. 토론회가 끝나고 질의 응답 시간에서 방청객 한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 “공산 소련과 서구 자유 세계 사이에 곧 3차 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를 현재 상황이라고 여깁니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공산당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겠습니까?” 이에 대해 번즈는 “만약 호주가 그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면 공산 소련과 미국과 영국의 제국주의 사이일 것입니다. 그것은 반혁명적인 전쟁이 되겠지요.”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질문자는 “그것은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닙니다. 직접적인 답변을 주세요!”라고 다그쳤다. 이에 대한 번즈의 답변은 이러했다: “좋습니다. 우리들은 그 전쟁에 반대합니다. 우리들은 소련 편에서 싸우겠습니다. 그게 직접적인 답변입니다.”[43]
번즈의 “소련 편에서 싸우겠다 fight on the side of Soviet Union”는 발언을 문제 삼아 번즈는 형법상의 내란 선동죄로 기소되었다. 번즈는 판사 앞에서 약식 재판을 받고 6개월의 징역형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번즈는 이에 대해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대법원은 2-2의 팽팽한 의견으로 나뉜 가운데 대법원장의 결정의견으로 번즈의 유죄를 확정했다.
4.2. 공산당 사무총장 내란 선동죄로 형사 처벌
1949년 8월 15-16일 변론, 1949년 10월 7일 판결[44]
1949년 공산당 사무총장 샤키 Sharkey는 내란 선동죄로 형사 처벌을 받았디. 샤키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았다.
1949년 유럽의 공산주의자 지도부는 공산 소련군이 침략자를 추격하기 위해서 자기 나라들에 들어오면 공동의 적에 저항하기 위해서 국내 노동자 계층이 소련군에 가담할 것이라는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1949년 3월 3일 시드니 최대 일간지 기자가 공산당 사무총장이었던 샤키에게 전화를 걸러 이에 대한 공산당의 입장을 물었다. 사키는 즉답을 회피하고 좀더 생각을 정리해서 다음날 답변을 주었다. 그의 인터뷰 답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소련군이 침략자들을 추격하기 위해서 호주 땅에 들어온다면, 호주 노동자들은 소련군을 환영할 것입니다. 붉은 군대가 나찌 정권하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켰을 때 전유럽의 노동자들이 그러했듯이 호주 노동자들도 침략자를 추격하는 소련군을 환영할 것입니다. 저는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의 발언에 지지를 보냅니다. 소련 군이 호주를 침략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고 또 상상으로나 가능한 문제라고 여깁니다. 저는 소련이 전쟁에 돌입하는 경우란 오로지 소련이 공격당했을 때에나 가능하다고 믿고 있으며 또한 만약 소련이 공격을 당했을 때라도 호주가 소련군에 의해 침략을 받을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는 전쟁을 막아내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고 또 전쟁 이념에 반대하여 국민 대중을 일깨우는 일입니다. 공산당은 또한 노동자 계급이 정권을 잡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만, 만약 호주의 파쇼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이 정권을 잡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무력을 쓴다고 하면,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무력에는 무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을 권고할 것입니다.”[45]
하지만 문제의 선동발언이라는 것은 일반인들의 눈높이에서도 형사처벌이 될만한 수준이 아니었고 또 비판 발언의 범주내에 해당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검찰은 “만약 소련군이 침략자들을 추격하기 위해서 호주 땅에 들어온다면, 호주 노동자들은 소련군을 환영할 것”[46]이라는 공산당 사무총장 사키의 1949년 3월 4일 인터뷰 발언에 대해서 1949년 5월 30일 내란 선동죄로 기소하였다. 샤키는 7월 20일 배심원 재판을 받고 배심원의 유죄 평결로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해 샤키는 대법원까지 상고하였지만 대법원은 5-1 다수의견으로 상고를 기각했다.
번즈와 샤키의 내란선동죄 사건에서 반대의견을 낸 딕슨 대법관과 맥티에르난 대법관의 소수의견이 보다 설득력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 사건들에서 내란선동에 대한 의도 seditious intention가 완전히 입증되었다고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47] 딕슨 대법관의 판단 이유 구절을 인용한다.
“본 상고심에서의 법적 쟁점은 국가 주권의 문제나 헌법상 정부의 권한 범위내의 문제인지 여부가 아니라 공산주의자인 피고인[48] 또는 공산당이 소련과의 전쟁 시에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의 문제라는 것은 분명하다. 피고인은 자신의 첫 번째 답변에서 분명하게 말하기를 자신은 그러한 전쟁을 비판하고 또 공산당도 그 전쟁을 반대한다고 표명했다. 이런 발언으로 피고인이 청중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 자신의 노력에 포함된 어떤 의도를 전달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피고인은 자진해서 의견표명을 한 것도 아니었다. 청중들의 국가나 정부에 대한 태도는 피고인의 고려 대상에 들어있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질문이 재차 반복해서 주어지고 또 기준별 답변[49]의 상황에서 전달된 피고인의 대답과 매너는 스스럼 없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낸 결의를 나타낸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소련과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공산당이 어떤 과정을 택할지에 대한 자신의 확신 이외에 방청객을 설득하고자 하는 어떤 의도가 존재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피고인의 답변은 질문자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방청객에게 마음의 태도를 바꾸게 하려는 목적을 이루고자 한 적극적인 시도가 아니었다. 단지 답변을 함으로써 소련과의 전쟁이 일어날지 모를 우발적 상황에서 어느 쪽을 택할 지에 대해서 의견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그의 의견에 영향을 받을 지도 모를 사람들의 국가나 정부에 대한 태도는 다만 간접적으로나 결과적으로 관계될 뿐이고 또 그런 추정을 피고인으로 탓으로 돌릴만한 직접적이고 중대한 목적 내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딜레마에 빠진 가정적인 상황에 따라 말을 한 것이었다. 피고인은 국가 기관과의 밀착 또는 불화를 주제로 직접 연설을 한 것이 아니었다. 질문 또는 답변의 의도에서 정부나 헌법에 대한 적대감, 대립감, 불만은 나타나지 않았다.”[50]
딕슨 대법관은 국가의 안녕, 질서 또는 선량한 정부를 위험에 빠트리게 하기 위해서 국민의 각기 다른 계층 간에 반감과 적대감을 조장하는 말을 꺼냈다는 발언을 근거로 내란선동죄로 처벌하려면 형사법상의 기본 원칙인 범죄의 고의가 보통 일반인들의 기준에서 분명하게 입증되어야 하는데 피고인의 해당 발언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한 과정에서 나온 말로써 내란 선동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어떤 적극적인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51]
5. 공산주의의 위협 정도와 공산당 해산법의 제정 의도
멘지 수상은 공산당 해산 법률의 정당성으로써 공산주의로부터의 위협을 들었다.[52] 그는 위험의 증거들로써 스탈린 저서 “레닌주의의 기초”, 공산당의 팜플렛 등을 거론했다. 정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 수립”, “부르죠아 타도”, “폭력적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룩한다”등의 공산당 혁명 이론을 거론하였는데 이러한 정부의 전략은 공산주의 혁명 이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다수의 국민들에게 먹혀 들었다. 정부는 국민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엎고 공산당 강제 해산 법률안을 밀고 나갈 수 있었다.[53]
1950년 4월 27일 멘지 수상은 법률안 제안 설명에서 호주 노동 조합 단체 지도부에 53명의 공산주의자가 침투해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의 매카시즘 (약2개월 전인 1950년 2월 9일 미국의 매카시 상원의원이 미국 국무부내에 205명의 공산주의자 간첩이 침투해 있다고 주장하였다) 행태를 모방해 나갔다. 국민들은 전기전력 생산에 필수적인 탄광 노조의 강경 파업 사태 등으로 큰 불편을 겪었으며 또 다수의 국민들은 극단적인 공산주의 혁명 이론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공산당 강제 해산 법률안에 찬성하는 여론은 갤럽 여론 조사에서 80%까지 높이 나왔다.
<“코너에 몰린” 쥐(공산주의자). “반공주의 Anti-Red 법률안”이라는 몽둥이로 소련 공산주의 정권을 상징하는 공산주의 심벌 낫과 망치가 그려진 쥐를 코너로 몰아넣는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뷸리턴 게재 만평 1950.5.3.>
6. 공산당 해산 법률 제안 설명 멘지 수상의 연설[54]
“지난 총선 (1949.12.10)에서 전체 유권자 중에 적은 수인 총 87,958명이 공산당을 지지하였습니다.[55]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의 중요성은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한 줌 밖에 되지 않는다고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는 경제 산업체의 주요 단체들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엄중하지만 명료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또 그들이 가장 분명하게 의도하는 바대로 그저 소수의 반역자들이 우리 나라를 파괴하는 것을 내버려둘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노조 집행부인 이상 그들의 일을 자유롭게 하도록 놔두다가 그들이 다른 지위를 가질 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바로 이것이 선택에 대한 답이겠지요-공산주의자들을 모조리 찾아내서 그들과 싸우고 그들에게 어떠한 특권도 어떠한 성역도 누릴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호주의 안보와 국토방위는 전쟁 시에 군대의 힘과 또 군을 지원하는 공장과 농장의 산업체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전쟁이 일어날 때 전국민적인 노력을 모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주요 산업체들이 그치지 않고 잘 돌아가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제5중대 가 기적같이 갑작스레 솟아난다는 것은 유치한 생각입니다. 제5중대는 매우 잘 준비되고 미리 조직되어 있습니다. 파업과 태업을 통하여 그들은 그들 자신의 냉전을 전개하는데 그 전쟁의 승패는 국가사회 전체가 작동하는 강함 또는 약함에 달려 있습니다. 2차 대전 중(1939-1945년)에 호주에서는 한 사람의 제5중대도 발붙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현재 서유럽에서는 방어되고 있는 전투적 공산주의가 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혁명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동유럽과 남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시점인 1950년에 한 사람의 내부의 적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합니다. 광산, 철강, 기술자, 교통, 건축, 전기 산업은 주요 기간 산업체입니다. 이 법률에 따라 필요하다면 총독이 공표하는 대로 다른 산업체들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적은 소수의 그들이지만 5개 군단의 힘으로도 결코 이룰 수 없는 극심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를 혁명전사 공산주의자들을 기간 산업체의 핵심 지위에 계속 내버려두는 것은 형법상 죄악에 해당된다고 호주 정부는 신중하게 판단합니다.”[56]
7. 공산당 해산 법률안에 대한 야당의 반응
1950년 당시 미국에서 맥카시 상원의원의 공산주의자 색출 발언이 터져 나온 시기에 영국과 호주에서도 그와 마찬가지의 반공산주의 정국이 전개되었다. 종전 후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감이 컸던 세계 정세 속에서 호주의 공산당 해산 법률안은 여론의 지지를 크게 받고 있었다. 해산 법률안이 1950년 4월 27일 의회에 정식 회부되자 야당인 노동당은 법률안 통과에 반대 입장을 보였다. 1950년 5월23일 야당 노동당 대표의 반대 발언은 다음과 같았다.
“공산당 해산 법률은 정치인들과 그와 같은 부류 그리고 언론에 의해 형성된 전국적인 히스테리 분위기 속에서 제정된 것 같다. … 이에 결부된 히스테리와 두려움 콤플렉스는 국민들에게 행해질 중대한 사법정의의 위축을 초래할 지 모른다. 군중은 중대한 실수를 범할 수 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투표를 던진 군중들이었다.”[57]
하지만 공산당 해산 법률은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엎고 있었으므로 야당의 반발은 법률안 통과 저지라기 보다는 법률안 수정안정도에 머물었다. 누군가 공산주의자로 거짓 신고한 것만으로도 공산주의자의 혐의를 받을 수 있고 또 그 혐의를 벗어내려면 자기 스스로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반대로 입증해야 된다는 법률의 국민 기본권 침해를 우려하였던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 침해 부분만을 약간 손질한 야당의 수정안이 야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원을 통과하였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이러한 노동당 수정안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1950년 6월 23일 법률안은 일단 잠정 보류되었다. 야당 노동당은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 틈을 노리고 정부는 정부여당의 원안을 고수하였다. 정부여당은 9월 28일 공산당 해산 법률안을 의회에 재회부하였고 곧이어 상하원 동시 해산안을 들고 야당을 압박하였다. 국민 여론은 정부 여당을 크게 지지하고 있는 정치적 상황에서 상하 양원을 동시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겠다는 정부 여당의 정치적 책략은 야당에게 크게 불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1950년 10월 16일 노동당 최고 집행부가 들어서서 소속 의원들에게 정부여당의 원안대로 법률을 통과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마련하였다.[58] 이리하며 노동당의 수정안은 폐기되고 공산당 해산 법률은 정부여당의 원안대로 10월 19일 의회를 통과하였다. 법률안이 의회를 통과하자 마자 바로 다음날인 10월 20일 총독의 법률안 서명으로 공산당 해산 법률은 즉시 정식으로 발효되였다.
8. 공산당 해산 법률-The Australian Communist Party Dissolution Act 1950 (Cth)
공산당 해산 법률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공산당은 불법단체로 판명되고 따라서 강제 해산되며 공산당의 재산은 보상없이 강제 몰수한다. (2) 공산당 관련 단체(노동 조합 등)에 대한 불법 단체 판명 권한은 총독에게 위임한다. 이들이 국가의 안전과 방위에 위협을 준다고 총독이 판정하면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강제 해산되고 재산은 몰수된다. (3) 총독의 권한으로 국가의 안전과 방위에 위협이 주는 사람은 공산주의자임을 판정할 수 있고, 이들은 정부 기관이나 노조단체 등에 취업이 금지된다.
이러한 내용의 호주의 공산당 해산 법률은 미국의 1946년 스미드 법률, 남아공화국의 1950년 공산주의 진압 법률, 호주의 1916년 불법 단체 법률 등을 기초로 해서 제정되었다. 하지만 법률 제정자들은 공산당을 강제 해산하려는 것에는 헌법상의 장애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를 고민하였다.[59] 정부 내각 회의에서도 전투적인 노조단체들의 강경 투쟁에 대한 대처 수단으로써 별도의 강제적인 법적 조치를 취할 마땅한 수단은 없고 단지 노조 스스로 변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논의되었다. 강경 파업 사태에 대해 군병력을 투입하여 강제 진압해야 한다는 의견이 개진되었지만 이것도 노조의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논의되었다.[60]
연방정부(호주는 내각제 정치 체제이므로 정부와 입법부는 엄밀하게 분리되지 않고 내각cabinet동일체로써 책임을 진다)가 헌법이 정한 목적내에서만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갖고 있는데 정당을 불법단체화하려는 법률을 제정하기 해서는 정당이 국가 방위의 위협이 된다는 논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950년은 2차 대전이 이미 끝난 지 4년이나 지난 평시 상황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이 국가 안전에 큰 위협을 주는 대상이고 따라서 국방 목적상 정당을 강제 해산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국방 목적 그 자체를 궁색하게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61] 이러한 헌법상의 장애를 회피하고자 9개 조항의 법률 제정 배경과 목적을 상술하는 법률 취지문을 법률 전문에 삽입시켰다. 법률 전문에다 이 법률이 국방[62]의 목적상 필요하다고 법률제정권의 근거를 스스로 마련했다.
공산당 해산 법률이 헌법이 부여한 입법부의 제정 권한들에 속하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점을 미리 해소하기 위하여 통상적인 법률과는 다르게 특별히 전문과 취지문을 삽입하고 거기에 법률 제정의 타당성을 미리 법기술적으로 잘 규정해 놓았다. 법률 취지문에 헌법 51조에서 열거하고 있는 의회의 입법권에 따라 국가의 안전과 방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법률을 제정한다고 분명하게 법률 근거를 제시하고 설명하여 놓았다. 헌법 51조 해당 조문은 다음과 같다: “의회는 본 헌법에 의거하여 연방의 평화, 질서 및 선량한 통치를 위해 다음 사항에 대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가진다. ……(xi). 연방 및 각 주의 육해군 방위, 연방 법률의 시행 및 유지를 위한 무력의 통제……”
법률 취지문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개념 정의를 하였는데 제4조는 “호주 공산당은 마르크스와 레닌이 설명한 바대로의 공산주의 기본 이론에 따라서, 정권을 잡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을 수립할 수 있을 혁명적인 상황 (호주공산당이 혁명적인 소수자로써 활동하고 있는)의 도래를 돕거나 고무하려는 활동 또는 운영에 관계하는 경우”[63]라고 규정하고 있고, 또 3조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기를 “공산주의자란 함은 마르크스와 레닌이 발전시킨 공산주의의 목표, 정책, 이론, 원칙 또는 교범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사람을 말한다.”[64]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 정의는 규정의 애매모호할 뿐만 아니라 해석의 관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큰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예컨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구별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바로 직전의 집권여당이었던 노동당의 당원들이나 노조단체의 지도부들 중에 자신들의 이념성향을 마르크스 이론에 기반한 “사회주의자”라고 여겼던 당시의 정치 사회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나 레닌이 주장했던 목표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공산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었다. 오늘날도 유럽 다수의 국가들에서 정권을 잡고 있는 중도좌파 정부의 경우 자신들의 정당 명칭을 “사회주의자 Socialist”라고 부르고 있다. 서구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자들과는 구별된다.[65] 더구나 정치적 이념이란 좌우를 획일적으로 나눌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누구를 공산주의자라고 분류 판단하느냐의 문제는 자의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법의 잣대는 기준이 모호하고 방대해지는 고무줄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것이다.
4조에서 호주공산당은 불법 단체로써 판명되고 따라서 법적 해산을 위해서 법정관리인이 임명한다고 규정하였다.
또 5조에서 공산당 이외의 다른 단체들의 불법단체 판정은 총독의 단독 권한으로 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는데 공산주의에 동조하거나 옹호하는 또는 공산당이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정책 결정이 좌우되는 공산당 부속 기관은 불법단체로 판정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이 단체 지도부에 있지만 그 단체들은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지 않는 단체들도 불법단체로 판명될 수 있다는 위험이 크게 존재하였다. 설령 공산주의 이념에 경도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공산당을 지지하거나 그 활동에 연계되는 것이 아닌 것이 대개의 경우이기도 하였는데 이들 또한 정부의 자의적 기준에 따라 공산주의자들로 판명할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하였다.
6조와 8조의 규정으로 공산당의 연관 단체들이 불법 단체로 판명되면 강제 해산되고 이를 위해서 법정관재인을 선임하게 되어 있었다.
공산당이 불법단체화되면 공산주의자들이 조직의 지도부에 포진하고 있었던 부두, 항만, 탄광, 철도 노조 등 강경파 노조단체들 또한 불법화되고 강제 해산이 될 것은 분명하여 그것은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이런 시각을 반영하는 한 노조단체의 항변은 옮기면 다음과 같았다: “세계적인 경험을 통해 보면 정부가 한 정당을 강제 해산시키게 되면 정치 이념과는 상관없이 항상 다른 정당을 억압하고 또 노동조합 지도부를 재판절차도 없이 투옥함으로써 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하는 전조임을 알 수 있다.”[66]
7조1항에서 불법단체의 구성원이나 지도부에 속해 계속적으로 조직원으로 남아서 활동하거나 또는 자신이 불법단체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어떠한 것이라도 소지하고 있거나 내걸고 있는 경우들을 포함하여 사정을 알고서 고의적으로 불법 행위를 지속하면 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이 규정은 예컨대 불법단체로 판명된 공산당의 배지나 팜플렛을 들고 다닌 경우에도 형사 처벌될 수 있다는 의미이므로 국민 기본권을 크게 박탈하는 것이었다.
9조에 의해 총독[67]은 공산주의자 혐의가 있는 누구라도 공산주의자로 판명되면 형사 처벌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형사처벌을 구체적인 행위가 아닌 단지 공산주의 이념을 지녔다고 해서 처벌한다는 것은 형사법원칙의 기본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러한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경우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증거를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고 9조4-5항에서 규정하였는데 이는 형사법의 기본 원칙인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되었다.[68]
9. 공산당 강제해산 법률에 대한 위헌무효 헌법 소송 제기
공산당과 10여 개의 노동조합 단체들은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해서 연방정부가 그러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위헌 무효임을 확인하는 헌법 소송을 연방대법원에 즉시 제기하였다. 공산당과 해당 노동조합 단체들은 대법원에 공산당 해산 법률의 효력을 정지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법률안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은 기각되었다. 대신 대법원은 정부가 공산주의자로 판명하는 절차와 공산당 건물의 압수 절차를 대법원의 헌법 재판 판결이 나올 때까지 임시적으로 중지시켰다.
정부는 이러한 대법원의 직무 정지 가처분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10월 20일 공산당 자산을 강제적으로 압수하기 위해서 파산관재인을 임명하고 공산당의 전국 사무실에 대한 압수 수색 절차를 전격 단행하였다.
공산당 해산 법률이 통과된 지 1주일도 안된 1950년 10월 25일 당시 노동당 부대표를 맡고 있던 에바트 의원은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서 평소 자신의 신념에 따라 부두노동자 단체의 변론을 맡기로 하였다. 야당의 지도부 의원이 당시 여론이 매우 불리한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강경 노조 단체를 변호한다는 결정은 노동당이 여론의 공격에 노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매카시즘의 당시 상황에서 야당의 지도부 당의 제2인자 인물이 공산당을 법정에서 변호한다는 것은 공산당의 동조자이거나 지지자로 인식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동당 의원으로서 공산당의 법정 변론을 맡은 결정에 대해서 당 고위지도부에서는 “윤리적으로 타당하고, 변호사로서 당연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바보스런 행동”이라고 비판하였다.[69] 하지만 노동당 대표는 에바트 의원이 대법원에서 공산당의 변론을 펼치는 일은 당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의 인권 변호사로서의 명망과 법조인의 양심에 따른 개인적인 행동으로써 이해해 주었다.[70] 실제로 에바트 의원은 헌법 소송에서 훌륭한 변론을 수행해 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난 뒤 실시된 총선에서 에바트 의원은 “자유의 수호자 대 공산주의의 수호자”라는 선거구호를 내건 2차 대전 참전 영웅인 상대후보로부터 크게 고전하고 간신히 243표차로 의원직을 유지하였다.
5.2. 공산당 해산 법률 위헌 무효 판결
헌법 재판 과정
변론 1950년 11월 14-17, 20-24, 27, 28, 30일,
12월 1, 4, 6-8, 11-15, 18, 19일.
판결 1951년 3월 9일[71]
5.2.1. 사실 개요
1950년 10얼 19일 법률안이 통과된 즉시 공산당과 10개의 노조단체들은 위헌무효법률이라고 주장하고 헌법 재판을 통한 법정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반발하였다. 이들은 총독의 법안 서명이 이루어진 지 2시간 만에 대법원에다 법률안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였다. 대법원은 헌법 소송이 제기된 지 1달이 채 지나지 않는 시기인 1950년 11월 14일부터 정식으로 헌법 재판을 진행하였다. 대법원 판결이 다음 해 3월 9일 내려졌으니 헌법 재판 기간은 4개월이 걸렸다. 이것은 매우 신속한 재판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미국과 독일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 미국의 경우 1949년 진행된 공산당 핵심 지도부에 대한 형사 처벌 건에 대한 위헌 소송에서 대법원의 합헌 결정은 1950년 12월 4일 변론을 하고 1951년 6월 4일 판결이 나왔다. 미국의 경우 미국공산당 CPUSA에 대해 공산주의 활동 불법단체로 판명하게 만든 근거 법률인 1950년의 국가안전법에 대한 위헌 소송이 제기된 지 약 10년 만인 1961년 6월 5일 미국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독일의 공산당 해산 결정은 1951년 11월22일 정부가 제소한지 약 5년이 걸친 1956년 8월17일 독일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왔다.
5.2.2. 주요 쟁점
호주는 미국처럼 각주로 구성된 연방국가이다. 각 주는 국민 생활에 관해 모든 법률 제정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연방 정부의 법률 제정 권한은 오로지 연방 헌법 51조에서 열거한 경우에만 가능하다. 공산당 해산 법률의 근거는 헌법 51조가 열거하고 있는 국방권에 의존하였다.[72] 정부는 공산당 해산 법률 제정 근거가 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헌법 규정으로 “국방권 defence power”에 있다고 보고 법률의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법률 취지문에 공산당이 국가의 안전과 방위에 큰 위협을 초래한다고 규정하였다. 법률 쟁점은 공산당의 존재가 국가 방위를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대상인지에 대한 판단은 사실 인정의 문제인지 그리고 공산당의 해산이 국방권을 동원하여야 할 정도의 문제인지 그리고 이런 입법 근거가 헌법상 존재하는지가 주요한 초점이었다. 다시 말해 연방 정부가 무엇이 국방에 위험이 되는지 여부에 대한 사실 판단의 권한을 갖고 있는지 또 그것을 법률에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 또 만약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공산당 해산 법률과 국방권은 서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관련성[73]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대법원은 법률 판단을 내려야 했다.
국방권 이외의 다른 주요 반론은 주로 주정부와 연방정부 사이의 권한 다툼 그리고 사법부 독립에 관한 내용이었다. 주요 쟁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연방 의회가 가지는 있는 헌법 51조6항과 34항에서 열거한 법률 제정권한의 범위를 일탈한 내용의 법률이므로 위헌무효가 된다.
② 법률의 전문 preamble에 규정된 사실 판단의 내용들이 법률의 타당성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러한 사실 규정이 진실하지 않음을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증거들을 제출할 수 있어야 된다.
③ 직접적인 법률을 제정하여 호주 공산당을 해산하고 또 공산당 관련 단체들을 불법화하고 또 개인들을 총독으로 단독 권한으로 공산주의자로 판정할 수 있는 이런 권한들은 사법부의 권한을 침탈하는 것이므로 불법무효가 된다.
④ 법률의 재산의 강제 몰수에 관한 규정은 헌법 51조 31항의 “공정한 조건”에 자산 취득의 규정을 위반한 것이므로 무효가 된다.
⑤ 연방법에 따라 설립된 노동조합 단체들은 여러 주 사이에 연결된 활동을 하는 지도부를 두고 있고 헌법 92조에서는 주 상호간의 통상과 왕래 활동을 막는 법률 제정을 금지하고 있다. 정당 단체, 노동조합 단체 그리고 이들의 지도부는 여러 주에서 서로 연계된 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각 주 사이의 활동을 통제하는 법률은 제정될 수 없다.
⑥ 자발적 단체가 정당한 법률 목적을 가지고 있는 한 사법부의 판단을 거치지 않는 연방 법률로써 강제 해산시킬 수가 없다.
⑦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자발적 단체인 정당에 대해서 강제 해산을 시킬 연방 법률은 제정될 수 없다. 이는 헌법상 허용될 수 없다.
단독심리에서 대법원 전원 합의부로 넘어 온 항소심에서 대법원이 판단하여야 할 법률 문제는 다음과 같이 특정된 질문이었다.
"1.(a) 공산당
해산 법률 규정의 합헌 또는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이 사법 판단 또는 사실 확인 또는 공산당 해산 법률의 전문과 취지문 4조-9조에 규정된 내용(해당자인
원고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이 사법 판단인지 또는 사실 확인인지에 따라서 달라지는가?
1.(b) 원고들이 공산당 해산 법률이 연방 정부의 입법권한을 일탈하였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 공산당 해산 법률에 규정된 사실들을
뒤집는데 필요한 증거들을 제출할 권리를 갖고 있는가?[74]
2. 1번의 두 질문에 대해 어느 하나라도 ‘아니오’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면 공산당 해산 법률은 원천 무효가 되는가 아니면 원고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부분들만 무효가 되는 일부 무효가 되는가?”[75]
공산당 케이스처럼 상급심 법원이 판단할 법률 문제를 특정해서 항소한 재판을 “case stated”이라고 부른다. 케이스 스테이트는 법률심리만을 한정하는 항소심의 성격을 갖는다. 한국의 헌법재판에서 “재판의 전제”가 되는 경우에 법원은 헌법재판소에 법률심의 판단을 요구하는데 그와 같은 경우의 법률심과 비슷하다. 대법원에서 헌법 소송이 시작되었지만 대법원전원합의부는 사실심리를 진행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법률적인 측면만을 검토하는 최종항소심 재판을 진행했다는 것을 말한다. 대법원은 하급법원에서의 확인된 사실 확정 statement of facts 부분에 대해서는 재검토를 하지 않고 다만 대법원의 판단은 법률심리에 한정시킨 것이다. 헌법 71조의 규정에 따라 대법원은 최고의 지위를 가진다. 헌법 73조 규정에 따라 모든 사건에 있어서 대법원의 판결은 최종적이고 확정적인 final and conclusive 효력을 갖는다. 이렇게 대법원은 최후 최종 종국적인 판결을 내리므로 사실 판단에 대한 오류가 일어날 수 있는 사실심리[76]는 하급심에 맡기고 대신 최종적 법률심리를 통해 하급법원을 통제하는 것이다.
5.2.3. 판결 주문
대법원은 1951년 3월 9일 공산당 해산 법률[77]에 대해 위헌 무효의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의 판단 이유는 호주는 현재 전쟁 상태에 있지 않는 상황이므로 정부가 단체를 금지하거나 해산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또 공산당 해산 법률은 무죄추정[78]의 원칙을 위반하여 공산당과 당원에 대해 공산주의자라는 판정을 내리고 있는 바 공산당이 주는 위협의 정도가 무죄추정의 원칙을 바꾸어야 할 만큼 크지 않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판결 주문은 위의 재판에 전제된 특정된 법률 질의에서의 대답으로 주어졌고 다음과 같다.
“1. (a) 아니오.
1.(b) 아니오.
2. 공산당 해산 법률은 법률 전체로 원천 무효가 된다 The whole Act is invalid.[79]
3. 소송 비용은 피고 정부가 원고[80]들에게 부담한다. 사건을 딕슨대법관에 환송한다.”[81]
5.3. 판결 이유
연방 정부의 법률 제정 권한은 오로지 연방 헌법 51조[82]에서 열거한 경우에만 가능하다. 공산당 해산 법률의 근거는 헌법 51조가 열거하고 있는 국방권에 의존하였다.[83] 그렇다면 공산당이 국가 방위 military defence에 큰 위협을 초래할 정도로 위험한 존재임이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공산당의 존재가 국가 방위를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대상이어서 국방권을 동원하여 해산할 수 있다고 정부는 주장한 것이다. 사법부도 당시 급박한 국제 정세 속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이 주는 정치적 상황과 국민여론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84] 하지만 대법원은 정부의 견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대법원의 판단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대법원은 만약 공산당이 국가 방위를 위협할 정도의 위험의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실을 판단하는 권한은 정부에 있지 않고 대법원이 가진다고 판결한 것이다.[85] 다시 말해 연방 정부는 자신들 스스로 무엇이 국방에 위험이 되는지 여부에 대한 사실 판단을 법률에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법률의 제정은 연방정부의 법률제정권한의 일탈 ultra vires[86]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공산당 해산 법률과 국방권과 상대한 관련성이 존재하느냐의 여부에 대해서 그러한 연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87]
위헌 무효 판결 대법관 개별 의견 분석
1951년 3월 9일 호주연방대법원은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해 위헌무효임을 선언하였다. 7명의 대법관 중에 6명의 대법관[88]은 모두 공산당 해산 법률의 위헌성을 확인하였고, 단지 레이셈 대법원장만이 소수반대의견을 냈다. Dixon, McTiernan, Williams, Fullagar, Kitto 5명의 대법관의 판단 이유는 거의 비슷하다. Webb 대법관은 조금 다르게 법기술적인 이유를 들었다. 대법원은 6-1의 다수의견으로 위헌무효임을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공산당 케이스의 판결문은 285페이지에 이르는 장문이다. 그만큼 판결의 어려움이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과 독일의 경우[89]도 공산당 해산 판결문은 장문이긴 하지만 이들 판결문에서는 공산당 이론[90]과 공산당 활동 등 사실 확정의 측면을 많이 다루고 있는 반면 호주 공산당 케이스 판결문은 공산당 활동과 그 위협에 대한 사실 확정의 문제 보다는 순전히 법률적인 측면을 논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장문의 판결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5.3.1. 권력 분립과 사법부 독립의 원칙
대법원은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한 위헌 법률의 판단 이유로써 그 법률이 헌법상 부여된
입법부의 법률 제정 권한의 범위를 일탈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대법원은 평화 시기에 정부가 자신의 의견에 따라 국가 안보나 국토 방위에
관련된 국방권에 의거하여 한 정치 단체를 강제 해산시키려고 하는 것은 연방 정부에게 주어진 고유 권한(부수적이든
묵시적이든 헌법에서 부여한)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공산당 해산 법률은 위헌무효에 해당된다고 판결한 것이다.
Fullagar. McTiernan, Williams, Kitto 대법관은 해당 법률 5조(4)항과 9조(4)항에서 총독[91]이 국가안보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위험인물(개인이나 단체)이라고 판정한 결정에 대해서 사법 심사의 절차가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사법 심사를 배제하는 법률은 사법권의 독립과 법의 지배 원칙에 어긋나고 따라서 그 법률은 무효가 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총독의 결정에는 잘못된 결정이 개입될 수 있다. 이러한 잘못에는 근거 법률이 잘못되어서 일어날 수 있고 또 총독의 사실 확인 finding of fact의 과정에서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이러한 잘못의 가능성이 나타날 수 있는 원인은 총독에게 부여된 법적 근거가 애매모호하다는 vagueness 것에서 찾아진다. 총독의 잘못은 국가 기관이나 호주의 방위에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이나 단체를 총독은 위협이 된다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를 포함한다. 법률은 명확해야 할 것을 성립요건으로 하는데, 법률이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경우는 “법의 지배” 원칙에 어긋나서 법률의 합법성 요건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
다수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판단 이유를 대강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 상황에서는 정부의 국방권 행사와 국가 방위 목적 사이에 상관관계가 객관적으로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따져 볼 필요 없이 즉 국방권을 발동해야 할 필요성의 여부를 묻지도 않고서 국방권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전쟁과 같은 비상 상황에서는 그러한 비상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률이 발효될 시점에서는 현실적으로 닥쳤거나 또는 곧바로 닥칠 정도의 실제적이거나 급박한 중대한 무력 충돌 actual or imminent serious armed conflict이 존재하는 상황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러한 무력 충돌이 존재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법률은 국방권 defence power에 근거하여 제정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국방권은 매우 특별한 권한이다. 국방권에 근거하려면 행정부나 입법부가 국가 방위상 필요하다는 정책적 판단을 요구하는데 만약 국가 내부적인 위협을 제거하는 것- 이것까지를 헌법상의 부수적인 권한이나 또는 묵시적인 권한으로 해석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국방권은 “실제적인 위협 actual threats”에 따라 발동되는 것이지 위협으로 여겨지는 perceived threats 위협 수준에까지 발동하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아니다. 또 헌법상 행정부의 본질적인 권한 행사에 부수되는 권한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부수적인 권한 행사는 헌법의 전통적인 개념에 합치되어야 한다. 전통적인 헌법 개념에는 법의 지배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포함된다.[92] 법률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은 법의 지배 원칙에서 나오는 법률 요건이다. 만약 법률이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경우라면 행정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수반되는 부수적인 권한에 근거한 부대 법률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법의 지배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5.3.2. 입법부와 행정부의 행위에 대한 사법부 재심 Judicial Review
호주의 국가 체제는 연방헌법을 제정하면서 연방국가로 성립되었다. 이를 “헌법 국가 government under the Constitution”라고 말한다. 헌법국가라는 말은 국가 권력의 행사에는 제약이 따른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주정부가 아닌 연방 정부인 경우 특별히 헌법에 의해서 성립된 권력 통치 체제를 말한다. 따라서 연방 정부는 오로지 헌법 규정에 미리 정해 놓은 목적 listed subject matters 예컨대 통상권, 국방권, 납세권 등에 따라서만 권력이 행사되어야 한다. 그 이외의 다른 목적상 입법이 필요한 경우는 주 의회에게 권한이 주어져 있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행위를 사법부가 최종적으로 다시 심사할 수 있다는 사법 심사 judicial review 제도에 대한 명문 규정이 헌법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헌법 3장 사법부 권한 행사 부분에서 사법 심사의 원칙이 존재한다는 점이 확인된다. 제3장에서 사법부는 행정부와 입법부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사법부의 독립 separation of powers 원칙의 구체적 표현은 사법권 judicial power은 오로지 사법부만이 행사한다는 것 그리고 사법부는 사법권한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법권은 행정권이나 입법권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헌법 75조에서 대법원의 재판 관할권을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에서의 “연방 공무원에 대한 집행 명령, 금지 명령 또는 집행정지 명령의 소송은 연방대법원이 원심을 행사한다.”는 조항은 사법 심사 제도를 구체적으로 예정하고 있는 것이다.[93]
공산당 케이스에서 주요 쟁점은 입법부가 공산당 해산 법률을 제정할 권한이 있느냐의 여부이었다. 이 법률에서 입법 제정권한 여부를 다툴 소지가 있다는 것을 예정하고, 미리 법률 제정 취지문에다 국가의 안전과 방위의 목적상 필요하다는 것을 밝히며 법률의 타당성을 찾아 놓았다.[94] 그리고 입법부가 그러한 입법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못을 박아 놓은 것처럼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여기서 판단의 핵심은 입법부의 그러한 입법부의 천명이 헌법에서 허용하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대법원은 입법부가 그렇게 천명해 놓은 것은 최종적이고 확정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국방 목적상 필요한 법률인지 또는 그렇지 아니한지 그렇게 원천적인 부분까지를 대법원이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헌법상 대법원에게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헌법에 따른 마땅한 권력 행사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임무는 연방대법원에게 맡겨져 있다. 즉 대법원이 헌법 해석의 최종적인 책임자이라는 결론을 확고부동하게 굳힌 것이다.
법률 제정의 권한의 존재 여부와 법률의 합법성을 가길 권한이 대법원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한 대법원은 공산당 해산 법률이 국방권의 범위내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헌법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풀라거 대법관은 “강물은 그 원천보다 더 높이 흐를 수 없다 a stream cannot rise higher than its source.”는[95]는 비유로 표현되는 헌법의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국방권에 의거하여 최소한 전쟁시기에 위임된 사람의 의견에 따라 국방권이 발동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고, 또 그 의견에는 국방권과 의견의 법률적 효과 사이에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은 확립된 법원칙에 속한다. 이에 대해서는 선례 Lloyd v. Wallach[96]를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에서 “강물은 거슬러 올라가는 법이 없다”는 비유적으로 표현된 헌법상의 기본 원칙에 대한 예외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지 모른다. 슈림톤[97] 판례에서 딕슨 대법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국적인 결정은, 법적 통제로부터 완전 자유라는 점에서, 헌법상 재량 discretion이 허용되지 않는 성질을 갖는다…..만약 의도적으로 행사가 가능하다면 또는 허용될 수 있다면, 재량을 부여하는 법률이나 명령이 강제력을 가져오는 권한을 넘어서거나 넘어설 위험이 있다.” 물론 “재량”은 입법부 자신의 재량인 법률의 제정 바로 그것으로 행사될 수 있다. ……또는 제정된 법률의 작동에 의해서 법률적인 효력이 나타나는 총독 또는 장관의 재량일 수도 있다. 법률 또는 법률에 따라 행해진 행정 행위의 합법성이 법률 제정자, 또는 행위를 하는 사람의 의견에 달려 있어서는 아니된다. 합법성이란 그 법률 또는 그 행위의 결과가 해당 법률 자체의 합법성 여부가 달려 있는 헌법상 권한 범위 내에 있는 것을 말한다. 등대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은 법률 제정자의 의견에 의해 등대라고 하는 어떤 것이라도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는 것이 아니다. 등대에 관한 법률 효력을 가져오는 법률 선포 proclamation[98]를 하는 권한과 총독의 의견에 의해 등대라고 하는 어떤 것이라도 비슷한 선포를 하는 권한은 전혀 다른 것이다. Lloyd v. Wallach 판례에서 확립된 법원칙이 일반 원칙에 대한 실질적 또는 명백한 예외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여기에서 검토될 필요가 없는 문제이다.”[99]
5.3.3. 급박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존재와 법원의 인지에 의한 사실 확정 judicial notice[100]
대법원은 공산주의의 위협은 급박한 정세나 국내적 파업 사태들을 통해서 잘 알려져 있는 문제라고 보고, 그러한
사실 인정의 문제는 법원의 인지로써 증거 채택을 할 수 있는 성격이라고 보았다.[101] 그러나 대법원은 공산주의 위협이나 국제적 정세를 고려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102] 딕슨 대법관의 판결문 해당 단락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발전 단계의 초기 상태이든 현 단계이든지 간에 확인된 공산주의 이론을 검토하는 작업은 필요하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하는 모순적 적대감, 부패의 필연성,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혁명적 변화의 시기 도래, 부르죠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투쟁, 차후 진보를 위한 일정 기간 동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허용, 전세계로의 혁명 과정의 발전적 외연 확대, 혁명의 예정된 특혜를 좀더 폭넓게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반혁명으로부터 공산주의의 기존 체제를 보호하고 또 혁명 과정의 발전을 일시적인 패배와 지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혁명의 전파를 돕고 신속히 할 필요성, 이런 것들에 바탕을 둔 정치 이론에서는, 행동을 불러오게 만드는 신념과 내각제 정부가 국내외 사태에 대해 내리는 해석은 정부가 공산주의 이론의 신봉자의 교의와 가르침에 대해 갖는 안색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이 존재한다. 그 안색은 추종자들이 그들의 이론에 대해 갖는 것과 동일할 필요는 없다. 공산주의자들이 직접 말하는 것 이상의 반응에 대해 좀더 공격적이거나 악의적인 해석이 내려질 수도 있다는 것은 맞는 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정보에 의해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정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공산주의 이론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없다면 잘 알려진 급박한 국제 정세를 검토하는 일은 더욱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당 정권 장악, 서유럽 동맹 결성을 위한 브뤼셀 협정, 베를린 봉쇄와 공수 작전, 대서양 협정, 중국이 공산당 정권에 넘어간 것, 대만 문제로 일어난 사태, 북한의 남한 침공과 이에 대한 유엔의 반격, 유엔 총회와 유엔 안전보장회의 상임 이사국 회의에서 나타난 공산주의 국가들과 영국과 미국의 앵글로 색슨 국가 및 서부 유럽 국가들 사이의 고조된 외교적 갈등 이런 사건들이 바로 최근에 일어났다. 호주의 국내 문제들에 대해 국방권을 발동해야 할 사태인지를 따져봐야 하는 문제에 해당하는 한 산업계에서 일어난 심각한 파업 사태-정부가 얻은 정보 소스를 이용하여 정부가 판단할 영역의 범위 내에 속할 문제-를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103]
5.3.4. 국가 안보는 정치적 정책 판단의 영역인가?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낸 레이셈 대법원장은 국가 안보 문제는 정치적인 결정의 성격을 가지므로 정치적 책임을 지는 입법부의 몫이지 사법부가 개입할 영역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레이셈 대법원장이 반대의견을 낸 이유는 국방 정책에 관한 문제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결정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므로 내부의 적 internal enemy을 다루는 분야도 마찬가지의 성격으로 정치적 결정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런 정치적 정책 결정에 대법원이 들어갈 틈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누가 적에 해당하고, 어떤 위험이 존재하는지, 또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지에 대한 문제들인데 이 같은 문제는 설령 사실확인을 할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 확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기에 그것은 정부의 정책적인 판단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정치적인 결정의 문제이기에 국방정책 또한 2차 대전 때처럼 정치적 반대가 격렬하게 나올 수 있는 분야라는 것이다. 국방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행정부의 몫이고 또 입법부의 몫이라는 판단한 것이다. 왜냐면 행정부는 의회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입법부는 전적으로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문제에 법원이 개입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문제는 오로지 정치적인 결정 political opinion으로 풀 수 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레이셈 대법관의 견해로는 법원은 정치적인 의견을 표명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국민에게 정치적 책임을 지는 의회가 권한을 위임 받아 법률을 제정했으므로 공산당 해산 법률은 정당하다고 그는 판단한 것이다.[104]
하지만 6명의 다수 대법관은 의회가 판단할 사항이 아니라 법원이 판단할 임무라고 말했다. 대법원은 공산주의 위협이 거센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지만 지금은 평화시기이고 전쟁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입법부의 자신들의 판단만으로는 부족하고 객관적인 전쟁의 위협이 존재해야 된다고 판단했다.[105]
5.4. 법의 지배 the rule of law
공산당 해산 법률의 위헌무효 판결은 “법의 지배 원칙을 공고히 굳힌 영광스런 승리의 기록”이라고 역사적인 명판례로 길이 빛나고 있다.[106] 법의 지배 원칙이란 무엇을 말하고 또 왜 그것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호주 헌법에서 “법의 지배” 원칙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는 있지 않다. “사법 심사” 제도 또한 헌법 조문 어느 곳에서도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왜 헌법상 명문 규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법의 지배와 사법 심사의 원칙이 어떻게 가장 중요한 헌법 원칙들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들 원칙은 헌법상 명문 규정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대법원이 헌법 해석상 원칙으로 끌어내어 사건에 적용한 선례를 확립하였기 때문에 법적으로 의의가 큰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공산당 케이스는 미국 헌법에서 사법 심사 제도의 헌법 원칙을 확립한 마버리 판례 Marbury v Madison에 비견된다.
딕슨 대법관은 법의 지배 원칙은 묵시적인 implication 헌법 규정으로 해석된다기보다 헌법에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고 있는 불문율과 같은 가정 assumption에 해당된다고 그의 판결문에서 설명했다. 법의 지배 원칙은 사법부 독립의 원칙 등의 개념과 같이 영미법의 전통적인 법 개념에 따른 불문율로써 당연히 헌법에 포함되어 있다고 인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명시적으로 규정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헌법상의 원칙에 속하기 때문에 이런 기초적인 법원칙에 의해서 입법부가 스스로 사법권한까지를 행사하려는 법률은 무효가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107]
‘법의 지배’ 원칙은 독일법 계통에서의 ‘법치 국가 Rechtstaat’의 개념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유럽연합 조약 Treaty on European Union 6조는 “유럽연합은 회원국에 공통된 원칙인 자유, 민주주의,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권에 대한 존중, 법의 지배라는 원칙에 기초한다”고 규정하고 이를 회원국 모두가 법적으로 지킬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108] 하지만 법의 지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에 대한 개념을 법적으로 명시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109]
2005년 9월 국제변호사협회 집행위원회 결의문에서 “법의 지배는 문명 사회의 토대를 이룬다. 법의 지배는 모두가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투명한 절차를 확립한다. 그것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함과 동시에 보호해 주는 원칙들을 준수하도록 한다.”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꼭 집어서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지 않다. 법의 지배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 시도하는 대신에 법이 지배를 구성하는 원리들을 나열하였는데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사법부, 무죄 추정, 공평한 공개 재판을 지체 없이 받을 권리 등이 법의 지배 개념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법적 개념에 대해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법적 개념을 시도한 영국의 빙햄 대법관의 설명을 인용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 같다. 그는 먼저 법적 개념 시도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법률을 만드는 사람들은 법조문에 사용되는 용어를 정확히 정의하여 오해의 소지나 법원이 잘못 해석할 여지를 없애려고 한다. … 중요한 개념을 정의하는 규정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해봄 직하다. 그런데 그런 규정은 없다. 법의 지배에 대한 별도의 정의 규정을 두지 않는 것은 다이시 교수의 정의가 별다른 반박없이 보편적으로 수용되어 부연설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아닐 것이다. 법률안을 작성하는 사람들도 법에 정통한 전문가들로, 법의 지배에 대하여 다이시가 내린 정의에 회의를 표명하는 스승들 밑에서 공부했을 것이다. 그들이 법의 지배에 대한 정의 규정을 두지 않은 것은 법의 지배를 간명하게 정의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 규정을 두는 대신 법의 지배가 무슨 뜻인지를 규정해야 하는 사건이 제기되면 법관이 이 문제를 판결하도록 맡겨두기로 결정하였다고 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법의 지배에 대한 정의가 추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사건과 관련되어 형성될 수 있고 시간이 흐르며 새롭게 등장하는 견해나 상황에 조응하여 진화할 수 있다. 법의 지배에 관한 기존의 헌법적 원칙이 제정법률에 명시적으로 규정되면 소송당사자자들이 이 규정을 원용하는 것은 시간문제다.”[110]
빙햄 대법관은 이런 단서를 붙이고서 법의 지배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법의 지배라는 헌법 원칙의 핵심은 모든 개인과 단체(공공기관과 사적 단체를 포함하여)는 공개적이고 또 법제정 이후에 효력이 발생되는 제정법에 따라 법원에서 공개적으로 집행되는 법에 구속되고 그런 법의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있다”.[111] 빙햄은 8가지 요소로 법의 지배를 설명했다.[112] 빙햄의 설명에 따르면 법의 지배의 가장 핵심은 실제적으로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의 독립에 있다. 사법부는 절차적 정의를 그 핵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사법부와 행정부의 가장 큰 차이점이 갈라진다. 판례법 국가들에서 대법원이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내는 최후의 보루라는 인식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인정되고 있다.
호주공산당 케이스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이유는 대법원이 바로 이러한 법의 지배 원칙을 재확인하였고 실제적인 효력을 갖고 있는 판례이기 때문이다. 비록 공산당은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당원과 지지자 수가 줄어들어서 스스로 해산되었지만 공산당 해산 법률을 위헌 무효로 선언했던 대법원의 살아 있는 판결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판결이 힘을 잃고 집행되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구체적인 사건에서 살아 있는 힘을 갖지 못한다면 (예컨대 한국의 대법원이 유신헌법 당시에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였다가 (그 당시에 대법원은 행정부의 힘에 굴복했다)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이후에서야 사후적으로 위헌무효로 돌리는 한국의 사법부 전통과는 결코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힘들 것이다. 행정부가 독단적인 지배를 누린 국가전체주의 전통을 가진 대륙법국가들과는 다르게 사법부가 행정부의 행위를 통제하고 행정부보다 우위에 서 있는 사법심사의 법과 전통을 가진 영미국같은 판례법 국가들은 법과 역사와 전통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113] 만약 호주 대법원이 1951년 나라를 휩쓸던 정치사회적인 상황을 참작하고 다수가 지배하는 행정부의 독단적인 권력 행사에 굴복하였다면 ‘사법부 우위의 사법 심사’[114] 제도의 전통은 무너졌을 것이며 따라서 공산당 케이스는 두고두고 기억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선례의 중요성과 법적 의의는 사후적인 부검에서 그 의의가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법의 가장 핵심적인 원칙을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 실제로 적용되고 집행되었느냐의 여부 즉 당시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행동하고 결단했느냐의 문제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법의 지배에 대한 법적 개념은 판례법국가와 대륙법 국가의 정치적 역사적 맥락을 통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그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 것이다. 공산당 해산 사건에서 영미 국의 판례법은 위헌 무효로 선언한 반면 독일의 경우는 합헌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에서 판례법과 대륙법국가의 사법부 독립의 전통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법의 지배’에 관한 개념을 맨 처음 본격적으로 정립해 내었던 다이시 Dicey (1835-1922년) 옥스포드대 교수가 1885년에 출간한 “헌법학 개론”[115]에서 설명한 ‘법의 지배’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해당 부분을 번역한다.[116]
“영국 헌법의 특징으로써 법의 지배 절대성을 들고 있는데 이 절대적인 법의 지배 원칙이라는 하나의 표현에는 최소한 세 가지의 상호 연관적이면서 뚜렷이 구별되는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라.
When we say that the supremacy of the rule of law is a characteristic of the English constitution we generally include under one expression at least three distinct though kindred conceptions.
법의 지배-1-일반법의 절대적인 우위 absolute supremacy of the ordinary law
첫째, 일반적인 법적 절차에 의하여 확립된 법을 분명하게 위반하였다는 것이 일반 법원에서 확인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형사처벌이나 신체 또는 재산상의 손해를 받지 아니한다는 원칙이다. 이런 의미의 법의 지배 원칙은 광범위하고 자의적이며 재량적인 권력을 가진 권력자가 행사하는 통치체제하고는 대립되는 개념이다.
[First] that no man is punishable or can be lawfully made to suffer in body or goods except for a distinct breach of law established in the ordinary legal manner before the ordinary courts of the land. In this sense the rule of law is contrasted with every system of government based on the exercise by persons in authority of wide, arbitrary or discretionary powers of constraint.
법의 지배 –2-법 앞에 만인 평등 equality before the law
영국 헌법의 특징으로써 드는 법의 지배 절대성 원칙이 가진 두 번째 의미는 어느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일반법원의 관할하에 있고 그러한 일반적인 재판의 법적 절차에 따른다는 것이다.
[Secondly],
not only that with us no man is above the law, but (what is a different thing) that here every man, whatever be his rank or condition, is subject to the ordinary law of the realm and amenable to the jurisdiction of the ordinary tribunals. In England the idea of legal equality, or of the universal subjection of all classes to one law administered by the ordinary courts, has been pushed to its utmost limit. With us every official, from the Prime Minister down to a constable or a collector of taxes, is under the same responsibility for every act done without legal justification as any other citizen. The Reports abound with cases in which officials have
been brought before the Courts, and made, in their personal capacity, liable to punishment, or to the payment of damages, for acts done in their official character but in excess of their lawful authority. A colonial governor, a secretary of state, a military officer, and all subordinates, though carrying out the commands of their official superiors, are as responsible for any act which the law does not authorise as is any private and unofficial person.
영국에서는 법 앞의 만인 평등이라는 사상이나 또는 일반법원에 의해 집행되는 하나의 법체계에 모든 계층이 보편적으로 기속된다는 원칙은 최고의 원칙으로 자리잡고 있다.[117] 영국의 모든 공무원-위로는 수상에서 아래로는 순경이나 말단 세무직에까지의-은 법적 정당성이 결여된 모든 행위에 관하여 일반시민과 마찬가지로 법적 책임을 지게 된다. 법원 판례를 보면 공무원이 공무 수행 중에 행한 행위이었지만 정당한 권한을 넘는 경우에는 해당 공무원은 재판에 회부되고 (공무원 신분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처벌을 받거나 손해 배상의 책임을 진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식민지의 총독 장관, 군장교, 상관의 명령을 수행한 하부 관료에까지 모든 공무원은 법이 부여한 권한을 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일반 사인과 마찬가지로 책임을 진다.
법의 지배 –3-헌법은 일반법의 결과물
[Thirdly]
We may say that the constitution is pervaded by the rule of law on the ground that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constitution (as for example the right to personal liberty, or the right of public meeting) are with us the result of judicial decisions determining the rights of private persons in particular cases brought before the Courts; whereas under many foreign constitutions the security (such as it is) given to the rights of individuals results, or appears to result, from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constitution.
헌법 밑바탕에 법의 지배의 원칙이 스며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헌법상의 일반원칙(예컨대 개인의 자유권이나 집회참가의 권리 같은)은 법원에 제기된 구체적인 사건들에서 일반인의 권리를 선언한 법원 판결의 결과물로 우리가 누리고 있다는 점에 있다. 반면에 다수의 외국 헌법은 이와 같은 개인 기본권에 대한 보장이 확보된 것은 헌법의 일반원칙으로부터 도출된 결과로 보인다. ….
…
정부 형태는 인간의 의지나 힘에 의한 산물이라고 결코 여길 수 없는 인간의 일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자연 발생적인 것이라는 이론은 비록 정연하지 못하고 부정확한 형태이긴 하지만 어떤 정치적 사건-영국 헌법이 여기에 포함된다-이 한 순간의 결단에 의해 갑자기 일어난 것도 아니고 또 의회가 제정한 법률의 결과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권리를 위하여 법원에서 진행된, 통상적인 의미에서 장기간에 걸친, 투쟁의 결실이라는 사실을 밝혀 준다. 간단히 말해서 영국 헌법은 법원의 판사가 만든 헌법이고 따라서 헌법의 표면에 판례법의 장단점을 모두 갖고 있다.
the dogma that the form of a government is a sort of spontaneous growth so dosely bound up with the life of a people that we can hardly treat it as a product of human will and energy, does, though in a loose and inaccurate fashion, bring into view the fact that some politics, and among them the English constitution, have not been created at one stroke, and, far from being the result of legislation, in the ordinary sense of that term, are the fruit of contests carried on in the Courts on behalf of the rights of individuals. Our constitution, in short, is a judge-made constitution, and it bears on its face all the features, good and bad, of judge-made law.
영국에서도 개인의 자유권은 인신보호법과 같이 헌법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법원의 판결에 의해서 보장되고, 확대 적용되거나 확인되기 때문이다.”
In England the right to individual liberty is part of the constitution, because it is secured by the decisions of the Courts, extended or confirmed as they are by the Habeas Corpus Acts.
(다이시가 결론적으로 재정리한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헌법의 기본 원칙을 구성하는 ‘법의 지배’ 원칙은 세 가지 의미를 갖고 있거나 세가지 다른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
첫째, 법의 지배는 자의적 권력의 행사와는 대립되는 의미로써 일반법의 절대적인 최고위치와 우월성을 의미하고 이에 따라 행정부의 자의성, 비상대권, 광범위한 재량권의 존재를 부정한다. 영국인은 법에 의해서 통치되는데 이는 영국인은 오로지 법을 위반한 경우에만 처벌될 수는 있으며 법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처벌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법의 지배는 법 앞의 만인 평등, 또는 일반법원에 의해 집행되는 일반 법에 모든 계층이 똑같이 동등하게 따른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런 의미의 ‘법의 지배’는 일반시민에게 적용되는 법에의 복종 의무나 또는 일반 법원의 관할권으로부터 공무원이나 특정인이 면책될 수 있다는 이론을 거부한다. 영국에는 프랑스의 “행정법”이나 “행정재판소”에 상응하는 개념이 존재하기 어렵다.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갖고 있는 “행정법”이라는 개념의 밑바탕에는 정부나 정부 공무원이 관련된 사건이나 분쟁은 일반법원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고 따라서 특별 기관이나 다른 행정 기관에 의해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사고가 들어 있다. 이런 개념은 영국의 법에는 전혀 알려진 바 없고 진실로 영국의 전통과 관습에 근본적으로 들어맞지 않는다.
셋째, ‘법의 지배’는 법적 형식의 헌법 즉 다른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성문 헌법 규정에서 나오는 법원칙들이 영국에서는 개인 기본권의 원천적 소스가 아니라 일반법원에 의해서 규정되고 집행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공식으로써 사용된다. 한마디로, 법원과 의회에 의해 형성된 일반 사법상의 원칙들이 국가와 국가공무원의 지위를 판단할 때에도 확대 적용되는데 이는 곧 헌법은 하나의 일반 법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Summary
That "rule of law," then, which forms a fundamental principle of the constitution, has three meanings, or may be regarded from three different points of view. It means, in the first place, the absolute supremacy or predominance of regular law as opposed to the influence of arbitrary power, and exdudes the existence of arbitrariness, of prerogative, or even of wide discretionary authority on the part of the government. Englishmen are ruled by the law, and by the law alone; a man may with us be punished for a breach of law, but he can be punished for nothing else. It means, again, equality before the law, or the equal subjection of all classes to the ordinary law of the land administered by the ordinary Law Courts; the "rule of law" in this sense excludes the idea of any exemption of officials or others from the duty of obedience to the law which governs other citizens or from the jurisdiction of the ordinary tribunals; there can be with us nothing really corresponding to the "administrative law" (droit administratif) or the "administrative tribunals" (tribunaux administratifs) of France. The notion which lies at the bottom of the "administrative law" known to foreign countries is, that affairs or disputes in which the government or its servants are concerned are beyond the sphere of the civil Courts and must be dealt with by special and more or less official bodies. This idea is utterly unknown to the law of England, and indeed is fundamentally inconsistent with our traditions and customs. The "rule of law," lastly, may be used as a formula for expressing the fact that with us the law of the constitution, the rules which in foreign countries naturally form part of a constitutional code, are not the source but the consequence of the rights of individuals, as defined and enforced by the Courts; that, in short, the principles of private law have with us been by the action of the Courts and Parliament so extended as to determine the position of the Crown and of its servants; thus the constitution is the result of the ordinary law of the land.
영국 법 제도의 특징으로써 ‘법의 지배’ 이념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들고 있는데 이 말은 영국인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법의 지배’란 첫째, 법을 어겼다는 사실이 영국의 보통법원에서 보편적인 법원칙과 절차에 의해서 분명히 판명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처벌받거나 신체 또는 재산상 불이익을 당할 수 없다. 이것은 분명하게 확립된 법원칙이다.
둘째, 영국헌법의 특징으로서 ‘법의 지배’를 거론할 때 그 의미는 어느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원칙뿐만 아니라 또 어떤 지위나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보통법에 따르게 되고 Everyone is subject to the law 또 재판권의 행사는 보통법원에 귀속된다는 것을 뜻한다. “법이 사람 위에 존재한다 Be you never so high, the law is above you."[118] 이런 법원칙의 존재는 1733년 풀러 박사의 기록에 등장한다.
셋째, 영국 제도의 특징으로써 법의 지배 또는 법적 정신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드는데 이 말은 영국인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영국 헌법 질서에 법의 지배의 개념이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영국은 법원에 제기된 구체적 사건들에서 법원 판결의 결과로 당사자들 사이에 권리를 확정 짓는데 이러한 법원 판결의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권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의 헌법상 근본적인 원칙들이 확립되었다고 보는 반면 유럽 대륙법 국가들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법률의 일반적인 원칙 규정에서 도출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119][120]
법원의 실제적 역할과 힘-법원에 제기된 구체적 사건들에서 법원 판결의 결과로 헌법상의국민의 기본권들이 확립됨
판례법 국가들은, 헌법에 명시적인 규정이 있는 대륙법 국가들에 비해서, 헌법에 명시적인 규정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사법부의 판결로써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제도를 보다 강력하게 보장해 왔다는 사실은 비교법적으로 확인된다.
호주공산당 케이스는 판례법의 전통적인 개념인 법의 지배와 사법부 우위 원칙을 분명하게 재확인시켜 주었다. 이 사건에서 입법부가 국가의 안전과 방위의 필요성에 따라 사법부가 아닌 기관이 공산당을 불법이라고 판정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하였지만 이에 대해 대법원은 “강물은 거슬러 올라가는 법이 없다 a stream cannot rise higher than its source.”는 말에 비유하며, 의회의 법률 제정권은 헌법에 의해서 제약을 받고 있으며 또 헌법의 최종적이고 종국적인 해석권한은 대법원이 맡고 있음을 선언했다.
1950년 공산당 해산 법률에서 헌법이 부여한 입법부의 제정 권한들에 속하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점을 미리 해소할 목적으로 통상적인 법률과는 다르게 특별히 전문과 취지문을 삽입하고 거기에 법률 제정의 타당성을 미리 법기술적으로 잘 규정해 놓았다. 즉 법률 취지문에 헌법 51조에서 열거하고 있는 의회의 입법권에 따라 국가의 안전과 방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법률을 제정한다고 분명하게 법률 근거를 제시하고 설명하여 놓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그러한 법률 문제의 최종적인 판단 권한은 대법원이 가지고 있음을 선언했다. 정치권의 힘이 가장 강력한 시기에서 (사법부의 독립이 위태로운 시기가 된다) 대법원은 정치권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무엇이 헌법 원칙인지에 대한 해석 권한을 가진 기관 즉 헌법의 최종적인 권위자는 행정부나 의회가 아니라 바로 대법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판결로써 확인한 것이다. 이는 아래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판결 직후 국민투표 실시를 몰고 올 정도로 정치적인 반향이 대단히 컸던 대사건이었다. 호주공산당 케이스를 하나의 “획기적인 epochal” 판결이라고 칭송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있다.[121] 대법원이 최고의 지위에서 최후 최종적인 심판자의 종국적인 역할을 맡게 된 사실은 대법원 스스로의 험난한 법의 투쟁의 결과라는 정치적 법역사적인 맥락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유럽(16세기)의 고서에서 들어 있는 함부르크 시 법전 계통을 보여주는 그림.>
판례법국가에서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행위는 최종적으로 사법부에 의해 재검토 대상이 되므로 사법절차를 배제하는 법률[122]은 위헌에 해당될 것이다.[123] 호주 헌법은 사법 권한의 행사는 오로지 독립적인 사법부만이 행사한다고 호주 헌법 3장 사법부 조항에서 규정하고 있다. 헌법 71조는 “연방의 사법권은 연방 최고법원과 연방 법원 및 기타 법원에 부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법권은 오직 법원에 귀속되기 때문에 사법권을 다른 기관인 행정부나 입법부가 행사한다면 그것은 헌법 해석상 용인될 수 없는 문제이다. 사법권은 법원에 의해 행사된다는 헌법 규정은 사법부 독립의 원칙과 권력 분립의 원칙을 말해준다.
공산당 해산 법률에서 총독의 단독적인 판단으로 공산주의 단체 또는 개인을 공산주의자로 판정하는 경우에는 사법 심사의 절차를 규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총독의 행위도 사법 심사의 대상에 해당되므로 사법 심사를 배제한 법률은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호주헌법은 국민 기본권을 보장하는 권리장전 조항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권리장전의 조항의 존재 여부하고 상관없이, 행정부의 독단으로 형사처벌을 할 수 없다는 원칙은 헌법상의 사법부의 권한 조항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고 보는 것이다.
5.5. 죄형 법정주의와 소급 입법 금지 원칙
딕슨 대법관은 역사를 통해서 보면, 민주국가에서 개인의 자유권을 유린하는 경우는 행정부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말하고 헌법에서 직접적으로 그것을 막도록 한 이유를 설명했다.[124] 미국 헌법을 만든 미건국의 아버지인 매디슨 (1751-1836년)은 “폭력적이고 갑작스런 권력 찬탈 행위에 의해서보다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점진적이고도 은밀한 제약에 의해 국민들의 자유권이 축소되는 사례가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고 말했다.[125]
딕슨 대법관은 권력을 행사하는 행정부에 의해 국민의 자유가 제약될 위험성이 보다 높기 때문에 사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보여준 것이다. 이 부분은 변론 과정에서 대법관과 변호인 사이에 열띤 토론이 오갔다.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위험인물이라고 여기면 한 밤 중에 처형해도 된다는 말인가?”, “오늘은 공산주의자 차례라면, 내일은 내 차례라는 말인가?” 행정부의 독단으로 국민을 범죄자로 가두고 처벌하는 법률(Bill of Attainder)[126]은 죄형법정주의[127] 원칙에 어긋나 법률 무효가 된다. 비판하는 입이 무서워서 그 사람의 혀를 잘라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128]
국방권은 오직 전쟁 시기에만 행사되는 것으로 제한적이다. 그리고 전쟁 시기에는 국민 기본권의 제한이 용인되어야 한다는 해석은 정해진 원칙이 아니다.[129] “Inter arma enim silent leges” 이 라틴어는 키케로가 전쟁 시기에 적용되는 로마법의 원칙을 표현한 말이다. “전시에는 법이 유보된다” (In times of war, the law falls silent.)”는 뜻으로 전쟁과 같은 국가 위기 시기에는 국민 기본권이 제한될 수 있다는 논거로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전시 유보 원칙은 2차 대전 이후 서구민주국가에서 더 이상 유력한 법원칙으로 자리매김되고 있지 않다. 대신 “전시에도 법의 지배의 원칙이 지켜진다 amidst the clash of arms, the laws are not silent”는 원칙이 보다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전시에도 민간인에 대한 기본적 인권이 축소 제약되어서는 아니된다.[130]
5.6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민주·대의·정당 정치의 토대
호주공산당 케이스에서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권은 확인되지 못했다. 헌법상 보호되는 정치적 기본권 측면에서의 위헌무효라는 의견이 변론에서 제기되긴 하였지만 대법원은 정치적 기본권 측면에서의 논의를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공산당 당원으로써 유일하게 주의회 의원을 지낸 패터슨 변호사는 공산당을 위한 변론을 통해서 다음의 같은 주장을 펼쳤다.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 체제는 대의제 정부 형태인데 대의제 정부는 정당 정치를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민주주주의 정치 체제를 확립하려면 정치적 의사 표명의 자유가 필수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공산당 해산 법률은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헌법 체제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법은 위헌 무효가 되어야 한다고 변론에서 주장했다.[131]
하지만 대부분의 대법관은 오늘날 같으면 당연하게 보장될 정치적 기본권의 측면에서는 법률 검토를 다하지 못했다. 다만 레이셤 대법원장만이 한마디 언급하기는 했지만 정치적 기본권은 중요한 쟁점이 아니어서 받아들일 만한 논거가 되지 못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더구나 정부는 법률 제정의 전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단체라고 해서 다른 일반 결사 단체하고 달리 특별하게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132]
대법원은 딕슨, 맥티에르만, 윌리엄스, 키토 대법관이 언급한 바대로, 공산당 해산 법률은 행정부의 입법권의 일탈의 헌법 위반에 해당되어 그 법률 전체에 대해서 원천적인 무효가 됨을 선언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기본권 측면이나 다른 법적 쟁점들에 대해서 별도로 크게 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당 해산에 대한 위헌 소송이 오늘날 다시 벌어진다면 정치적 기본권 침해에 대한 부분이 보다 주요한 법률적 쟁점으로 부상하고 자세하게 논의될 성격이라는 예상은 누구든지 쉽게 동의할 것이다.[133]
1901년 발효된 호주 헌법은 미국의 수정헌법과 같이 국민 기본권 보장에 관한 권리장전의 규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호주 헌법은 미국과 독일 등 기본권 보장이 헌법 조항으로 들어가 있는 경우와는 차이가 난다.[134] 미국이나 독일 등의 헌법과는 다르게, 국민 기본권을 보호하는 권리장전 내용이 헌법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호주 헌법의 취약점이 노출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행정부의 독단으로 형사처벌을 할 수 없다는 원칙은 권리장전의 조항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헌법상 사법부의 독립 조항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그러나, 권리장전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특히 1951년 당시 매카시즘의 정점에서 있었던 국내외의 정치적 압박을 고려할 때[135] 호주 대법원의 공산당 해산 위헌 무효 판결은 대단한 법적 의의를 가진다고 짐작된다.[136]
호주연방대법원은 공산당을 강제 해산시키기 위해서 국방권에 근거하여 법률을 제정할 만큼 국가 방위에 위협이 되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한편 연방 정부의 법률 제정 권한은 연방 헌법 51조에서 열거한 경우에만 행사 가능한 반면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는 주의 고유 권한으로써 국가 방위에 위험이 초래되는 행위에 대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고 해석하였다. 다시 말해 각주의 고유권한으로서 특별 법률을 제정하여 형사 처벌할 수 있느냐의 문제하고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137] 이런 견해는 플라거 대법관의 의견이었고, 키토 대법관은 연방 정부 체제가 아닌 단일 정부 처제라면 법률제정권한의 문제는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대법원은 번즈와 샤키 사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형법(the Crimes Act 1914)의 내란 선동죄 sedition로 처벌하는 규정은 위헌이 아니라고 이미 판단했었다. 번즈와 샤키는 내란 선동죄로 기소되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에까지 상고하였으나, 대법원은 (미국의 1951년 데니스 판결과 마찬가지로) 유죄확정의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연방 정부가 공무원에 대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138]이 있으므로 의회가 정부 공무원 채용 때 공산주의자를 배제하는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의회가 국민들 가운데 공무원 신분과는 상관없이 어느 누구를 공산주의자로 판정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드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139] 이는 형식적인 법률 제정권한이 있다고 해도 실질적인 헌법 내재적인 제약성을 뛰어 넘어설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 연방대법원의 공산당 해산 위헌 무효 판결에 대해서 자유 문명세계의 뒤통수를 치려고 한 공산주의 마수를 “되던지기 The Throwback”한 것으로 평가한 뷸리틴 만평 (1951년 3월 14일)>
5.6 위헌 판결 이후 정치권 반응
6. 대법원 위헌 무효 판결에 대한 정부 여당의 반응
정부여당은 공산당 해산 법률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으나 1951년 3월 9일 호주연방대법원은 이 법률안에 대해 위헌무효의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의 위헌법률 판결이 나온 지 1주일 만에 정부여당은 상하원을 동시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초강경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의회를 통과한 공산당 해산 법률이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서 위헌 무효가 됨에 따라서 공산당 해산 법률이 무위로 되돌아가자 보수당 정부는 반공주의의 국민 여론을 등에 엎고 야당을 완전히 제압하고자 했던 것이다.
1951년 4월 28일 실시된 총선에서 집권여당 멘지 정부는 하원과 상원(총선 실시 이전의 상원은 야당노동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에서 모두 다수의석을 차지하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실시된 총선 결과는 하원에서 집권여당의 보수당 소속 52명, 국민당 소속 17명이었고, 야당 노동당은 52의석을 차지했다. 상원은 정부여당이 32석(자유당 27명 국민당 5명), 노동당이 28석을 차지함으로써 상원에서도 보수당이 다수당으로 올라섰다.
7. 국민투표 Referendum를 통한 헌법 개정의 방법으로 공산당 해산 추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멘지 정부는 대법원에서 위헌 법률 판결이 난 공산당 해산 방침에 대해 헌법을 개정하여 공산당을 해산시키겠다는 방침을 밀어 부치고 찬반 투표의 국민투표[140]를 추진하였다. 정부가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 개정을 의도했던 까닭은 연방대법원의 위헌 법률 선언 효과를 되돌리기 위한 목적 즉 공산주의를 대처하는데 정부의 권한을 더욱 확대하는 것이었다.
1951년 9월 22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대법원의 위헌 법률 선언이 나온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국민투표는 헌법에 51A조의 특별 규정을 삽입하고자 하는 정부여당의 헌법개정안에 대해 국민들의 찬반 여부를 묻는 간단한 형태였다.[141] 그 질문은 하나는 다름과 같았다: “당신은 “헌법 개정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에 대처하는 권한) 법률 (1951년)로 제안된 헌법 개정 법률에 대해 찬성하십니까?” 정부여당이 제안한 법률 내용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을 다룰 입법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대법원이 위헌 법률을 판결한 요지가 입법부는 그러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헌법에서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므로 국민투표를 통해서 헌법에 명시적으로 그러한 법률 제정 권한을 부여하게 되면 정부의 의도대로 공산주의자를 대처하는 법률을 제정하는데 있어서 어떤 헌법적 제약이 사라짐을 의미하였다. 연방대법원은 헌법에 직접적인 구속을 받는다. 헌법이 법률보다 상위의 지위에 위치한다. 따라서 만약 이러한 헌법 개정이 통과되었다면, 정부가 공산주의에 대처하는 법률을 제정하는데 있어서 헌법적 제약이 제거되고 정부는 전제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노동당의 국민투표 반대 캠페인과 보수당의 국민투표 찬성 캠페인 선거 광고>
당시 국민들의 여론은 반공주의 흐름을 지지하고 있었다. 갤럽 여론 조사에서 찬성 여론은 국민투표 선거일 2달 이전인 7월달 80%에 달했다가 8월달 73%로 약간 떨어졌다.[142] 공산주의에 대처하기 위한 법률 제정 근거를 헌법에 삽입하고자 하는 국민투표가 거의 통과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서 야당인 노동당은 국민의 양심에 호소하는 선거전략을 전개했다. 이 때는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한 헌법 재판에서 부두항만 노조를 대변했던 인권변호사 출신의 에바트 의원이 노동당의 당수가 되어 국민투표 부결 선거운동을 지휘하였다. 공산당 대처 법안을 지지하는 여론은 80%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국민투표를 부결시키려는 야당 노동당의 선거운동이 승리할 가능성은 비관적인 상황에 가까웠다.
하지만 국민투표 결과는 찬성 2,317,927표, 반대 2,370,009표로써 헌법개정안은 찬성표 49.44%에 머물러 과반수를 얻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대법원의 위헌 법률 판단에 대해서 정부여당이 유권자의 정치적 힘으로 다시 뒤집으려던 정치적 시도가 헌법 앞에 무릎을 끓게 된 것이었다.
정부여당이 공산주의의 위협에 적극 대처해야 된다는 명분으로 추진했던 국민투표[143]가 부결된 결과를 가져온 이유는 헌법 개정안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온 호주국민들의 보수적인 정서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144] 또 당시 매카시즘의 절정기에서 정부의 공산당 강제 해산 방침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다수이었으나 대법원에 의해서 위헌 무효의 판결이 난 사안을 다시 국민투표에 회부한다는 것에 대한 경계 심리와 국민기본권 침해에 대한 우려가 반영되었을 것이다.[145] 다수의 국민들은 공산주의에는 반대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민 기본권을 잠재적으로 침해할 수 있는 전제적인 권한을 내주는 것까지를 수긍한다고는 보기 어려웠을 것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야당 노동당의 헌법개정안 반대 캠페인은 국민의 자유 기본권 침해에 대해 의로운 반대투표를 던져달라고 국민의 양심과 정서적인 면에 주로 기대었고 또 이러한 선거 캠페인이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반공주의 물결이 거세었던 당시 정치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도 공산당의 강제 해산 국민투표안은 끝내 부결되었다. 국민투표 부결의 승리에 대한 의의는 다음의 말로써 충분히 공감된다: “국민들이 총선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 다음 번 선거에서 시정될 수 있지만 헌법 개정의 문제에서 한 번의 판단 오류를 범하면 그것은 자유와 정의로 짜여진 민주주의 옷감을 통째로 파괴해 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146]
<”호주의 전통: 독재 정권에 “아니오 No”라고 외쳐라!” 국민의 자유권이 위협을 받을 때 호주국민들은 언제나 아니오!를 외쳤다고 하면서 공산당 해산 법률 국민투표에 반대표를 던질 것을 호소하는 리버티 1951년 8월 28일자 1면.>
8. 누가 최종적인 헌법의 수호자인가?
공산당을 해산시키겠다는 방침을 총선 공약으로 내세우고 집권한 정부여당이 발의하고 야당의 동의를 얻어 의회를 통과하여 정식 발효된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해서, 그것도 국민 여론의 절대다수(80%까지 달했던)가 지지한 법률에 대해서 연방대법원이 원천적인 위헌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것은 당시의 공산주의 위협이 극에 달한 국제적인 냉전 상황과 파업 사태 등 어지러운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을 함께 고려해 볼 때 중요한 의미를 가진 판결이었음은 분명하다. 공산당 케이스는 헌법 해석의 역할을 담당함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헌법 해석의 문제는 행정부의 행위에 대해 최종적으로 사법부가 통제하는 사법 심사 judicial review의 뛰어난 전통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호주공산당 케이스는 권력 분립 the separation of powers과 법의 지배 the rule of law에 관한 헌법 원칙을 재확인해 주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판결이다. 비록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과 독일에서의 공산당 해산 판결과 비교해 보면 헌법 해석에 있어서 사법부 우위의 판례법 국가들의 뛰어난 법적 전통을 이해할 수 있다.
2차 대전 종전 후 보수당 정권으로 바뀌면서 대법원과 연방 정부와의 사이에 누가 더 큰 힘을 갖고 있는지 대립하는 권력 게임의 양상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미국의 제퍼슨 정부 시대에 사법부의 독립의 가져온 위대한 판결인 미국연방대법원의 1803년 마버리 사건과 비견된다. 마버리 사건은 미국연방대법원은 사법부의 기초를 놓은 법원조직법의 법률 조항을 위헌무효임을 선언하며 (그 결과는 연방대법원 자신의 권한 일부분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었다) 작은 이익을 희생해 가며 더 큰 사법부의 독립을 쟁취한 사건으로서 미국 대법원의 2백 년 역사를 통하여 길이 빛나는 전통적인 사례로 기억되고 또 현재까지 살아 있는 법으로 남아 있다. 미국의 마버리 사건과 같이 호주의 공산당 해산 법률 위헌 무효 판결은 사법부의 독립과 권력 분립의 원칙, 법의 지배[147]에 자유민주주의 헌법 기초에 관한 빛나는 영광의 승리의 기록으로서 전통적인 사례로 널리 기억되고 있다. 만약 호주대법원이 (독일의 헌법재판소의 판결과 같이)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해서 합헌의 결정을 내렸다면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영미 판례법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정당 해산 법률의 합헌성을 인정해 준 오명의 역사를 남기게 되었을 것이다. 대법원은 사법부 독립의 원칙을 행정부가 정치적 힘을 가장 높이 발휘했던 시기에 나타난 공산당 해산 심판 사례에서 확인해 주었다.[148] 행정부와 입법부의 모든 행위는 최종적으로 사법부의 심사 대상이 된다는 사법 심사 제도의 전통은 사법부의 독립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호주 공산당 케이스를 “획기적인 epochal” 판결이라고 칭송하는 이유는 분명하다.[149] 호주 대법원은 정부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까지 동의하고 상하원 양원을 통과하여 정치적인 합의를 이룬 그 법률에 대해서, 그것도 80%[150]에 이를 정도로 절대 다수의 국민 여론이 찬성하고 지지했던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해서 단호하게 위헌무효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 위헌 무효의 판결은 당시 소련 공산주의 위협이 극에 달했던 국제 정세와 매카시즘이 정점으로 치닫던 국내 정치 상황을 감안하고 또 미국과 독일에서의 정당 해산 판결을 비교해 보면 담대한 판결이었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와 같은 담대한 판결은 판례법 국가에서의 제도적 전통과 대법관의 양심이 아니고서는 감히 이뤄낼 수가 없을 “영광된 승리의 기록” (사후적으로 추존하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 실제로 적용되었다는 의미)으로써 길이 남을 역사적인 사건임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결론을 대신하여 원터톤의 평가를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공산당 정당 해산 심판 케이스에서 가장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국민의 자유권은 법원이 최후의 수호자인 ‘법의 지배’ 원칙을 공평무사하게 적용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비록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지만, 사법부에 맡겨진 마땅한 권한을 엄숙히 행사하는 불편부당하고 불굴의 용기를 가진 법원이 독재정권을 막아내는 최후의 방어막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매디슨이 멋지게 설계한 ‘견제와 균형 checks and balances’의 헌법 이론-즉 국가 통치 체제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3부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서 ‘스스로 통제된다’는 것-을 적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사법부 독립의 원칙은 갈등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 곳에서 사법부의 판결을 이끄는 오로지 검증된 안내자는 바로 엄격하고 확실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법의 지배’원칙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151]
9.
‘법의 지배’- 본질과 일반적 적용[152]
노르만정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어 온 영국 정치 제도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특징은 중앙정부의 절대성과 논란의 여지 없는 최고성이 전 영토에 관철되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국가의 이와 같은 군위는 국왕의 권력에 의해 대표되어 왔다. 국왕이 법의 근원이었고 질서의 유지자였다. “모든 권력은 국왕으로부터 탄생하여 국왕에게 귀속된다”는 법언은 현상을 그대로 묘사한 표현이었다. 이 국왕 최고성의 원리가 오늘날에는 의회주권으로 전환되었음은 앞서 본 바와 같다. 첫 번째 특징과 긴밀하게 관련되는 두 번째 특징은 법의 지배 내지 최고성이다. 영국 정치제도의 이와 같은 특징은 법은 국왕이 인정하는 최고의 지상명령이다. 왜냐하면 법 그 자체에 따라 모든 신민들이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며, 만약 법이 사라져 버린다면 어떤 왕도, 어떤 지상명령권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고전적인 법언 속에 잘 나타나 있다. 2부에서는 법의 우위성 즉 개인과 권리가 영국헌법이 어떻게 보장하고 있는가에 관해 다양한 관점하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유럽국가들과는 달리 영국이 법의 지배라는 원칙에 의해 통치된다는 사실을 우리 영국인들보다는 볼테르, 드롬, 토크빌, 그나이스트와 같은 외국학자들이 더욱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영국인의 생활과 정서에 배여 있는 합법성에 대한 찬탄은 1836년 당시의 스위스와 영국의 법제도와 생활양식을 비교 관찰한 토크빌의 논리정연한 서술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이점에 대해서) 내가 스위스와 비교하려는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영국이다. 여러분이 이 두 나라의 경우를 세심하게 관찰한다면 아니 한 번 쭉 훒어보기만 해도 두 나라간에는 놀랄 만한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인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점에 있어서 영국은 스위스 신교 공화국보다 더욱 공화주의적이다. 주요한 차이점은 양 국가간의 정치제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생활양식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스위스의 모든 주에서 언론의 자유가 인정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대부분의 주에서 사인의 자유권이 완전하게 보장된 적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행정절차만으로도 체포될 수 있고 엄격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구금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법원이 완전하게 독립된 지위를 가지지 못한다. 배심에 의한 재판제도가 없다. 몇몇 주에서는 38년 전까지만 해도 정치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다. 아르고 튀르고 테생 보오와 취리히 베른의 일부 지역에서 그러했다.
위에 열거한 차이점들은 제도적인 면에서보다 생활양식에 있어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i 상당수의 스위스 주에서 대다수의 시민들이 자기통치의 원리를 알지도 못하고 원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기 통치의 생활양식을 체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혼란기에도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영국인들이 평생 동난 추구하려 하는 정치적 권리에 대한 열망도 공적 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도 찾아 볼 수 없다.
ii 자유권의 관념을 최근에야 터득하였기 때문에 스위스인들은 언론의 자유를 남발한 나머지 스위스의 신문들은 지나치게 혁명적이고 영국신문들에 비해 실용적이지 못하다.
iii 스위스인들은 여전히 결사체를 프랑스인처럼 혁명의 수단으로 간주하고 모순의 개선을 위한 점진적이고 안정적인 수단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결사하거나 결사권을 행사하는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지극히 낮다고 할 수 있다.
iv 스위스인들은 영국인의 두드러진 특징인 정의를 추구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스위스의 법원은 국가 정치질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으며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정의를 추구하고 법관으로 하여금 정치의 영역에 대한 평화적이고도 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유도하는 것이 자유민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중의 하나가 아닌가?
v 마지막으로 (이점은 다른 요소들을 포괄하는 것이다) 스위스인들에게는 이방인들이 영국인들에게서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그것이 없다면 자유국가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덕목 즉 정의에의 존중 법에의 경애 폭력의 거부와 같은 덕목이 그 바탕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느낌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미국을 여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미국인 모두의 습관 속에 자유의 정신과 자유를 향유하고자 하는 열망이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느끼며 미국인들이 공화정부가 아닌 다른 체제하에 있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영국인들도 단순한 자유정부의 지배하에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만은 없다. 그러나 스위스의 경우는 다르다. 대부분의 주에서 공화제 정치제도가 폭력에 의해 붕괴되었을 경우 어느 정도의 과도기가 경과한 후 국민은 이와 같은 자유의 상실 상태에 적응하지 않으리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법에 있어서보다 생활양식 속에서 보다 광범한 자유를 감지할 수 있다. 스위스에서는 반대로 생활양식 속에서보다는 법 속에 더 많은 자유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루는 주제와 관련하여 토크빌의 설명은 두 가지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의 설명은 영국 정치제도의 독특한 특성으로 법의 지배, 법의 우위, 혹은 법의 최고성을 지적해 내고 있다. 그는 주목하기는 쉬우나 명확한 언어로 지적해 내기 어려운 모호한 국민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토크빌은 영국인의 생활양식상의 특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기술해 내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기통치의 습관과 질서의 존중 정의에의 경애 합법적 사고방식 등 잡다한 개념을 혼용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상호 긴밀하게 연관된 것들이어서 서로 혼용함이 없이는 정의될 수 없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토크빌처럼 영민한 학자조차도 영국인의 생활이 가지는 두드러진 특성을 묘사하는 데 당혹감을 느끼듯이 우리들 영국인들도 자신을 법의 지배의 숭배자로 묘사하는 경우나 영국 헌법이 가지는 특성으로 법의 최고성을 들먹일 때마다 실체는 분명하지만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여러 어구들을 사용해 왔다는 것은 부인못할 사실이다. 그러므로 법의 우위성, 최고성 내지는 지배라는 용어에 의해 외연지어지는 관념을 분명히 인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용어들로 우리가 기술하고자 하는 영국 헌법상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우리가 영국 헌법의 특성으로 법의 지배 혹은 최고성을 언급할 때 최소한 세 가지의 상호 관련적이면서 뚜렷이 구별되는 관념을 내포시키고 있다.
법의 지배 –그 첫 번째 의미- 일반법의 절대적인 우위 absolute supremacy or predominance of regular law
우선 국가의 일반법원에 의한 일반적인 법적 절차에 의하여 정립된 법을 위반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형사처벌이나 신체 혹은 재산상의 손해를 받지 아니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의미의 법의 지배 원칙은 권력자가 광범위하고 자의적이며 가변적인 속박권을 행사하는 통치체제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오늘날의 영국인들에게는 법의 지배 원칙(이러한 의미의)이 어떤 양식으로든 영국 정치제도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것이 의아해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법의 지배 원칙은 어느 한 나라의 자산이라기 보다는 문명화하고 질서정연한 국가라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특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 기성체제들을 들여다보면 이와 같이 좁은 의미의 ‘법의 지배’원칙조차도 영국이나 영국적 전통을 계승한 미국 같은 나라들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것임을 곧 깨닫게 된다. 거의 대부분의 대륙국가들은 체포, 일시 구금, 영토추방 등등의 문제에 관하여 영국정부가 법적으로든 사실상으로든 행사하는 권한보다 훨씬 광범위하고도 자의적인 권한을 보유한다. 유럽의 정치체제를 연구해 보면 볼수록 자유재량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자의적 행사의 여지가 있으며 정부의 재량적 권한이 결코 국민의 법적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은 왕정뿐만 아니라 공화정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는 상황이 변했다고 보아도 좋다.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에서 법의 지배원칙이 거의 영국 수준으로 정착되었고 적어도 정치계의 언저리를 맴도는 부류에 속하지 않는 사인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한 정부나 그 이외의 어떤 실체로부터 위협받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외국인들이 국왕이나 행정부 혹은 영국의 그 어떤 기관도 자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영국헌법의 독특한 특색으로 받아들이는 점이 영국인들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153]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외국 식자들이 영국 헌법을 분석하고 찬양하기 시작한 그 시대로 시각을 옮겨 보면 금방 사라질 것이다. 18세기에 대륙국가들이 폭압적인 정치체제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의적 권력으로부터 사인을 보호하는 대륙국가는 한 곳도 없었다. 영국의 선진성은 영국 통치체제의 선의성 내지 관대함에 있다기보다는 그 합법성에 있었다. 볼테르가 영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그 세대의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사람이다- 가장 절실히 느꼈던 것은 그가 전제체제의 국가로부터 법이 엄격히 시행되는 즉 인간이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것이었다.[154] 그가 그 차이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별게 아니다. 1717년에 그는 자신이 저술하지도 않았고 누가 저자인지도 모르며 그의 정서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 한 편의 시 때문에 바스띠유에 수감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영국인의 관점으로 볼 때 취급 과정에서의 문제점도 문제점이지만 섭정관이라는 사람이 이 일을 일종의 조크로 취급하여 실제로 감방에 가 본 적이 없음에도 “가 보았다”고 주장하는 저자를 시에서 염원한 대로 감옥에 보내 주었다는 사실이 더욱 기가 찰 노릇이다. 1725년 이미 대문장가로 각광을 받고 있던 볼테르는 한 대공의 만찬의 초대받자 군주의 면전에서 아첨꾼들로부터 심한 조롱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법적 명예적 보상을 받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욕받은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는 이유로 재차 바스띠유로 보내졌다. 물론 그 이후로 그가 왕림감옥에 드나든 적은 없었지만 평생 동안 그는 자의적인 권력의 행사 때문에 곤욕을 치루었던 것이다. 다만 그의 명성과 능력, 무한한 가지 때문에, 그리고 정 힘에 부칠 때는 재산을 털어서 일시구금 이상의 가혹한 형벌은 겨우 면할 수 있었을 뿐이다. 더구나 그는 재산과 생명을 보존한 대가로 결국에는 프랑스로부터 추방되는 신세가 되었다. 영국에서 인정되던 법의 최고성의 원칙이 18세기 당시에는 얼마나 예외적인 현상인가는 몰리의 “디드로의 일생”에 잘 그려져 있다. “백과사전”을 출판하기 위해 20여 년에 걸쳐 디드로 일행이 쏟은 노력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프랑스 정부의 변덕과 자의성을 보여 주는 극명한 증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국왕의 무법성은 루이 15세와 같은 유별나게 폭정을 일삼은 왕정에서만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프랑스 행정체계에 필연적으로 내포된 특성이었다. 적어도 루이 16세는 특별히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군주는 아니었으며 더더구나 가혹한 폭군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인 듯하다. 그러나 1789년까지 프랑스왕정에서 법의 최고성같은 것이 존재하였다고 상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미 1세기 이전에 쉬발리에 데옹의 어리석음과 불만 그리고 의혹 등이 오늘날 전문소송꾼이 뇌까리는 사기성 짙은 주장만큼이나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되새길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다만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존슨 아담 스미스 깊슨 코우퍼 버크 맨스필드가 활약하던 시대이자 미국 독립전쟁이 전행중인 시기 그리고 삼부회(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의 신분제 의회)가 소집중이던 1778년에 용감한 공직자나 저명한 외교관이라도 죄명도 모르는 채 재판이나 유죄선고의 절차도 없이 동양의 전제체제에서나 자행됨직한 야만적인 고문보다 더 심한 고행과 굴욕을 감수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155]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정부가 동시대 대륙의 다른 국가들 보다 더 전횡적인 정부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그와 같은 가정은 대륙의 상황을 오인한 데서 기인한다. 프랑스에서는 법과 여론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 또는 독일의 공국들보다 훨씬 더 존중되고 있었다. 프랑스와 같은 대왕국에서 일어나는 일이어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단 전제정치의 폐해는 그 폐해가 워낙 컸었기 때문에 오히려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던 나라들에서는 그야말로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프랑스 왕정의 권력이 수많은 소군주의 무법성보다 더 많은 비난을 받는 것은 프랑스 국왕이 여타의 소군주들보다 더욱 전제적인 통치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가 국제적 명성이 큰 나라인 만큼 프랑스인들이 다른 소국의 백성들에 비해 특별한 자유를 누릴 지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랑스의 고왕국이 전제정치의 전형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도 한몫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으면 전 유럽이 바스띠유의 함락에 그처럼 열광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바스띠유가 함락되던 그 순간 실상 그 속에 수감중이던 죄수의 수는 열 명도 채 되지 않았지만 같은 시기에 영국의 감옥들에는 무수한 채무자들이 구금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 영국인들은 20세기의 우리들로서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프랑스 민중의 승리에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반추해 본다면 문명사회가 전폭적으로 공유했던 정서의 근원을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다. 바스띠유는 불법적인 권력의 상징이었다. 바스띠유의 함락은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존재해왔던 법의 지배의 원칙이 나머지 유럽국가들에서도 정착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156]
법의 지배 –그 두번째 의미- 법 앞에 평등 equality before the law
영국 헌정의 특성으로서의 법의 지배 원칙 내지 법정신의 우위가 가지는 두 번째 의미는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만인은 그의 지위와 신분에 관계없이 국가의 일반적인 법을 준수하고 일반법원의 관할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점이다.
영국에서는 법 앞의 평등이라는 사상이나 일반법원에 의해 집행되는 하나의 법에 모든 계급이 공히 기속된다는 원칙은 최대한 존중된다. 세금징수원이나 순경에서부터 수상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공무원은 법적 정당성이 결여된 모든 행위에 관하여 일반시민과 마찬가지의 책임을 지게된다. 법정사례에는 공무원들이 법적 권한을 일탈하여 집행한 공무 행위에 대하여 법정에 소환되며 개별책임이 부과되어 손해배상이나 형사책임을 진 사건으로 가득 차 있다. 식민지의 총독[157] 특임대신, 군장교, 하부관료 등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상관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법에 근거하지 아니한 행위에 대해서는 사인과 마찬가지로 책임을 진다. 예를 들어 군장교나 성공회의 성직자와 같은 공직자는 영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에서나 마찬가지로 일반 국민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법의 적용을 받으며 어떤 경우에는 일반인들에게는 관할권이 없는 특별법원의 관할에 속하기도 한다. 즉 일정한 범위 내에서 ‘공직법’으로 불려질 수 있는 규범의 적용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영국 내의 모든 사람은 국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원칙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군인이나 성직자가 일반인이 면책되는 법적 책임을 부담한다고 하더라도 일반 시민으로서의 의무까지 면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국인 중에는 (우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두 번째 의미로서의) 법의지배의 원칙이 모든 문명사회에 공통되는 특성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실제로 18세기 말엽까지 국가 발전 단계에 있어 귀족 성직자 기타 특권자들이 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시기(영국은 이미 16세기가 다 가기 전에 이 단계를 청산하였다)를 거쳐 왔었다. 대륙국가들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법에 의한 지배를 받고 법원이 국가의 최고기관이라는 사실이 보편적 진리로 받아 들여진 것은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최근의 일이다. 대륙국가의 전형으로 프랑스를 예로 든다면 (국가의 공직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의미로서의) 공무원은 그의 공적 직위에 의해서 일반국법의 적용 대상이나 일반법의 관할에서 제외되며 특정 업무에 관하여는 공공기관에 의해 집행되는 공직법에만 기속되어 왔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법의 지배 – 그 제3의 의미- 헌법은 국가의 일반법의 결과 constitution, the result of the ordinary law of land
이제 영국 헌정제조의 고유한 제3의 특징으로 상술되어야 할 법정신의 우위성 내지는 ‘법의 지배’ 원칙에 대해 말하겠다. 헌법은 법의 지배의 원칙에 의해 실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헌법상의 일반원칙(예를 들어 개인의 자유권이나 집회의 권리 등등)이란 결국 법원에 제기된 특정한 사건들에서 사인의 권리를 규정하는 사법판결들의 결과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많은 외국의 헌정에서는 개인의 기본권에 대한 보장이 헌법의 일반원칙들로부터 도출 되어지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은 ‘헌법은 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는 것이다”라는 널리 유포되어 있지만 오해의 소지가 큰 법언에서도 언뜻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명언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면 넌센스다.
“(비록 이 명제가 때때로 무시되기는 하지만) 정치 제도는 인간의 작품이고 정치 제도의 탄생과 존속 여부는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인간이 어느 여름날 아침 문득 깨어보니 정치제도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또한 정치제도는 한 번 파종하기만 하면 인간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계속 자라나는” 수목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 존재하는 모든 단계에서 그들은 인간의 의식적인 활동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158]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간단하게 일출해 버릴 성질의 주장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한 국가가 취하고 있는 정부의 형태는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의한 산물로만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의 삶 그 자체의 자발성 생성물이라는 도그마는 비록 그 논리가 조야하고 부정확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정치적 원칙(영국 헌법을 포함하여)은 한 순간의 결단이나 제한된 시간 동안의 (통상적 의미의) 입법활동의 결과가 아니고, 사인의 권리들에 관하여 법원을 무대로 한 장기간에 걸친 대립의 결과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 간단히 말해서 영국 헌법은 법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헌법이며 그 표면에 판례법의 장단점이 속속들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국 헌법과 외국의 여타 헌법과는 구별의 실익이 충분한 차이점들이 있는 것이다.
영국 헌법에는 외국의 입헌주의자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기본권조항이나 선언이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영국 헌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원칙들은 사법적 입법 형식을 통해 형성된 모든 법언들과 마찬가지로 법관의 판결과, 판결과 마찬가지로 특정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입법된 특별제정법에서 도출된 것에 불과한 일반원칙이거나 의회 절대적 고유권한에 의해 선언된 사실상의 판결이다. 다소 다른 형식에 실제로는 동일한 내용을 부과하다보니 헌법상의 기본원칙과 사인의 기본권과의 관계가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헌법이 입법행위의 결과물인 벨기에 같은 나라에서의 양자간의 관계와 헌법 자체가 법적 판결에 기초하고 있는 나라인 영국에서의 양자간의 관계는 차이가 난다. 신중한 입법행위의 형식으로 헌법이 제정된 나라인 벨기에에서는 개인의 자유권은 헌법에서 도출되고 헌법에 의해 보호된다. 영국에서는 개인의 자유권은 법원의 판결에 의해 보호되고 인신보호법률들에 의해 확인되고 확장되기도 함으로써 헌법의 일부분이 된다. 법적 문제에 논리추론의 형식을 접목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벨기에의 헌법과 영국의 헌법 사이의 차이점은 벨기에에서의 사인의 기본권은 헌법원칙들로부터 연역되는 것인 반면에 영국의 경우에는 소위 헌법원칙들이 당사자인 개인의 권리에 관한 법원의 구체적 판결들에서 귀납되거나 일반화된 것이라는 데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차이점은 형식적인 차이점에 불과할 수 있다. 자유권은 영국뿐만 아니라 벨기에에서도 공히 보호된다. 또한 자유권이 공히 보호되는 한 개인의 자유권은 헌법에 의해 보장되기 때문에 사인은 모든 자의적인 체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개인의 자유권이 국가의 일반법에 의해 보장되기 때문에 개인의 신체의 자유, 즉 자의적인 체포로부터의 보호가 헌법의 일부를 구성한다고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사인의 권리가 실제로 항상 보장되는 경우에는 단지 형식적인 면에서의 이 차별성이 별로 중요한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신체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 불확실한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즉 개인의 권리보장에 관한 문제는 어떤 사람이 의식적이든 비의식적이든 헌법을 형성함에 있어 권리의 규정이나 선언으로 목적을 달성하려 했는가, 아니면 인정되거나 보장되는 권리에 대한 구체적인 권리구제의 방법을 통해서 목적을 이루려 했는가의 여부에 따라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오늘날 외국의 헌법제정자들은 대부분 권리선언의 방법을 택했다. 이 점에 관한 한 그들이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그 방법의 선택은 종종 그들이 처한 상황을 강조하거나 법의 일반원칙의 정립은 입법부의 고유한 본질적인 권한이라는 주장에 의해 정당화되곤 한다. 그러나 역사는 외국의 입헌주의자들이 권리를 정립하는 데 몰두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정립한 권리들이 실행될 수 있도록 하는 적절한 구제조치에 관한 규정의 절대적인 필요성에는 별반 관심을 표명하지 않아왔음을 생생히 보여 준다. 프랑스의 1791년 헌법은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정부공무원의 책임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최고조로 달했던 이 시기만큼 위에 열거한 여러 권리들이 거의 완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불안정한 보호를 받았던 적이 인류역사상 또 언제 있었던가? 어떤 평자가 현재의 프랑스 공화정하에서 겨우 보장되기 시작한 수많은 기본권들이 영국 왕정에서만큼 보장되고 있는지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달리 표현하자면 사법적 입법의 강점이랄 수 있는 권리실현의 수단과 실현되는 권리와의 불가분적 관련성이 영국 헌법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권리 있는 곳에 구제수단이 있다”는 법언이 다소 동어반복적인 명제보다는 더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법언의 헌법적 함의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헌법이라고 불리어지는 복합적인 법체계와 정치제도를 점진적으로 형성해 온 영국인들이 인간의 혹은 영국민의 권리선언이라는 방법보다는 특정한 권리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구제절차와 (전자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지만) 구체적 불법을 시정하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방법을 취해왔다는 것이다. 인신보호에 관한 법률들은 어떤 헌법원칙을 선언하거나 기본권을 명문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인의 자유권을 보장하려는 수많은 헌법 조항들과 맞먹는 실질적 목적들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국 헌정제도 속에 스며 있는 법의 정신에 근거한 권리와 구제절차간의 이 같은 관련성이 성문헌법의 존재와 양립불가능 하다거나 헌법에 의한 권리의 선언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미국 헌법과 각주의 헌법들은 성문화되어 인쇄된 문서의 형태로 기본권을 선언하고 있다.[159] 그러나 미국의 정치가들은 미국 헌법에 의해 선언된 권리들에 법적인 보호책을 마련하는 장치를 강구하는데 남다른 기술을 과시하여 왔다. 법의 지배의 원칙은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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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말하지만 영국에서 법적 형식의 헌법은 법원이 사인을 보호하는 권리의 일반화에 다름 아닌 반면에 여타의 국가들은 신체의 자유와 같은 개인의 권리가 헌법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처럼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헌법에 의해 보호되는 일반적인 권리는 특히 외국의 경우에는 언제나 적으로 유보될 수 있다. 개인의 자유권이 보장된다는 베릭에 헌법의 선언은 영국의 법률가들이 그와 같은 권리를 다루는 방식과 아주 다른 방식으로 개인의 권리를 바라보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영국에서는 어떤 권리가 다른 권리보다 더 철저히 보장된다고 할 수 없다. 자의적인 체포를 당하지 아니할 자유, 그 자신의 재산권을 향유할 권리, 증상모독에 대한 보상이나 명예훼손적이나 치안방해적인 언동에 대한 책임을 수반하는 의사표현의 권리는 영국인들에게는 국법이라는 동일한 토대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헌법이 일단의 권리를 다른 권리들보다 더 많이 보장한다’고 말하는 것은 영국인들에게는 비정상적이고 무의미한 표현방식으로 보인다. 벨기에 헌법의 문언들은 제한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헌법이 변경되지 않는 한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률은 제정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점은 지금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개인의 자유권이 헌법의 일반원칙들에서 연역되는 그 권리들이 유보되거나 삭제될 수 있다는 생각이 쉽게 생긴다는 점이다. 외와 반대로 개인의 자유권이 국가의 일반법에 고유한 것이라는 이유로 헌법의 일부로 된 경우에는 이 권리는 국가의 생활양식이나 정치제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파괴할 수 없는 권리인 것이다. 소위 ‘인신보호 법률의 유보’가 대륙국가들의 ‘헌법적 권리의 유보’라고 불리어지는 것과 실질적인 유사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인신보호 법률을 유보시키는 제정법은 그 대중적 명칭이 내포하고 있는 것에 훨씬 못미치는 효력을 가질 뿐이다. 또한 상당히 엄중한 조치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사인의 권리의 보호에 대한 특정한 구제수단의 유보에 불과하다. 인신보호 법률이 유보되더라도 영국인들은 시민으로서의 대부분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다. 법의 지배, 헌법 유보의 원칙에 토대를 둔 헌법(그것이 상정가능하다면)은 하나의 혁명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다.
이와 같이 헌법의 근본원칙을 구성하는 법의 지배라는 원칙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각기 다른 세가지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의 지배원칙은 우선 자의적 권력의 영향과 대립되는 의미로서 일반법의 절대적 우위와 최고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부의 자의성, 대권, 나아가 광범위한 재량권의 존재조차도 부정한다. 영국인은 법에 의해서만 지배되며 개인은 법률 위반으로 처벌될 수는 있어도 그 외의 다른 어떤 실체에 근거하여 처벌될 수 없다.
또 법의 지배원칙은 법 앞의 평등 즉 일반법원에 의해 실현되는 국가의 일반법률에 모든 계층이 공히 평등한 적용을 받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런 의미의 법의 지배 원칙은 일반법원의 관할이나 일반시민에 적용되는 법에의 복종 의무로부터 공무원이나 특정인이 면책될 수 있다는 사고를 용납하지 아니한다. 영국에서는 프랑스의 행정법이나 행정법원에 상응하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다. 외국의 국가들이 채용하고 있는 행정법이라는 개념의 바탕에는 정부나 공무원이 관련된 사건은 일반법원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으로서 특별법원이나 행정적 성격의 기국에 의해 다루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 같은 관념은 영국법에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것이며 실제로 영국의 전통과 관습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법의 지배 원칙은 법적 형식의 헌법 즉 여타의 외국들에서는 본질적으로 헌법전에서 도출되는 법원칙들은 영국에서는 법원 source이 아니라 법원 court에 의해 실현되고 규정된 개인의 권리의 결과들이라는 사실을 표현하는 공리로서 사용된다. 간단히 말해서 사법 private law의 원칙들이 법원이나 의회의 행위에 의해 확장되어 국왕이나 그 신하들의 지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헌법은 국가의 일반법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나 법의 지배의 본질에 대한 일반적에서 우리가 얻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가 그 원칙이 상이한 여러 국면과 단계에서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헌법의 주요 규정 속에 스며 있는 그 영향력을 추적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영국법이 다음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신체의 자유권, 표현의 자유, 집회의 권리, 계엄법의 사용, 군대의 권리와 의무, 공공재정의 징수와 지출, 내각의 책임 등이 그 주제들이다. 영국 정치 제도의 특징인 법의 지배원칙의 본질을 보다 심도 깊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많은 대륙법국가들이 채용하고 있는 행정법의 관념과 대비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 주제들을 관계된 장에서 개별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들은 이 책의 목적이 예를 들어 인신보호 법률이나 국민의 자유권을 보호하는 여타의 입법에 대한 세세하고도 완벽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 열거한 헌법상의 주요한 주제들 즉 헌법의 ‘조항들’이 영국 정치제도 전반에 걸쳐 국법의 최고성 원칙에 의해 지배되고 또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규명함에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160] 머지 않은 장래에 법적 형식의 헌법’이 성문화된다면 내가 다룬 이 주제들은 헌법전의 각 절로 다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다룬 많은 주제들은 실제로 외국의 성문헌법 특히 영국 입헌주의의 핵심명제를 거의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는 벨기에 헌법을 많이 다루고 있다. 나는 우리의 주제를 다룰 때의 편의를 위해 벨기에 헌법을 비롯한 외국 헌법을 인용함으로써 그 헌법들에 명문화되어 있는 (예를 들어 신체의 자유 같은) 권리가 영국의 법률들에서 어느 정도 인정되고 있는지 그리고 인정되는 경우 법원에 의해 확인되고 실현되는 방법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비교 검토해 보려 한다. 법적 형식의 헌법이 불완전한 것으로 이해되는 이유는 외국의 헌법규정들과 조목조목 비교하면서 검토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본서에서는 비교 검토는 어떤 대상을 파악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명제를 꿋꿋이 실천할 작정이다.
6. 독일민족민주당 (NPD) 정당 해산 심판
2003년 3월 18일 판결 BVerfGE 107, 339
6.1. 사실 개요
2001년 1월 30일과 3월 30일 각각 독일 연방정부와 연방의회(하원 Bundestag, 상원 Bundesrat)가 극우 신나치주의 정당인 독일민족민주당 (NPD)에 대해 위헌정당 해산 심판을 청구하였다
NPD는 1964년11월 28일 결성되었고, 인종차별주의의 심벌 "스킨헤드 skin heads"로 잘 알려진 폭력적인 신나치주의 극우파 조직으로써 독일 헌법을 부정하고 제4제국의 건설을 당목표의 하나로 추구한다. NPD는 1966년, 1968년 주의회 선거에서 최저 5.8%, 최고 9.8%의 득표율을 얻었고, 주의회에 진출했다. 그러나 1969년 총선에서는 4.3%의 득표율에 머물러 비례대표의석 “5% 관문”[161]을 넘는데 실패했다. 1969년 당원 수가 최고 28,000명에 달했지만 그 이후로는 계속 감소추세를 나타냈다. 1998년 2002년 총선에서 각각 극히 미미한 0.3%, 0.4% 득표율에 불과했다. 2000년 NPD당 청년조직 JN의 조직원 수는 500명 정도이었다. 당기관 월간지 “독일의 소리” 발행부수는 약 1만부 정도였다.[162]
극우파 정당 NPD에 대한 해산 청구는 중도좌파 슈뢰더 수상 정권에서 제기되었다. 정부 실력자들 중엔 젊은 시절에 급진극우파에 맞섰던 진보성의 인물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신나치 극우파 NPD 정당 해산 심판 청구의 배경은 2000년 11월 베를린 거리에 20만 명 이상이 집결하여 “양심의 분노 Aufstand der Anständigen” 시위를 벌이며 신나치주의의 위협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주문할 정도로 독일의 정치 사회적 분위기는 신나치주의 정당 NPD의 부상에 큰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163]
청구인[164]은 기본법 제21조2항에 따라 NPD는 위헌 정당이고, 또 NPD의 청년조직인 “JN”과 또 NPD당 소식지를 발행하는 당부설 출판매체 조직인 “독일의 소리”도 해산될 것을 청구하였다.
6.2. NPD 반론
NPD는 청구 사실에 대해 증거가 없다고 청구 원인을 부정하였고, 정당 해산은 정당한 비판을 입막음하려는 수단이라고 반박했다. 재판 기일 지정과 증거 제출 등 중간재판 과정에서 헌법보호청 verfassungsschutz의 정보부요원들이 NPD 정당 조직 지도부층에 몰래 침투해 조사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불법 수집된 증거의 배척 등 여러 소송법상 기술적인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NPD는 정당 해산 심판을 진행하기 어려운 특별한 절차적 사유가 발생하였음을 이유로 심판을 중지해 줄 것을 청구하였다.
6.3. 법적 쟁점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사이에 피고인 정당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리려면 재판관 3분의2 이상의 다수결을 요한다는 헌법재판소법 규정에는 재판관 사이에 별다른 이견이 없이 모든 재판관이 동의하였다. 재판관 사이에 의견이 다른 부분은 정당 해산의 본안 사건을 다뤄야 할 어떤 특별한 사유가 존재하는지 여부에 있었다. (i) 정당 해산 심판은 고도의 절차적 정의가 보장되어야 하는 특별한 성격의 재판인지 여부 (ii) 정당을 감시하는 국가 정보부 요원들의 정보 수집 활동이 지나쳐서 헌법상 보장되는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지 여부 (iii) 정당 해산 심판에 요구되는 예외적이고 특별한 사유의 존재 여부 즉 정당 해산이 요구될 정도의 “급박하고 현존하는 위험 konkrete Gefahr”[165]이 존재하는지 여부가 주된 쟁점이었다.
6.4. 판결 주문
헌법재판소의 주된 관심 영역과 쟁점은 국가정보부 요원들이 피고 정당의 지도부에 깊숙이 침투하였다는 사실이 피고 정당의 기본권의 침해할 정도로 헌법상 절차적 정의 요건을 위반하였는지 여부에 있었고 NPD 정당이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에 어긋나는지를 판단하는 실질적인 본안 사안은 헌법재판소의 주된 관심 사항에 오르지 못했다.[166] 헌법재판소는 NPD 정당 지도부의 정치적 의사 형성 활동 과정에 국가정보부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은 헌법 재판에서 요구되는 재판의 공정성을 해치는 회복불가능한 장애로 작용한다는 결론에 따라 2003년 3월 18일 NPD 정당 해산 심판청구에 대해 소송 종료의 판결을 내렸다.[167]
6.5. 재판 심리 경과 과정
2001년 10월 1일 헌법재판소는 정부가 제기한 NPD 정당 해산 심판 청구를 받아들이고 정당 해산에 대한 헌법 재판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2001년 7월 피고 정당 NPD는 중간 재판 motion 가처분 소송에서 승소하였다. 연방검찰이 NPD의 변호인 말러 Mahler의 사무실을 압수 수색하여 가져간 컴퓨터 자료들을 반환하라는 요구에 대해 이를 헌법재판소가 전원일치 의견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말러는 반유대주의 발언으로 형법상 수사를 받고 있었는데 헌법재판소는 이를 별건으로 다루지 않고 정당해산 심판에 병합하여 다루었다. NPD의 변호사인 말러는 자신에 대한 압수 수색은 공정한 재판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헌법재판소가 NPD의 가처분 청구를 받아들인 이유는 검찰의 변호인에 대한 위압적인 수사는 고도의 공정성이 요구되는 헌법 재판에서 공평한 재판과 절차적 정의를 위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NPD가 유럽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하였지만 2001년 11월 22일 헌법재판소는 NPD의 유럽사법재판소 제소는 법적 근거가 없다고 불허했다. 2002년 1월 22일 헌법재판소는 2월 중에 정당 해산에 대한 본안심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으나, 1월 28일 연방헌법보호청의 정보 요원들이 NPD조직 수뇌부에 몰래 침투해 조사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재판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또 증거가 조작되었다는 주장과 당원 활동에 대한 증인 신청 문제 등 여러 소송절차법적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2002년 3월 11일 NPD는 국가정보부 요원의 NPD에 대한 불법적인 증거 수집은 법정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또 연방헌법보호청의 정보 요원들이 NPD의 상임 집행 위원회에 15%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사실 등 국가 정보부 요원들이 NPD 정당 활동에 깊숙이 침투했거나 또는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사실들이 재판과정에서 밝혀졌다. 2002년 11월 29일 해신 심판 청구인들(정부 및 의회)은 법정 증인들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고 답변했다. 불법 수집한 증거들에 대한 증거 배척의 문제 등 소송절차법기술적이고 적법 절차의 소송법문제들이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NPD는 정당 해산 심판을 계속 진행하기에 어려운 재판 결격 사유가 발생하였음을 이유로 정당 해산 심판을 중지해 줄 것을 청구하였다.
여기서 헌법재판소법 15조4항의 규정이 재판 속개 여부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규정에 따라 정당 해산 심판에서 피고 정당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리려면 재판관 3분의2 이상의 다수결 즉 8명의 재판관 중 6명의 재판관으로부터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요건이 존재하였다.
헌법재판소는 정당 해산 재판 진행을 계속하기 어려운 특별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재판관 4인에 이른 반면 재판 진행의 절차적 장애 사유가 발생하였다는 견해가 재판관 3인에 이르렀다.
이렇게 6명의 재판관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 이르자 헌법재판소법의 규정에 따라서 절대다수의견이 도출되지 못해 청구주문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결국 헌법재판소는 2003년 3월 18일 NPD에 대한 정당 해산 심판을 종료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6.2. 판결 이유
적법 절차 요건과 재판의 공정성
헌법재판소의 주된 관심사는 정당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침해하는지 그러한 위험성을
판단하는 데에 있지 않았고, 대신 국가 정보부 요원이 정당 활동에 깊숙이 개입한 사실들이 들어난바 이러한
사실들이 헌법상의 적법 절차[168] 요건에 부합하는지의 재판 공정성의 문제에 보다 큰 관심을 두었다.[169]
정당은 정치적 의사 형성을 형성하고 정권을 탄생시키는 정당정치의 현실을 감안하여 “국가의 정당 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정당 활동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 중요하다. 정당 해산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그것도 “양날의 칼”인 위험성이 큰 제도이므로 정당 해산의 헌법 소송은 재판의 공정성 등 “최고도의” 절차적 정의가 보장되어야 한다.[170] 헌법 재판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비밀 정보 요원들이 수집한 증거들은 배척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3명의 재판관이 가진 소수의견은 최소한 6명의 재판관의 다수의견이 확보되지 않으면 불리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헌법재판소법의 규정에 따라서 재판부 전체의견(4명의 재판관은 숫자로는 다수의견이지만 6명의 재판관이 동의해야 하는 사안에서 4명의 재판관밖에 얻지 못한 관계로 헌법재판소 판결의 결과에서는 반대의견 dissent으로 바뀌게 되고, 3명의 재판관은 숫자로는 소수의견이지만 재판부 전체 의견으로 채택된 결과 실질적으로는 다수의견 the majority opinion) 법정의견이 되면서 결국 헌법재판소는 정당 해산 심판 진행을 거부하는 의미인 소송 종료 선언을 판결했다.[171]
6.2.1. 법정 의견 (3인 재판관)[172]
정당해산 심판을 속개할만한 특별한 사유가 없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문 주요 부분을 번역[173]하면
다음과 같다.
정당의 기능과 역할의 중요성
“정당은 기본법 9조1항에서 규정하는 일반 결사 단체와는 달리 기본법상 헌법 질서에서 위치는 지위를 갖고 있다. 기본법 21조1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바대로, 정당은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 과정에 필요하고 헌법 기관의 지위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는 선거권자인 국민이 국가 작용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정치적 의견을 자유로이 집약, 참여, 형성하는 체제이고 정당은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 정치적 행동 단체 조직이다. 정당은 투표에 의해서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실현하는 민주 국가에서, 국민과 국가 기관을 연결하는 중간 매개체 역할을 수행한다. 정당은 민주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 형성 과정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공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국가 정보 수집 활동과 국가의 정당 활동 개입 금지 원칙
국가 정보기관이 정보 수집 수단을 이용하여 정당을 감시할 수 있는 한계점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독일헌법재판소에서 판결이 내려진 적이 없었다. 이번의 본 NPD 정당 해산 심판 건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특별히 규정된 조항과 관련하여 매우 복잡한 문제가 노출된 영역에서 나타나는 문제다. 국가 정보 기관 요원과 위헌성의 문제가 걸려 있는 정당의 지도부 사이에 연방 및 주정부 차원에서의 정보 수집과 교류를 해나가는 것은 기본법 21조2항에 따른 정당 해산 헌법 재판에 적용되는 헌법 원칙들에 어느 정도 부합되는가? 그러한 경우 예상되는 문제점이 더욱 커지는 때는 둘 사이에 비밀 정보 교류가 정당 해산 심판 청구와 직접 관련되어 행해지는 경우다. 더욱이, 정당 해산 심판 청구 근거들이 국가 기관과 비밀 정보 연락을 취하거나 취해온 정당 구성원의 공적 진술에 부분적으로 의존을 한 정당 해산 심판의 경우 입헌주의 법치국가 헌법 원칙[174]과 관련된 절차적 요건이 어느 정도까지 지켜져야 하는가?
기본법과 헌법재판소법 어느 곳에서도 정당 해산 심판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절차적인 요건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절차적 요건을 위반한 경우 법률적인 효과에 대해서도 명시적인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회복불가능한 절차적인 흠결을 이유로 재판 중지를 내릴 수 있는 있다는 것과 그에 대한 요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어떤 규정이 없다. 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례가 존재하지 않았다.
형사법상 요구되는 최소한의 절차적 요건이 존재한다는 것은 헌법 원칙이고 이는 명확히 법으로 확립된 내용이다.… 국가의 공익 추구가 국민의 기본권과 충돌될 때는 형평성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
기본법 21조2항에 따른 정당 해산 심판에서 헌법재판소가 준수해야 할 두가지 책임이 있다. 첫째 헌법재판소는 정당의 위헌성 여부를 판단하는 일과 또 헌법재판소법 46조3항에 따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헌법 기관이다. 둘째 헌법재판소는 판결을 내림에 있어서 헌법상 요구되는 헌법 원칙들을 준수하고 보장하여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만약 헌법 재판 과정에서 헌법의 목적 또는 피고 정당의 실질적인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되는 경우, 헌법재판소는 재판을 진행하여야 할 국가적 공익이 우선적으로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해서 검토해야 하고 또는 재판의 진행이 입헌주의 법치국가 원칙상 요구되는 재판 원칙의 준수와 피고 정당의 권리를 헌법상 충분히 보장하여야 한다는 헌법적 원칙과 충돌하는지 여부를 검토하여야 한다.
해산 심판의 즉각적인 중지라는 절차적 판결을 내리는 것은 헌법 위반 가능성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으로 여겨질 수 있고 또 그것이 특별히 위험을 미리 방지할 목적으로 이뤄지는 기본법 21조2항 규정의 정당 해산 심판 요건에 부합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정당 해산 심판이 중지 결정을 내리는 데는 세 가지의 전제 요건이 따른다. 첫째, 헌법 위반의 정도가 상당히 중대하다는 점이 존재해야 한다. 둘째, 재판 진행으로 인한 헌법 위반이 입헌주의 법치국가 법원칙상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큰 손해를 가져와야 한다. 셋째, 위헌 정당으로 선언될 가능성이 있는 정당이 야기할지 모르는 위험으로부터 효과적인 보호를 하기 위한 국가의 공익을 고려하는 때에도, 헌법 위반의 결과로 인한 해악이 입헌주의 법치국가 법원칙상 재판 진행을 용인할 수 없을 정도로 커야 한다.
헌법재판소에 정당 해산 심판을 제기하기 전과 제기한 후에도 국가 정보기관의 요원이 정당의 전국 상임 집행부 또는 주 상임 집행부 일원으로서 활동하면서 정당을 감시하는 것은 일응 입헌주의 법치국가 법원칙 요건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러한 재판 절차적 원칙 요건은 기본법 20조3항의 입헌주의 법치국가 원칙과 함께 기본법 21조1항과 2항에서 도출된다.
독일연방정보기관은 자유 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보호할 헌법상 의무를 지고 있다. 정보기관은, 일반원칙으로써, 법률적 근거에 따라 단체와 정당들이 자유 민주주의 기본 질서에 위협이 되는지 여부를 판단할 목적으로 이들을 감시할 때 법치국가 원칙상 수반되는 의무를 지켜야 한다. …
국가 정보기관 요원이 정당의 전국적 또는 주 지방 조직의 상임 집행부의 일원으로 침투하여 활동하였다는 사실들은 정당의 의사 형성과 정당 활동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정당 감시는 기본법 21조1항이 보장하는 정당 활동의 자유에 중대한 침해를 가져왔다.
헌법재판소는 본안 사건에서 정당의 주와 연방 조직상의 집행부를 구성하는 일원과 정보 기관 사이의 비밀 정보 협력이 바로 위헌에 해당된다고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러한 결론에는 중대한 위험이 존재하는 특별한 상황이 참작되었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기본법 21조2항에 따라 헌법재판소에 정당 해산 심판이 제기된 직전 또는 제기된 이후에도 국가 기관이 정당의 지도부 차원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경우라면 헌법에 따른 판결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정당 설립의 자유와 정당에 부여된 자유를 헌법상 보장한다는 것은 국가의 개입과 간여로부터 자유와 자기 결정권[175]의 원칙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정당 해산 심판이 제기된 이후에는 입헌주의 법치국가 원칙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공정한 재판 원칙으로 지칭되는 특별한 절차적 보호 장치가 보충되고 강화됨을 말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당 해산 심판의 특별한 성격 특히 형사 재판 절차와 대조되는 점을 우선 강조한다.
형사 재판 절차는 범죄자의 개인 행위를 입증하고 처벌하는 것을 다루고 또 국가의 형사 처벌권을 집행하는 것 따라서 주로 국가의 형벌권의 보장을 다룬다. 반면에 기본법 21조2항의 정당 해산 심판은 국가 통치 체제 제도의 하나인 자유 민주주의 헌법 체제를 예방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초점이다. 여기서 단체조직으로써 정당은 국가와 헌법의 잠재적인 적으로써 보는 것이다. 원고(정부, 의회)가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정당 해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피고 정당은, 헌법에 충실한 기관의 이미지를 갖추고, 헌법재판소 앞에서 공공의 의견과 정부의 정책 결정을 형성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자유민주의 헌법 체제의 이익을 위해서도 분명하게 필요하고 또 정당하다며 원고의 주장을 반박하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기회를 부여받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국가 개입으로부터 자유와 자기 결정권의 관점에서, 정당 설립과 정당 가입의 자유는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인 국가 그리고 감시하는 정당으로부터 나오는 충성도가 서로 충돌되는 것에 직면한 지도부의 일원은, 헌법재판소 앞에 피고인 정당의 지위를 근본적으로 약화시킨다. 그들은 자유와 자기 결정권에 따른 정당의 자화상을 필연적으로 거짓으로 만든다. 헌법 재판에서 자유와 자기책임을 가진 정당의 모습은 입헌주의 법치국가의 관점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그 요건에 정당 해산 심판에 임하는 피고 정당의 “재판 절차상의 전략”에 대해 원고가 사실적 정보를 갖고 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국가와 정당 사이에 법률적 그리고 사실적 연계가 되어 있는 “이중적 지위” “중간 전달자 매개체 역할”의 단순한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 국가 정보 기관의 감시에 대해서 피고 정당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런 감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위협을 느꼈는지 또는 다소간 국가 세포 조직을 노출시킬 기회로 이용했는지 여부 등은 여기에서 따질만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당 해산 심판에 회부된 정당의 주관적인 견해가 아니라 오로지 객관적인 사실만이 헌법 재판에서 고려된다.
기본법 21조2항과 헌법재판소법 13조2항과 43조에 따른 정당 해산 심판에 요구되는 입헌주의 법치국가 헌법 원칙에 기초한 요건은 감시당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국가의 개입과 간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것, 정당 의사의 자기 결정권, 헌법재판소 앞에 정당 자신의 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야 할 것 등이다.
헌법재판소의 정당 해산 명령은 민주주의 헌법 체제가 조직화된 적에 대한 가장 예리한 무기이고 더욱이 “양날을 가진 칼”[176]이라는 점에서 재판 과정에서 최고도의 법 확실성, 투명성, 예측가능성, 신뢰성을 요구한다. 또 이러한 원칙은 사실의 확정 문제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정당의 위헌성 또는 합헌성 여부에 대해서 입헌주의 법치국가 법원칙에 따라 진행된 재판의 결과 원고 또는 피고에 관련된 사람, 행위, 진술서에 관하여 명백하고 공개된 책임 규명이 나올 때에 비로소 헌법상 적법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177]
입헌주의 법치국가 법원칙 측면에서 재판의 형식과 진행에 대한 헌법적 요건을 위반하여 재판을 속개하는데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가져왔는지에 대한 판단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판단의 영역이 아니다. 정당이 야기할 지 모를 위험으로부터 효과적인 보호를 하고자 하는 국가의 공익을 고려할 때라도, 재판의 진행이 입헌주의 법치국가 법원칙 측면에서 더 이상 불가능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헌법 위반과 위헌 심판의 중요성은 구체적인 절차적 상황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또 그것에 의해서 판단될 수 있다. 또한 정당 해산 심판의 재판 정지로 인해서 일어날지 모를 실제적으로 위험스런 상황에 대하여 적정한 형평성을 찾는 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정부가 2001년1월30일 정당 해산 심판이 헌법재판소에 제기한 때 그 직전과 직후에 관계한 연방과 주 정보 기관의 피고 정당에 대한 감시의 성격과 수준은 헌법상의 요건을 위반한 것이다. 정당 해산 심판을 제기한 근거로 삼은 피고 정당의 구성원-이들은 정부 정보 기관의 비밀 요원들이거나 요원들이었다-에 의한 진술서 또한 헌법상의 요건을 위반한 것이다.
원고들이 제출한 문서 자료와 정보 기관의 장이 제출한 공식 서류들을 살펴보고 2002년 10월 8일 헌법재판소의 중간 재판 결과에 따르면 피고정당의 연방과 주 조직의 상임집행부에 정보부 비밀 접촉이 정당 해산 심판의 제기 직전과 직후에도 이루어졌음은 헌법재판관 전원 일치로 인정된 사실이다.
…(판결문에서 헌법재판소는 그러한 결론에 이르는 구체적인 사실들을 적시하고 설명했다.)
기본법 21조2항에 의한 정당 해산 심판에서 피고 정당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간여를 분명하게 금지한 규정을 지켜내지 못한 사실, 입헌주의 법치국가 법원칙을 위반한 이런 흠결은 치유될 수 없는 문제에 해당한다.
기본법 21조2항의 정당 해산 심판은 구체적이고 예방적인 목적의 재판 성격임을 감안할 때, 본 사건에서 재판 속개를 예외적으로 정당화할만한 특별한 사유는 발견되지 않는다.
확립된 입헌주의 법치국가 법원칙상 요건을 심각하게 위반하였다는 것뿐만 아니라 재판을 계속 진행하는 것이 국가의 공익에 부합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도 마찬가지의 결론에 이른다.
6.2.2. 반대 의견 (4인 재판관)
정당 해산 심판의 재판 속개가 타당하다
정당 해산의 재판을 계속 진행하는 것에 대한 ‘절차적인 장애 Verfahrenshindernis’ 요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나머지 4인의 재판관[178]의 의견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재판 중지보다 더 약한 단계의 조치 예컨대 국가정보부 요원이 NPD 정당 지도부에 침투한 문제의 경우 증거 채택여부로 다툼이 있는 증거들에 대해서는 증거 채택을 배제하는 등 증거법 원칙에 따라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179] 그리고 헌법재판소가 진실 발견의 권한과 의무를 갖고 있다.[180]
둘째, 법적 구제책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헌법상의 책무 Justizgewährpflicht에 기초하여 정당 해산 심판은 계속 진행되어야 함이 타당하다.[181]
셋째, 기본법 21조1항에서 보장하고 있는 정당의 자유에는 정당 해산 심판에서 헌법상 재판의 공정성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절차적 정의에 대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재판의 공정성 fairen Verfahrens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재판을 중지시키는 경우 그 요건은 국가정보부 요원이 피고 정당의 의사 결정 과정을 장악했음이 입증될 때에야 가능할 것이지만 이 사안에서는 국가정보부가 그러한 정당의 의사 결정 과정에 상당할 정도 이상으로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entscheidungserheblichen Tatsachen 이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182]
넷째, 정당 해산 심판은 ‘예방적인 성격’을 가진다.[183] 정당의 자유와 정당 해산의 공익이 충돌할 때에는 공익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184]
3인의 재판관 의견은 정당의 자유와 정당 해산의 공익 사이에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4인의 재판관 의견도 마찬가지로 두 법익이 충돌하는 경우 공익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견해는 정당 해산 심판의 성격을 자유 민주주의 기본 질서에 대한 다분히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것 이상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뜻한다.[185] 다시 말해 헌법상 정당 해산 심판은 인간의 생명과 인간 존엄성에 위협을 주는 신나치주의 폭력 추구 정당 같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위협이 존재하는 경우까지 확장한다는 의미이다.[186] (이러한 확장적 견해가 정당 해산에 관한 유럽인권재판소의 법적 태도로 보인다.[187])
물론 이러한 정당 해산 심판의 범위를 확장적으로 해석할 경우에도 정당 해산의 심판은 헌법에 규정된 인간 존엄성과 헌법 가치들을 파괴하는 실제적인 위험 또는 분명하고 급박한 위험이 존재하는 경우에만 미리 예방적으로 정당을 해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적인 위험 또는 분명하고 급박한 위험을 독일어로“konkrete Gefahr”라고 표현한다.[188] 인간의 생명과 인간 존엄성을 해치는 실제적인 위험 또는 분명하고 급박한 위험을 주는 지 여부는 국가정보부의 과잉 개입에 의한 증거법 위반 문제와는 관계없이 정당의 공개적인 활동 증거 등으로 판단될 수 있다는 견해가 4인 재판관의 반대의견이었다.
6.3. NPD 사건 해설-적법절차와 재판의 공정성
만약 헌법재판소가 정당 해산 명령을 내렸을 경우에는 이에 대해 유럽인권재판소에 상소할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189] 1998년 터키 공산당 (TBKP) 케이스[190]가
말해주듯, 정당 해산에 대한 유럽인권재판소의 법적 기준이 훨씬 더 까다롭다는 사실에 비추어 만약 유럽인권재판소에
상소하게 되면 헌법재판소 명령의 실효성 문제가 더욱 커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191]
NPD 정당 해산 심판에서 헌법재판소의 주된 쟁점은 국가 정보부 요원들이 정당활동에 깊숙이 침투하였다는 사실 등 국가기관의 개입이 절차적 정의 procedural fairness를 위반하는지 여부에 있었다.[192] NPD 정당이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에 어긋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주된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정당은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을 수행하는 헌법상 보호받는 헌법 기구중의 하나에 속한다. 그런데 자유의 적으로부터 국가 방어가 우선이라는 명분으로 국가정보부 요원이 정당 활동에 지나치게 개입하거나 또는 진실의 발견을 이유로 지나친 압수수색이나 심지어 함정수사[193]까지 허용한다면 그것들이 오히려 헌법질서를 흔들 수 있는 위험성이 크다고 여길 수 있다. 물론 헌법재판소가 정당 지도부에 대한 정보부 요원의 침투가 곧 위헌이라는 결론은 내리지 않았지만 국가가 정당 지도부 활동에 개입하였다는 사실은 법치국가의 헌법질서 constitutional state principle를 파괴할 위험성이 초래되는 큰 문제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헌법재판소의 표현대로, 정당 해산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큰 영역이다. 따라서 고도의 절차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함을 요구한다.[194] 정당 해산 헌법 소송은 예방적 목적에서 이루어짐으로 사후 처벌이 목적인 형사법의 소송 절차하고는 분명하게 다른 성격을 가진다. 정당이 위헌정당인지에 대한 판단은 헌법재판소의 임무이지 행정부의 역할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불법적인 수단마저 동원될 수 있다는 논리는 극히 위험스런 논리에 해당한다. 독일은 정치적·민주주의 성숙도가 무르익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불법적인 수단까지 동원되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은 더 이상 적용하기 어렵게 된 것이고, 이제 거침없는 사상의 자유 시장 unfettered marketplace of ideas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195]
NPD 정당 해산 심판에서 독일헌법재판소는 정당이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를 침해하고 위협을 초래하는지 여부보다 국가 정보 기관의 불법적인 정당 침투 문제를 더욱 크게 다루었고 또 공정한 재판의 진행이라는 절차적 정의 측면에서 판결을 내렸다. 민주·대의·정당 정치를 근본으로 하는 현대 정치의 현실에서 정당 활동에 대한 국가 기관의 과도한 개입은 민주정치·의회정치·정당정치의의 기본적 헌법 원칙들을 파괴할 위험성이 존재하는 것을 의식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7. 독일연방헌법재판소 정당 해산 심판 5 사례 정리 표
독일연방헌법재판소에서 정당해산 심판은 8사건이
청구되었고,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5사건에서 내려졌다. 5건의 정당해산 심판 사건을 표로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청구일 |
판결일 |
사건 이름 |
판결 요지 |
판례 인용 |
1951년11월19일 |
1952년 10월23일 |
극우 나치 |
극우 나치 SRP정당에 대해 해산 결정이 내려졌다. |
BVerfGE 2, 1 (1952) |
1951년11월22일 |
1956년8월17일 |
극좌 |
극좌 공산당 KPD정당에 대해 해산 결정이 내려졌다. 자유 민주 국가는 국민 자치와 다수결의 민주주의 원칙이 기본이다. 국가권력이 개입하여 어떤 정당을 정치활동으로부터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 원칙에 배치된다. 정치적 의사 형성의 기능을 담당하는 정당의 정치적 운명은 자기결정권을 가진 국민이 참여한 선거에서 결정된다. 자유 민주주의 헌법의 기본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국민주권을 침해하고 정치적 의사 형성의 왜곡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위헌정당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정당이 자유민주주의 헌법의 기본적 가치와 헌법원칙들을 철폐하고자 목적을 가지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적극적으로 공격할 때에만 위헌정당으로 확인될 수 있다. 정당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해야 한다. 위헌 정당의 모습은 정당의 정치적 행위들이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를 계속적으로 적대시하는 일정한 외부적 행태들로써 확인될 수 있다. |
BVerfGE 5, 85 (1956) |
1993년9월6일 |
1994년11월17일 |
극우단체 |
극우단체인 NL 단체에 대해
소송 각하 결정이 내려졌다. |
BverfGE 91, 262 (1994). |
1993년9월16일, 28일 |
1994년11월17일 |
극우단체 |
극우정당 FDA에 대해 소송
각하 결정이 내려졌다. |
BverfGE 91, 276 (1994). |
2001년1월30일, 3월30일 |
2003년3월18일 |
극우 |
NPD정당 해산 심판에 대한 본안
심리에 들어가기 전 재판의 공정성 침해 이유로 소송 각하 결정이 내려졌다. |
BVerfGE 107, 339 (2003) |
SRP 정당 해산 판결 이유
1. 자유 민주주의 국가 체제에서 정당은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하는 기관으로서 일반적인 정치결사단체보다 헌법상 보호받는 특수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2. 정당은 자유 민주주의 헌법 질서를 부정해서는 아니되고 또 정당은 내부 조직과 운용은 민주적이어야 한다. 민주국가에서 정권은 정당을 통해서 창출되므로 정당의 운영과 조직 자체가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정당 내부적 요건은 정당 정치의 근간이자 토대를 이룬다.
3. 민주국가에서 정당이 갖는 특별한 중요성 때문에 만약 정당을 정치의 장에서 퇴출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오로지 헌법재판소에 의해 정당이 자유 민주주의 헌법에서 구체화시켜놓은 기본적인 가치들을 철폐하려고 기도하고 국가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비민주적인 정당으로 확인된 경우에만 가능하다.
4. 정당의 내부 조직과 질서에서 민주주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반민주적인 독재 정당은 자유민주주의 헌법 질서에 어긋난다.
5. 자유 민주주의 헌법 질서 (freiheitliche demokratische Grundordnung; free democratic basic order)의 기본적 구성 요소는 폭력과 독재체제를 부정하고 또 국민 기본권을 지켜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민주권, 국민의 자기결정권,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제, 정당의 기회평등이 최소한 보장되어야 한다.
6. 국민에 의해 선출된 의원은 “국민의 대표자”로서의 지위와 “정당의 대리인”으로서의 지위를 동시에 갖는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정당해산이 내려진다는 것은 해산 정당이 헌법상 보호받는 헌법 기구로써 정치적 의사형성을 금지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정당 해산과 동시에 소속 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한다.
KPD 정당 해산 판결 이유
1. 자유 민주 국가는 국민 자치와 다수결의 민주주의 원칙이 기본이다. 국가권력이 개입하여 어떤 정당을 정치활동으로부터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 원칙에 배치된다. 정치적 의사 형성의 기능을 담당하는 정당의 정치적 운명은 자기결정권을 가진 국민이 참여한 선거에서 결정된다. 자유 민주주의 헌법의 기본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국민주권을 침해하고 정치적 의사 형성의 왜곡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2. 위헌정당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정당이 자유민주주의 헌법의 기본적 가치와 헌법원칙들을 철폐하고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적극적으로 공격할 때에만 위헌정당이 될 수 있다.
3. 정당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해야 한다. 위헌 정당의 모습은 정당의 정치적 행위들이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를 계속적으로 적대시하는 일정한 외부적 행태들로써 확인될 수 있다.
NPD 정당 해산 판결 이유
1. 정당은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을 수행하는 헌법상 보호받는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2. 국가정보부 요원이 정당 활동에 지나치게 깊숙이 개입하는 경우 오히려 정치적 의사 형성에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
3.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불법적인 수단마저 동원될 수 있다는 논리는 극히 위험스럽고 잘못되었다. 양날의 칼의 위험성을 가진 정당 해산 소송에서는 고도의 절차적 정의 procedural fairness가 보장되어야 한다.
8. 미국 대통령 선거 개표 소송-법과 정치의 경계선은?
8.1 사실 개요
2000년 11월 7일 실시된 미국대통령선거에서 개표 결과는 공화당의 부시 후보와 민주당의 고어 후보 사이에 손에 땀을 쥐는 근소한 차이로 어느 누구도 승자인지를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고어 후보가 전체 투표자로부터 받은 유효투표수는 부시 후보보다 54만여표가 더 많았다(지지율 48.4% 대 47.9%). 최종적인 개표 결과가 말해주듯 마지막 순간까지 고어 후보가 선거인단 수에서도 267대 246으로 앞서가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 선출법상 50개주와 1자치특별구의 전체 538 선거인단의 단순과반수(absolute majority)인 270표만 넘으면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선거인단 25표가 걸려 있는 플로리다주의 개표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되었다. 플로리다주의 개표만을 남겨 놓은 상황에서 플로리다 선거인단 25표를 부시 후보가 확보하게 되면 선거인단의 단순과반수를 넘어 271표로 고어후보를 역전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 선출법상 각주에서 승리한 후보가 각주의 선거인단 표를 모두 차지하게 되어 있다 (승자독식의 원칙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플로리다 주에서 부시후보가 1표라도 이긴다면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투표일 다음날 공개된 플로리다 주의 첫 번째 개표결과는 부시 후보 2,909,135 표, 고어 후보 2,907,351 표 표차는 1,784 표에 불과하였다. 표차가 0.5%이내였으므로 주선거법상 자동적인 기계 재검표 automatic recount 대상이었고, 11월 10일 전체 18개군 county 한 개 군 county을 남겨 두고서 재검표 결과는 327표차로 줄어들었다. 주선거법상 수검표를 허용하고 있었던 바 이에 고어 후보는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세력이 강한 4개 군에만 걸쳐 수검표 manual recount를 요청하였다. 플로리다 주선거법상 선거일 7일 이내에 개표결과가 주국무장관에게 보고되어야만 했다. 플로리다 순회법원이 7일 이내 개표결과 공시 조항이 강제조항 mandatory이라고 선언한 가운데 선거법상 11월14일 오후 5시까지 개표결과가 이루어져야 했다. 수동재검표가 이루어진 4개 군 중 한 개 군이 14일 오후 5시까지 개표결과를 보고하고 나머지 3개군이 아직도 수동재검표가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주국무장관 (2003년-2007년 공화당 하원의원을 역임하였다)은 이 데드라인을 넘기자 다음날 오후2시까지 연장 접수에 대한 조건을 명시해 놓고 전체 67개 군의 개표결과를 받은 것으로 공표하였다. 4개 군이 국무장관이 제시한 요건대로 기한 연장 사유서를 제출하였지만 주국무장관은 기한연장 요청 사유를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하고, 11월 18일 부시 후보의 승리(537표차[196])를 공포하였다. 이같이 최종 개표 결과 final determination를 두고 연방대법원까지 대통령 당선자 확정에 대한 소송이 일어나게 되었다.
주국무장관이 기한연장을 거부하자, 이에 대해11월 16일 고어후보는 긴급 심리를 플로리다 주법원에 요청했다. 플로리다 주법원은 주국무장관이 재량권 행사를 남용하지 않았다[197]고 고어 후보의 요청을 기각했다. 고어 후보는 즉각 항소하였고 주대법원에 넘겨졌다. 플로리다 주대법원은 국무장관에게 11월 26일까지 기한연장과 수검표 결과를 반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부시후보는 연방대법원에 상고하였다. 연방대법원은 12월1일 구두변론을 열고 12월4일 전원일치의견으로 플로리다 주대법원의 결정을 파기환송하는 판결을 내렸다.[198]
플로리다 주대법원에 대선에 관련된 여러 건의 소송이 진행 중에 있었다. 12월 8일 플로리다주대법원은 고어 후보의 플로리다 전체의 수동재검표 요청을 4대3 다수의견으로 받아들였다.[199] 이에 대해 부시 후보는 연방대법원에 신속하게 항고하였다. 대법원은 12월11일 구두변론을 열고 신속하게 그 다음날 12일 5대4의 다수의견으로 플로리다 주의 재검표를 중지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12월 12일은 연방법률에 따라 선거인단의 개표결과를 보고해야 할 법정기한이다.[200] 이로써 대선 선거일 후 35일이 지났어도 대통령 당선자를 가려내지 못한 분쟁은 종식되게 되는데 그것은 대법원 판결을 받아들이고 판결 다음날인 12월13일 대선 패배를 선언한 고어 후보의 정치적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
8.2 법적 쟁점과 판결 이유
대법원에서의 법적 쟁점은 개표시한을 연장시킨 주대법원의 결정이 헌법에서 정한 대통령 선출 방법 조항에 위배되는지 여부 그리고 각 개표소마다 수동재검표에 대한 통일적인 판정기준이 없는 standardless manual recounts 상태에서 주전체의 재검표를 하는 경우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 원칙 Equal Protection 과 적법절차 Due Process 의 헌법상 원칙을 위반하는지 여부이었다.
연방대법원은 5대4의 가까스로 다수의견으로 플로리다 주대법원의 결정이 위헌임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의 재검표 중단을 명한 대법원의 판결은 가까스로 5대4의 결정이 보여주듯 법정의견의 법리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판결이유에서“상황을 신속히 해결하려는 의도가 평등보호 원칙을 무시하는 구실로 작용해서는 안된다”[201]고 말하고 있으나, 대통령을 결정해 내지 못함으로 인해서 오는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신속하게 개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대법원의 원치 않은 의도를 숨길 방도는 없었을 것이다. 이 판결의 법정의견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대법관들은 사법부 판결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고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고 또 대통령 선출에 대해서는 입법부를 통한 국민에게 그리고 정치권에 위임한 헌법의 의도를 따르는 것에 막아 설 대법관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분쟁 당사자들이 법원 소송을 통할 경우에는 연방대법원은 사법부가 해결을 떠맡게 된 연방과 헌법 관련 사안들을 해결해야 할 원하지 않은 책임을 지게 된다.”[202]
법정기한인 12월12일 까지 재검표를 끝낼 수도 없을 것이고 또 그리하여 혼란만 가중시킬 구제수단은 타당하지 않다[203]는 이유로 재검표를 중단시킨 대법원의 판결이유에 대해서 개표 기한을 다음해 1월4일까지 연장했던 1960년 대선의 사례도 있었음을 지적하며 재검표를 허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소수의견의 반론이 강력했다. 다음과 같은 소수반대의견을 참조하라.
8.3.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이 중요한 이유
“부시 후보가 플로리다주 선거 절차에 관하여 연방법을 들이대고 공격한 배경에는 만약 재검표가 계속될 경우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될 주법관들의 공정성과 능력에 대한 무언의 신뢰감의 결여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그 같은 견해는 전적으로 고려할 만한 가치가 없다. 다수의견이 그 같은 입장을 손들어 준 것은 이 나라 전체 법관들의 일에 대해 매우 냉소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에 더욱 힘을 실어주게 될 것이다. 사법 제도를 집행하는 사람들에게 갖는 신뢰감이 바로 법의 지배의 진정한 척추에 해당한다. 오늘의 판결로 인해서 입게 될 바로 그 신뢰감에 대한 상처는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아물어질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오늘의 결정으로 인해서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의 승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없게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패자가 누구인지는 명백하다. 패자는 ‘법의 지배 rule of law’의 공정한 수호자로서의 재판관에 갖고 있는 국민의 신뢰감이다.”[204]
다수의견 또한 법정의견이 법리의 옹색함이 존재한다는 한계를 인식하고서 이 판결이 다른 사건에 원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판결은 이번 사건에만 적용된다 Our consideration is limited to the present circumstances”는 대법원 판결의 한계를 미리 판결문에다 밝혀 두고 있다. 이 판결을 두고 식자들마다 의견이 서로 엇갈리는 그런 종류의 결정이었음은 부정하기 힘들고, 실제로 5명의 다수의견에 섰던 오코너 대법관은 은퇴 후에 "연방대법원이 플로리다 재검표 사건 관여했어야 했는지는 의문이 든다"고 말했을 정도로 이 판결은 대법원이 정치 영역에 개입하였다는 인식을 준 흠결있는 판결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확정판결이 아니고 “파기환송 the case is remanded for further proceedings not inconsistent with this opinion”이었으므로 법기술적으로는 고어후보가 다시 한번 법정소송을 이어갈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고어후보는 대법원 판결에 즉각 깨끗하게 승복하고 대선 패배 연설을 하였다. 미국 같은 판례법 국가에서는 선거일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진행되는 도중 승패의 우열이 거의 가려지게 되면 패자는 승자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를 건네고 난 후 자기 지지자 진영을 향해서 선거 패배 연설을 하게 된다. 패자의 패배 연설이 있고 나서 승자는 선거 승리 연설을 하게 되는데 정치세계에서는 패자가 있기에 승자가 존재한다는 역동적인 정권 창출의 제도와 역사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이들의 정치 관행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8.4. 사법부 판결이 최고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고어 후보의 대선 패배 연설
고어 후보가 전체 투표자로부터 받은 유효투표수는 부시후보보다 54만여 표가 더 많았다는 사실과 그리고 미국의 복잡다기한 선거법이 대통령 당선자를 즉시 가려내기 힘들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이러한 어려운 정치적 법적 상황에서 대법원의 결정을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깨끗이 승복한 고어 후보의 정치적 결단을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은 미국은 사법부가 입법부와 행정부에 대해 보다 우위에 서서 헌법상 최종적인 권위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위기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사법부가 최종적인 헌법의 수호자라는 위치를 역사적으로 확보해 왔기 때문에 가능하다. 어떤 측면에서는 법정의견보다 고어 후보의 대선패배선언 연설(2000년 12월13일)이 보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고어후보의 패배선언 연설[205]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저는 조금 전 조지 부시후보와 전화 통화를 하고
그를 제43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축하하였습니다. 당선 축하를 다시 철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나는 가능한 빠른 시간에 그를 만나서
선거운동으로 인한 분열과 이제 막 끝난 대결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약 150년 전, 스티븐 더글러스 상원의원은 대통령선거전에서 패배하자 경쟁자였던 링컨대통령에게 즉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파적 감정보다 애국심이 우선입니다. 저는 대통령을 돕겠습니다. 신의 가호를 빕니다.” 네, 저도 똑같은 심정으로
부시 대통령 당선인에게 이제 당파적 싸움 partisan rancor의 응어리를 제쳐놓고, 이 나라를 이끌어갈 그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고 전합니다. 두 후보 모두 이렇게 길고 험한 길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두 후보 모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고, 이제 끝나고 해결되었습니다. 소중한 민주주의의
제도를 통해서 해결되고 말았습니다. 유명한
로스쿨의 도서관에 “사람이 아니라 신과 법의 아래서 Not under man but under God and law”[206]라는 격언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이 미국의 자유의 확고한 원칙이고,
민주주의 자유권의 원천입니다.
저는 지난 5주간 동안 일어난 복잡한 쟁점들에 대한 미국법원의 심리 deliberations에서 요청된 그 격언을 저 또한 저의 법정 소송 내내 지침으로 삼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제 연방대법원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저는 이 판결에 대해서 분명히 동의하지 않지만, 판결을 받아들인다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저는 다음주 월요일 선거인단의 인준을 받게 될 결과가 종국적 효력 finality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오늘 밤, 저는 우리 국민의 단결과 민주주의 힘을 위해서, 선거
패배를 인정합니다 I offer
my concession. 저는
또 새 대통령 당선인을 존중하고, 또 그가 미국 독립선언문에서 명시하고 또 미국 헌법이 확인하고 보호하는
위대한 비전을 실현함에 있어서 미국인들을 모두 함께 단결시키는 것을 돕는데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할 책임을 받아들이고 그 책임을 무조건 이행하겠습니다. … 이번 선거는 매우 예외적인 상황의
선거 extraordinary election 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신의 뜻에 따라서, 이렇게 뒤늦게 해결된 난국은 우리에게 새로운 공통분모를 제시해 주었는데 그것은 결과를 알 수 없는 백중세로
인해 우리들이 공통의 역사와 공동의 운명을 지닌 하나의 국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에서는 대중의 의도에 반해서 뜨겁게 논쟁을 벌이고, 치열하게 싸웠던 대결의 사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해결에 도달하기까지
몇 주일이나 걸렸던 논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승자와 패자는 모두 결과를 평화적으로 그리고 화해의
정신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합시다. 저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실망이 큽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을 애국심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세계 공동체의 다른 국가들에게 말한다면, 이번 법정소송을 미국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징후로 받아들여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미국 민주주의의 힘은 난관을 극복해 내는 것을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번 선거의 이례적인 특성이 차기 대통령의
업무수행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부시 대통령 당선인이 크고 많은 책무를
수행해 나가는데 있어서 그를 도와줄 태세가 되어 있는 국민을 가진 나라를 물려받을 것입니다. 저 자신 그가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저는 미국인 전체에게 특히 그동안 우리를 지지해 준 사람들에게 모두 차기 대통령 아래 함께 단결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것이 미국입니다. 이해관계가 크게 걸려 있는
때는 심각하게 싸우지만, 대결이 끝나면 대열을 정돈하고 단결하는 것입니다. 서로간의 해결하지 못한 차이점을 토론할
충분한 시간이 있겠지만, 지금은 우리를 단결시키는 것이 분열시키는 것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입니다. 우리는 계속 대립되는
신념
opposing beliefs
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포기하지 않겠지만, 우리에게는 정당 political party에 대한 의무보다 더 높은
의무 higher duty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미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를 정당보다 우선시합니다. 우리는 새 대통령의 리더쉽 아래 단결할 것입니다. …누가 제게 어떤 유감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만 제가 가진 하나의 유감은 앞으로 4년 동안
미국인을 위해서 계속 남아 싸울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무거운 짐을 덜어주고 장벽이
치워지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특히 자기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었고 또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
전투는 오늘 밤으로 끝나게 되는데, 저는 패배로
인한 손실이 아무리 무겁다고 해도 패배는 승리와 마찬가지로 인격을 형성하고 또 영광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 아버지의 조언을 다시 상기합니다. …이제 정치적 투쟁은 끝났습니다. 이제는 자유의 대의를 위하여 우리에게
리더십을 기대하고 있는 온 세계 사람들과 모든 미국인들의 공동 선 the common good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에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모두 형제애로 공동 선을 이룹시다.”[207]
9. 국민 투표 제도
다이시의 견해에 따르면, 미국에서 스위스에 기반을 둔 국민투표제도가 도입된 주된 이유는 정당 정치의 당파성과 정치적 부패 문제 때문이었다. 다이시는 국민투표의 기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국민투표는 현재 절대적 권위를 누리고 있는 의회다수당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통제장치가 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국민투표는 정당 정부가 노정시켜온 결함을 상당부분 치유해 줄 수 있는 제도이다. 국민투표의 장점으로 국민의 거부권은 그 자체가 민주적 제도인 동시에 그 소극적 성격 때문에 보수적 제도로 기능한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이며 유권자와 다수가 유지하기를 원하는 법이나 제도를 지속시킬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208] 다이시의 견해에 따르면, ‘국민투표 referendum’는 스위스에서 시작된 제도로 ‘국민의 거부권 the people’s veto”이라고 흔히 설명되는데 이는 국민투표가 유권자의 승인을 얻지 못한 중요한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방지하는데 그 주요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에서의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의 결과는 크게 대조된다. 한편 호주의 사례는 1952년 공산당 해산 국민투표에서 보여준 결과가 말해주는 것과 같이 다이시가 예견했던 대로 정당 제도가 가진 취약점을 치유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소결[209]
의회주권은 여전히 영국 입헌론자들의 기본원칙이다. 그러나 상원의 권한은 상당부분 축소된 반면 하원 특히 하원의 다수당의 권한은 괄목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제 정당조직의 주도권을 쥔 내각이 이 확대된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의회다수당에서는 수상이 법적 수단으로 활동하며 실력을 갖춘다면 실질적 지도자로 활약한다. 내각과 수상의 점진적인 권력확대가 영국 헌법운용상 변화된 부분이다. 그 원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양자는 상호 연관되어 있다. 우선 1867년부터 1884년 사이에 있었던 가택소유주의 참정권인정으로 민주주의에 중대한 진전이 있었던 것을 들 수 있다. 의회 안팎으로 아직까지는 완전히 승인되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근대 의회의 정쟁에서 발휘될 수 있는 정치적 수완을 충분히 갖춘 지도자의 러디쉽에 따라 내각이 국가중대사에 관한 국민의 의사를 무시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영국의 통치구조에 비판적인 그룹의 태두가 개진하였고 로웰이 적극적 찬의를 표한 바 있는 정당 정부가 단순한 우발적 현상이나 타락이라기보다는 수 세대 동안 면면히 이어져온 영국입헌주의 제도의 토대라는 주장을 접하게 되면 정당조직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들의 권한 강화가 어느 정도까지 진전되었는지 확연히 알 수 있게 된다. 영국의 의회정부제의 운용상 생긴 쉽게 인식하기 힘든 변화의 정도를 가능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팔머스톤이 활약하던 때 즉 아직 60년도 채 안된 1855년에서 1865년의 시기에 표면상 변화를 겪지 않은 한 제도가 어떻게 운용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방법이다. 팔머스톤은 1855년애 수상이 되었다. 1857년 팔머스톤은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수상이 되어 있었다. 팔머스톤의 반대파들의 연합작전으로 야기된 의회해산은 구의화파의 손에 절대적 다수의석을 안겨 주었다. 단 한 번 팔머스톤이 자리를 물러난 적이 있었다. 일시나마 하원에서 인기를 잃어갔던 것이다. 유권자들 사이에서 실없는 비난들이 제기되었다. 1858년 팔머스톤은 사임하였다. 그러나 1859년 또 단행된 의회해산으로 그는 국민의 지지를 얻어 수상에 복귀하였다. 팔머스톤은 1865년까지 국민들의 열화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수상직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사례들은 팔머스톤 시대에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1914년까지 한 번도 그런 사례들이 되풀이되지 않았다. 글래드스톤과 마찬가지로 팔머스톤은 정당조직을 활용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의회법’은 정당 정부론의 최종적인 승리를 의미한다.
정당 제도의 중요성의 증대는 영국뿐만 아니라 대영제국 전체에 걸쳐 국왕이 행사 가능한 도덕적 영향력의 증대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의 왕위 승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왕의 도덕적 영향력이 확대되어 왔다. 영국 국왕이 헌법학자들도 그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도덕적 권한을 보유할 수 있는 근거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국왕은 대영제국 내에서 정당제도 밖에 존재하는 (그보다 우월한 것은 물론 아니다) 유일한 존재이다. 둘째 국왕은 영토적으로 연합왕국의 외부에서는 대영제국의 유일한 대표자요 중심으로 인정된다.
19세기에서의 마지막 25년과 20세기에 들어서 최초 14년은 1884년 당시 영국 입헌정부제도의 두 가지 핵심원칙으로 인정되던 법의 지배 원칙에 대한 신망이 뚜렷한 퇴조를 보인 시기로 기록될 수 있다.
오늘날의 개혁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헌법 변혁에 관한 여러 제안들은 입법의 비대중성에 반기를 들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최선의 현명한 입법을 촉진하려는 목적이 결여된 것들이다. 불공정한 입법을 통제할 수 있는 기회를 간접적으로 촉진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지는 제안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례대표제는 옳은 주장임에도 하원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 여러 의견들이 하원에서 충분히 심리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할 수 있다. 국민투표도 영국 정당 제도가 가진 취약점을 치유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치적 변혁을 주장하는 자들은 거의가 입법아 대중의 여론에 추종하도록 한다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필자가 내린 결론은 양식 있는 애국적 영국인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주관적 의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 시민 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시민은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해야 한다. 오늘날 영국에서 정립되어 유행하고 있는 민주적 입헌주의의 결과는 무엇이 될까? 그들은 낙관주의와 마찬가지로 비관주의가 필자를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할 수도 있음을 항시도 잊어서는 아니된다. 그들은 40여 년 전 당시의 정치지도자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가능성과 위험성을 이미 인식하고 있던 한 헌법학도가 1872년에 갈파한 예언 중에서 그들이 찾고자 하는 해답의 가장 근사치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월터 바조트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자
“머지않아 영국 정치가들은 이전까지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엄청난 기회를 맞게 될 것이다. 그 기회는 아마도 상응하는 의무를 수반할지도 모른다. 정치가들은 새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되는 유권자를 계도해야만 한다. 그것도 아주 조용하게,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러나 반드시 계도하여야 한다. 자유국가에서 정치 지도자들은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강력한 권력을 가진다. 그들은 인류의 대화를 조율한다. 탁월한 언변으로 무엇을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이 후세를 위해 쓰여져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보좌진과 함께 미국인들이 ‘정강 platform’이라고 부르는 당의 프로그램을 작성하며 그에 기반하여 정치적 운동을 위한 조직을 구성한다. 바로 그 정강과 그들의 경쟁자들이 만든 정강을 비교함으로써 세계가 그들을 심판한다. 일반인의 상식만으로는 정강이 대상으로 삼는 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정강의 소재가 된 문제들을 최대한 엄정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정강은 그 주제들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주제와 관련된 이슈들에 대한 결정만을 할 수 있다. 문제제기의 과정에서 정치인들이 인류의 하층계급을 부추기는 문제를 제기하였다면 그들은 특히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 계급이 잘못 판단하기 쉬운 문제를 제기한 경우, 그 계급의 이익이 국가의 전체 이익과 일치하지 않거나 상충되는 문제를 제기하였을 때, 그들은 장고 끝에 최대의 악수를 둔 셈이 된다. 국가의 운명은 미묘한 실험이 얼마나 좋은 결과를 낳는가에 달려 있는데 그들은 그 실험을 무산시킬 수 있는 모든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 정치에 전혀 문외한인 무식꾼이 그들 앞에 훌륭한 이슈들, 잘못될 가능성 없는 이슈들을 제기하여야 할 바로 그 순간 현명하지 못한 이슈들을 제안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뭉칠 수 있게 하는 주제, 그들이 가진 자들에 저항하도록 선동하는 주제를 선택할 가능성이 많다. 또 토론의 과정에 필연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귀에 들어가서 현재의 법은 그들을 불행하게 할 뿐이므로 그들의 이익을 위한 새로운 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끔 해서는 정부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전부다 들어주기 위해 밑 빠진 독에 물 붇기 식으로 재정을 쏟아 넣어야 하는 주제들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만약 ‘가진 것 없는 자들의 낙원’을 꿈꾸고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믿는 무산유권자들의 첫 작업이 그 낙원을 건설하려는 시도라면 휘황찬란하기만한 정치적 실험은 실패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는 것에 다름 아니다. 투표권을 계속 확대하려는 것은 새로운 투표권을 쟁취한 자들은 무론 전국민에게도 재앙의 저주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탁월한 학자가 남긴 이 말은 그가 죽은 후에도 살아서 우리의 귓전을 울리고 있다. 바조트가 남긴 경고의 말들이 기우에 불과한지 그의 예언 속에 들어 있는 재앙들이 별로 들어맞지 않고 머지않아 허언이었음이 드러날지는 독자들의 현명한 판단에 맡긴다. 1950년이나 2000년쯤 영국 민주주의 완결태를 그려낼 박식하고 객관적인 후세의 역사가들은 보다 완벽한 대답을 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동년배의 어느 학자들에 결코 모자라지 않을 만큼 이 시대의 무지와 편견에 눈이 어두워져 있는 한 노학자에게도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거나 미래 못지 않게 현재가 주는 교훈도 상당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국가의 위기는 번영을 위한 시련에 불과하다. 평화의 교훈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지만 전쟁은 보다 큰 교훈을 줄 수 있다. 하나의 왕국, 나아가 제국이 전체 국민의 총화를 이룸으로써 근대 세계가 낳을 수 있는 최대규모로 잘 조직된 군대를 보유한 국가들과 분명히 투쟁의 불길을 울렸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영국과 전대영제국은 칼을 움켜 쥠으로써 국가의 부와 번영, 심지어 정치적 실체마저도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영국은 국왕의 지배에 복속하는 모든 국가의 백성들이 보내는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바탕으로 평화 속의 번영을 전쟁의 위험과 고통과 맞바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두가 새로운 식민지를 쟁취하고 군사적 영예를 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 정의와 인류 공통의 선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모두가 비록 더디지만 진정한 용기와 진정한 정의의 길을 함께 걷는 인류 진보와 대중 정부의 찬란한 발전을 향한 첫걸음인 것이다. 이 모두가 영국 청년들이 프랑스 청년들과 더불어 젊음이 바로 낙원이라는 생각을 향유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또한 쓸모가 없어졌다는 정치적 허무와 실망 때문에 좌절해 있던 노년층을 위무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중요한 국가의무를 엄정히 완수함으로써 군국주의 국가의 거만함과 환상 힘을 제압하고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문명세계의 자유 인간애 정의를 수호하는 결정에 각계 각층의 국민들이 동참하는 그날을 보기 위해 죽지 않고 살았다는 기쁨을 가슴 뿌듯하게 누리게 할 것이다.”
[1] “살아 있는 헌법- 실제로 작동하며 힘을 지닌 헌법- A living Constitution-a Constitution that is in actual work and power”, 베지호트, “영국 헌법”, 2판 서문. “살이 있는 헌법”이라는 표현은 월터 베지호트, “영국 헌법”, 2판 (1867년) 서문 “살아 있는 헌법- 실제로 작동하며 힘을 지닌 헌법- A living Constitution-a Constitution that is in actual work and power” 구절에 나타난다. “살아 있는 헌법 the living constitution”이라는 말이 법원 판결에 최초로 등장한 경우는 Tyrer v. U.K. 케이스 (1978.4.25. Series A, No 26.)
[2] "명시적 규정 없는데 헌재가 권한 남용"을 이유로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2014.12.20 신문 기사 보도 참조. “헌재는 이와 관련, 선거법이 국회의원의 국민 대표성과 정당 기속성 사이의 긴장관계를 적절히 조화시켜 규율하고 있는 점, 정당해산심판의 실효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는 점 등을 강조했다. 의원직 상실이 정당해산심판 제도의 본질로부터 인정되는 기본적 효력이기 때문에 명시적 규정이 있는지 여부는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3] 우리나라 헌법은 권한의 소재만 밝혔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입법자의 재량에 속하는 사항이라고 해서 무한정 허용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헌법재판소법에 헌법재판소가 가처분 등 집행명령을 발동할 수 있다는 제정법상의 명시규정이 있다고 해도 재판의 전제성에서 위헌법률 심사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4] 위법한 처분에 있어서는 전면적으로 소송제기가 가능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법원칙이고 또 타당하다고 본 유진오교수의 1949년 발간 “헌법해의” 중 발췌 인용, 방동희, 행정소송법상 처분 개념에 관한 연구, 14쪽.
[5] 헌법 107조2항 규정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간의 권한쟁의에 관한 헌법 해석에 대한 학계나 실무계의 연구는 질과 양적인 측면에서 크게 축적되어 왔다. 하지만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거나 설득력 있는 연구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는 것 같다. 저자는 이 부분에 큰 문제의식을 갖고 연구 문헌과 자료를 조사하였으나 저자의 우둔함으로 인해서 어떤 의견이나 해결점을 제시할 만한 수준에 아직 이르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따라서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는 행정법원에 제기한 국회의원 지위 확인 소송의 대법원 판결 이유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6] 방동희, 행정소송법상 처분 개념에 관한 연구, 24p, 주52에서 인용..
[7] 헌법재판소는 헌법 위기의 상황을 불러오는 어떤 초유의 사태나 또는 법적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헌법이 파괴될 상황을 막기 위해서 성문 헌법을 마련해 놓았다.
[8] Marbury v. Madison, 5 U.S. 137, 1 Cranch 137 (1803).
[9] http://www.cooperativeindividualism.org/jefferson-thomas_correspondence-c-02.html
[10] 미국의 1800년 대선 결과 자료: http://www.presidency.ucsb.edu/showelection.php?year=1800. 1800년 미국 대선 결과: 토마스 제퍼슨은 선거인단 73명 (52.9% 지지율), 존 아담스는 선거인당 65명 (47.1% 지지율)을 얻었다. 1800년 대선 당시 미국은 동서간의 지역색이 뚜렷하였고 또 당선자의 지지율이 53%정도이었던 것을 볼 때 최근의 우리나라 대선에서의 정치적 지형과 비슷하다.
[11]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그 도전 세력에 대해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지 여부의 문제-이를 “민주주의의 역설 democratic paradox”이라고 부른다- 즉 민주주의는 누구나 자유롭게 정치적 의사 형성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하는 제도인데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당 강제 해산 조치가 과연 민주주의 원칙과 양립하느냐의 의문을 낳게 된다. 마찬가지로 논리로, 사법부의 지위와 역할은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에 근거하는데 만약 사법부가 입법부의 제정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자기 모순이 아닌가 하는 권위의 원천과 정당성의 문제를 낳게 된다. 다시 말해 국민 다수를 대표하는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사법부의 쿠데타가 아닌 지의 의문을 낳게 된다는 측면에서 딜레마 상황인 것이다.
[12] ① Does Marbury(P) have a right to this commission? ② If P has a right, is there a remedy at law to realize it? ③ If there is a remedy, is it one that can issue from the Supreme Court?
[13] The Constitution is the “supreme law of the land.” As such, it is “superior” and “fundamental and paramount.” It establishes “certain limits” on the power of the government it creates. This includes the Congress and the Executive. Without such limits, “it would be giving to the legislature a practical and real omnipotence.” Thus, “a legislative act contrary to the Constitution is not law.”
[14] 메네스 MENES (C. 3200 B.C) 이집트 왕국 개창. 함부라비 HAMMURABI (C.1700S B.C.) 바빌론 왕조 개창. 모세 MOSES (C. 1300S B.C.) 히브리 민족 노예 해방, 구약과 십계명. 솔로몬 SOLOMON (C. 900S B.C.) 솔로몬 재판. 리쿠르구스 LYCURGUS (C. 800 B.C.) 그리스 스파르타 개혁 입법. 솔론 SOLON (C. 600S B.C.) 부채 탕감 개혁. 드라코 DRACO (C. 600S B.C.) 고대 그리스 성문 법률 제정, 법의 복잡한 기술적 난해성을 뜻하는 “draconian” 말의 유래. 공자 CONFUCIUS (551-479 B.C.) 자율 규제에 기초한 사회 주창. 아우구스투스 OCTAVIAN (63 B.C-14 A.D.) 로마 초대 황제, 선례 구속 원칙 시행. 나폴레옹 NAPOLEON BONAPARTE (1769-1821) 프랑스 황제, 대륙법을 총정리한 나폴레옹 법전 편찬. 존 마샬 JOHN MARSHALL (1755-1835)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원장, 사법부 독립 원칙과 헌법 재판 제도 확립. 블랙스톤 WILLIAM BLACKSTONE (1723-1780) 영국의 법학자 법률 교과서 저술. 위고 그로티우스 HUGO GROTIUS (1583-1645) 네덜란드 법조인 국제법 정립. 루이 9세 LOUIS IX (1213-1270) 프랑스 왕, 십자군 원정, 국민 청원권 인정. 존 왕 KING JOHN (1166 – 1216) 마그나 카르타 반포. 샤를마뉴 CHARLEMAGNE (C. 742-814) 신성 로마 제국 서유럽 통합. 무하마드 MUHAMMAD (C. 570-632) 코란 이슬람 법. 유스티누스 JUSTINIAN (C. 483-565) 비잔틴 제국 유스티누스 법전 편찬, 정의론..
[15]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의 경우로 가상해서 다시 설명해 본다면, 헌법재판소의 헌법 재판은 대통령이 국회가 만든 법률을 선포하고 따라서 정당한 법률적 효력이 발생한 헌법재판소법률에 따라서 헌법재판소가 헌법 재판권을 구체적으로 행사하고 있는데 만약 헌법재판소법률에 헌법상 명문 원칙에 어긋나는 조항이 들어 있다고 하는 경우라면 헌법재판소가 스스로 그것을 위헌조항이라고 위헌법률심사를 할 수 있느냐의 문제하고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헌법 재판은 헌법재판소 법률에 따라서 행사되므로 그러한 법률 조항의 폐기는 국회 또는 행정부의 소관인 입법 사항으로 판단하여 되돌려 보내고 헌법재판소는 그것을 다시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헌법재판소는 헌법 수호의 책무를 수행하고 있으므로 헌법재판소에 주어진 마땅한 권한으로써 스스로 위헌법률임을 무효 선언할 수 있느냐에 대한 판단 문제가 될 것이다.
[16] "I do solemnly swear that I will administer justice without respect to persons, and do equal right to the poor and to the rich; and that I will faithfully and impartially discharge all the duties incumbent on me as according to the best of my abilities and understanding, agreeably to the Constitution and laws of the United States."
[17] Marbury v. Madison, 5 U.S. 137 (1803), 154-180. “It is also not entirely unworthy of observation that, in declaring what shall be the supreme law of the land, the Constitution itself is first mentioned, and not the laws of the United States generally, but those only which shall be made in pursuance of the Constitution, have that rank. Thus, the particular phraseology of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confirms and strengthens the principle, supposed to be essential to all written Constitutions, that a law repugnant to the Constitution is void, and that courts, as well as other departments, are bound by that instrument. The rule must be discharged.”
[18] 매카시즘의 영향으로 공산당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공산당 당원 추종자 수는 1947년 8만3천명에서 1954년 2만5천명으로 크게 감소하였다는 통계가 있다.
[20] 가능성 possibility과 개연성 probability possible과 probable이란 말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둘 다 “가능성”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정확한 법적 개념은 약간 차이가 난다. “probable”은 있음직한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는다는 “확률”의 뜻을 가진다. 일상적인 표현 중에 “확률은 적지만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와 같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의 정도를 나타낸다.
[21] 역주. "last best hope of earth 마지막이자 최선의 희망"이 표현은 자유의 신성한 임무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지구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최선의 희망이고 또 바로 그 나라가 미국이라고 말한 링컨의 유명한 연설문에 나온 문구다. “우리는 지구상에 남아있는 마지막 최선의 희망을 품위 있게 구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꼴사납게 그 희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We shall nobly save, or meanly lose, the last, best hope on earth.” 미국은 자유를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웠고, 전쟁 가운데 하나님의 가호로 지켜낸 가장 소중한 것이 자유라는 것이다. 자유를 지켜내기란 쉽지 않을 위험이 있을지 모르지만 자유를 지켜낸 미국의 위대함을 믿는 확신을 가진다면 해결될 문제라고 본 것이다. 국민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의 임무이고 또 그러한 정부 체제가 바로 미국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소수자의 자유를 끝까지 지켜주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이다.
[22] 판결문 at 170-202.
[23] 역주 홉스는 개인의 안전을 담보로 국가가 자신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계약을 맺은 것이지만 어떤 개인도 자신에게 위해를 끼치는 폭력에 저항해서는 안된다는 계약은 동의할 수 없는 원초적인 문제라고 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살아남은 안전이 최고이기에 자신의 신체에 폭력적인 위협이 가해질 경우 국가의 강제력에 대항해 저항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다글라스 대법관의 견해로는 개인의 자유권을 모두 위임받은 전제군주정아래에서도 국가가 개인에게 자백을 강요할 근거가 없다고 본 것이다.
[24] Communist Party of the United States v. Subversive Activities Control Board 351 US 115 (1956).
[25] FBI 최고책임자의 의회 증언에 따르면 가장 역사상 최고로 많았던 1947년 당시 미국 공산당의 등록당원 수는 6만 명에 달했다. H.R. 1884 and H.R. 2122, 80th Cong., 1st Sess., Part 2, p. 37.
[26] “The contrary teaching of Whitney v. California, supra, cannot be supported, and that decision is therefore overruled.”
[27] “Since the statute, by its words and as applied, purports to punish mere advocacy and to forbid, on pain of criminal punishment, assembly with others merely to advocate the described type of action, it falls within the condemnation of the First and Fourteenth Amendments. Freedoms of speech and press do not permit a State to forbid advocacy of the use of force or of law violation except where such advocacy is directed to inciting or producing imminent lawless action and is likely to incite or produce such action.”
[28] 언론 자유에 대한 미국 헌법상의 원칙에 대해 보다 정확하게 이해를 원하는 경우 출발점으로 삼을만한 기초 정리는 다음을 참조하라. http://legal-dictionary.thefreedictionary.com/First+Amendment.
[29] “호주 연방 대법원 High Court of Australia”을 한국에서 번역하기를 “High Court”라는 말을 그대로 축자 해석해서 “고등 법원”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의 법원체계상 “고등 법원”이 대법원 아래 단계에 있으므로 대법원을 “고등 법원”이라고 명칭하는 한국어 번역은 적당하지 않다. 호주연방 헌법 71조에 따라 호주의 “하이 코트 High Court”는 최고법원인 “연방대법원 federal supreme court”을 지칭한다. 호주연방국가는 1901년 연방 헌법 제정으로 성립하였는데 이때까지 존재하던 6개의 영국 식민지가 모여서 호주연방을 형성하였다. 연방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 각주마다 대법원 supreme court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주대법원의 이름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즉 새로운 헌법아래 생긴 연방최고법원을 일컫는 명칭으로 구별될 필요성으로 인해서 Supreme Court가 아니라 “High Court”라고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만약 외국 법원의 명칭을 역사성을 무시하고 축자번역하는 경우 해당 법원 체계를 이해하는데 오해를 불러오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예컨대 미국 연방 대법원을 Supreme Court라고 부르는데 미국 뉴욕주의 주법원 체계에서는 “Supreme Court”가 원심(1심) 법원에 해당하고 주대법원의 명칭은 “Court of Appeals”이라고 부른다.
[30] 1951년 3월 9일 호주 연방 대법원이 판결한 “호주 공산당 해산 법률 The Communist Party Dissolution Act 1950 (Cth)”에 대한 위헌 무효의 판례로써 판례 인용은 Australian Communist Party v The Commonwealth (1951) 83 CLR 1, [1951] HCA 5 이고, “공산당 케이스 The Communist Party Case”의 약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판례 표기를 이 책에서 “공산당 케이스” 또는 “공산당 해산 법률 위헌 무효 판결” 등으로 쓰기로 한다. 이 법률의 영어 원문은 호주 정부 사이트 http://www.comlaw.gov.au/Details/C1950A00016 에서 읽을 수 있고, 이 판결문은 다음 호주 법 정보 제공 공익 기관 (AUSTLII) 사이트에서 이용 가능하다. http://www.austlii.edu.au/au/cases/cth/HCA/1951/5.html.
[31] Winterton, “Australian Constitutional Landmarks”, CUP, 2003, at 108.
[32] “Australian constitutionalism scored one of its greatest triumphs when the High Court invalidated the Communist Party Dissolution Act 1950 (Cth). That Act was designed to ban the Communist Party and affiliated bodies, and to restrict the civil liberties of persons declared by the Government to be dangerous or potentially dangerous communists. In other words, it potentially restricted the civil liberties of everyone. The High Court's decision, a celebrated victory for the rule of law, was followed by the defeat – remarkable at a time of anti-communist hysteria fanned by the Korean War – of a referendum to amend the Constitution to achieve the Government's objectives. Yet while a referendum defeat has lasting impact only in a negative sense, the Communist Party case lives on, and is as important a declaration of fundamental principles today as it was in 1951. As with all great constitutional decisions, the Communist Party case can only be understood in its historical and political context.”
[33] Winterton, “Australian Constitutional Landmarks”, CUP, 2003, at 108.
[34] 1946년 3월5일 미국의 미주리 주 풀톤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소련을 “철의 장막 Iron Curtain”에 비유하며 자유 세계의 단결을 통해서 소련의 위협에 맞써야 함을 주장한 그의 유명한 “평화의 원동력 The Sinews of Peace” 연설을 하였다. 자주 인용되는 처칠 연설이 구절: “오늘날 발트해의 수데텐란트에서부터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에 이르기까지 대륙을 횡단하여 '철의 장막'이 내려져 있다. From Stettin in the Baltic to Trieste in the Adriatic, an iron curtain has descended across the Continent.”
[35] 이들 5개국은 국가 안보에 관한 정보를 서로 직접 교류한다. 흔히 “5-Eyes"국가라고 부른다. 2차 대전 중 적국의 전파 암호 정보 해독을 위하여 언어와 문화가 같은 미국과 영국간의 긴밀한 협조 체계를 구축한 것에 바탕을 두고 종전 후 1946년 미국과 영국(다른 나머지 3개국은 영국의 식민지이었기 때문에 영국이 이들을 대표하였다)간의 비밀 협정을 맺고 지금까지도 이들 5개국은 국가 안보에 관한 정보를 즉시 교류하고 있다.
[36] 도미노 확산 이론 The Domino Theory, 1954년 4월 4일 아이젠하워 기자회견에서 말한 내용: “You have a row of dominoes set up, you knock over the first one, and what will happen to the last one is the certainty that it will go over very quickly. So you could have the beginning of a disintegration that would have the most profound consequences.”
[37] 호주에서 공산당으로써 처음으로 주의원에 당선된 인물은 Fred Paterson으로서 패터슨은 1944년 퀸즈랜드 주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1947년 재선되었다. 패터슨은 변호사출신으로써 공산당 해산 케이스에서 대법원에서 공산당을 변론하였다. (Australian Dictionary of Biography, Volume 15, MUP, 2000.)
[38] 1949년 11월 10일 당시 야당이었던 보수당 당수 (Robert Menzies)의 총선 공약 연설. http://electionspeeches.moadoph.gov.au/speeches/1949-robert-menzies.
[39] Ibid.
[40] 1950년 당시 호주 의회의 여야 의석 수 구성 분포는 121명의 하원에서 정부여당 74명 의원(55명 자유당 소속, 19명 국민당 소속)을 가졌고, 야당 노동당 소속의원은 47명이었다. 하지만 상원에서는 노동당이 그때까지 소속 의원 34명을 가졌고 정부여당은 26명의 소속 의원을 가졌다. Winterton, at 115.
[41] Korematsu v. United States 323 U.S. 214 (1944).
[42] Burns v Ransley [1949] HCA 45; (1949) 79 CLR 101 (7 October 1949).
[43] “All right, We would that war. We would fight on the side of Soviet Union. That’s a direct answer.”
[44] R v Sharkey [1949] HCA 46; (1949) 79 CLR 101 (7 October 1949).
[45] “If Soviet Forces in pursuit of aggressors entered Australia, Australian workers would welcome them. Australian workers would welcome Soviet Forces pursuing aggressors as the workers welcomed them throughout Europe when the Red troops liberated the people from the power of the Nazis. I support the statement made by the French Communist leader Maurice Thorez. Invasion of Australia by forces of the Soviet Union seems very remote and hypothetical to me. I believe the Soviet Union will go to war only if she is attacked, and if she is attacked I cannot see Australia being invaded by Soviet troops. The job of Communists is to struggle to prevent war and to educate the mass of people against the idea of war. The Communist Party also wants to bring the working class to power, but if fascists in Australia use force to prevent the workers gaining that power, Communists will advise the workers to meet force with force.”, R v Sharkey (1949) 79 CLR 121 at 137-138.
[46] If Soviet Forces in pursuit of aggressors entered Australia, Australian workers would welcome them.
[47] 1914년 형법 제24A조 내란선동죄로 형사처벌되는 경우 “any of the following intentions seditious: (a) to bring the Sovereign into hatred or contempt; (b) to excite disaffection against the Sovereign or the Government or Constitution of the United Kingdom or against either House of the Parliament of the United Kingdom; ….or “(g) to promote feelings of ill-will and hostility between different classes of His Majesty’ s subjects so as to endanger the peace, order or good government of the Commonwealth,” 하지만 같은 형법 조항에서 단서조항으로 정부 비판 발언은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분명히 규정했다: it shall be lawful for any person: “(a) to endeavour in good faith to show that the Sovereign has been mistaken in any of his counsels; “(b) to point out in good faith errors or defects in the Government or Constitution of the United Kingdom or any of the King’s Dominions or of the Commonwealth as by law established, or in legislation, or in the administration of justice. with a view to the reformation of such errors or defects; “(c) to excite in good faith His Majesty’s subjects to attempt to procure by lawful means the alteration of any matter in the Commonwealth as by law established; or “(d) to point out in good faith in order to their removal any matters which are producing or have a tendency to produce feelings of ill-will and hostility between different classes of His Majesty’s subjects.”
[48] 항고(상고)심에서는 원심에서 쓰는 용어인 피고 defendant, 원고 plaintiff 라는 용어 대신 항소인(상고인 appellate), 피항소인(appellee/respondent)이라는 법률용어를 쓴다. 또 연방법원이 담당하는 공법 public law분야는 각주가 담당하는 시민의 일상생활 영역인 형사법정이나 민사법정에서 흔히 쓰는 피고, 원고라는 용어 대신 청원인 Petitioner, 피청구인 Respondent이라는 단어를 쓴다. 여기에서 공산당 케이스는 대법원에서 원심이 시작되었지만 대법원전원합의체 최종판결은 단독심리로부터의 항소심 Case stated 판결이었다. 따라서 사실심리가 아니라 법률심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상고심의 판결문을 번역하면서 피고/원고라는 용어를 쓴 이유는 번즈와 샤키 사건이 형사재판이고 또 이들 사건은 형사재판 법기술상의 문제가 쟁점으로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번즈 사건은 1심에서 약식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대법원에서의 항소심 재판은 원심의 사실심리를 재개할 수 있는 재판의 성격이었기에 엄격한 법률심리만을 하는 샤키의 상고심에 비해서 항소 이유가 보다 크게 열려져 있었다는 법기술상의 문제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였다.
[49] 딕슨 대법관은 피고인의 답변이 “기준별 답변 categorical reply”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기준별 답변”이란 대답이 “예”도 될 수 있고 또한 “아니오”도 될 수 있는 답변을 말한다. 우리들이 흔히 “당신이 그 말을 무슨 뜻으로 했느냐?”라고 다그치게 되는 경우 즉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는 답변의 경우 “부정적인 의미로 했느냐? 아니면 긍정적인 의미로 했느냐?” 그렇게 질문을 재차 받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런 종류의 말로써 상대방의 기준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는 답변을 말한다. “yes or no”라는 의미에서 불가에서의 “선문답”하고 같은 성격일 것이다. 선문답의 성격이라면 예수처럼 직접적으로 행동하기를 외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법에서와 같이) 선동적인 발언으로는 볼 수 없다고 딕슨 대법관은 판단 내린 것이다. 나온 김에 참고로 보통 사람들이 무조건적인 답변과 조건있는 답변을 종종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잠깐 추가설명을 한다. ‘한정 의견 qualified opinion’을 이해할 때 여기서 ‘qualified’라는 말의 일반적인 뜻 때문에 보통사람들은 조건이 붙은 의견 표명에 대한 이해를 잘못 하는 경우가 흔히 발견된다. 정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회사의 재무제표에서 흔히 나타나는 설명을 덧붙인다. 감사의견 opinion은 감사보고서에는 재무제표 전체에 대하여 명료하게 표명된 감사의견이 기술되어 있다. 감사인은 재무제표가 일반적으로 인정된 회계처리기준에 따라 중요성의 관점에서 적정하게 표시되고 있다고 판단했을 경우 ‘적정의견 unqualified opinion’을 표명한다. ∙한정의견 qualified opinion: 감사인과 경영자간의 의견불일치나 감사범위의 제한으로 인한 영향이 중요하여 적정의견을 표명할 수는 없지만 부적정 의견이나 의견표명을 거절할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거나 전반적이지 않은 경우에 표명한다. ∙부적정 의견 adverse opinion: 감사인과 경영자간의 의견불일치로 인한 영향이 재무제표에 매우 중요하고 전반적이어서 한정의견의 표명으로는 재무제표의 오도나 불완전성을 적절히 공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에 표명한다. ∙의견 거절disclaimer of opinion: 감사범위의 제한에 의한 영향이 매우 중요하고 전반적이어서 감사인이 충분하고 적합한 감사증거를 획득할 수 없었고 따라서 재무제표에 대한 감사의견을 표명할 수 없는 경우에 의견표명을 거절한다.
[50] R v Sharkey (1949) 79 CLR 121, at 118.
[51] 해당 사건에서 대법원이 판단하여야 할 주요 법률 쟁점은 다음이었다: The words in the circumstances in which they were uttered were capable of being expressive of a seditious intention within the meaning of the Crimes Act.
[52] 호주 공산당의 당원 수는 1945년 가장 피크 때 최고 2만 명까지 이르렀다. 미국 공산당의 당원 수는 후보 FBI 국장의 의회 증언에 따르면 최고 피크 때 4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 미국과의 인구 수를 비교 감안해 본다면 호주 공산당의 정치적 위세가 미국보다 더 강했다고 보여진다. 1960년대 초반에는 약 5천명 정도를 유지하다가, 1990년경에는 1천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결국 공산당은 당원 수 감소에 의한 재정압박을 견뎌내지 못하고 1991년 자진 해산하였다.
[53] 매카시즘이라는 용어로 잘 알려진 반공주의 물결은 비정상적인 알레르기 과민 반응 “anti-communist hysteria”이었다고 훗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가한다. Maher, L W. “Tales of the Overt and the Covert: Judges and Politics in Early Cold War Australia”; 21 Fed. L. Rev. 151 (1992-1993).
[54] 1950년 4월 27일 하원 공산당 법률안 회부 법률 제안 이유 설명.
[55] 87,958명은 총선에서 호주 공산당을 지지한 투표수로서 전체의 2.1%에 불과하여 정권에 현실적인 위협을 줄만한 정도가 전혀 아니었다. 호주공산당이 밝힌 공산당 당원 수는 피크에 달했던 1945년에 2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종전직후 이미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수상이 법안 제출 연설에서 밝힌 바대로 공산주의자들의 규모가 국가 안보에 어떤 위협을 주는 수준이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56] 1950년 4월 멘지 수상의 의회 법률안 제안 설명, “Debates” 1950, vol. HR207, p. 1995.
[57] “There is great danger that the hysteria and fear complex that has been aroused may result in grave injustices being done to individuals. The multitude can make grave mistakes. It was the multitude, by its vote, that sent Christ to be crucified.”
[58] 12명의 집행부 에서 8-4의 다수의견으로 정부여당의 원안대로 통과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권고안을 채택했다.
[59] 호주 빅토리아주 공산당 활동에 대한 정부 특별조사위원회가 1949년 5월 19일 설치되고 (Victoria Government Gazette, 1949, vol. 2, p. 2831) 1950년 4월 28일 의회에 활동 결과를 보고하였다.
[60] (2001) 27(2) Monash University Law Review 253, at 274.
[61] 1950년 호주에는 5개의 정당이 존재하였다. 호주 공산당은 1920년 창당되어 2차 대전의 전시 상황속에서도 지속되었고, 1944년 주의회 의원 한 명을 배출했다.
[62] “necessary ... for the security and defence of Australia.” 의회의 입법권은 헌법 제51조에서 열거하고 있다. “의회는 본 헌법에 의거하여 연방의 평화, 질서 및 선량한 통치를 위해 다음 사항에 대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가진다. 1. 타국과의 또는 주 상호간의 통상. ……6. 연방 및 각 주의 육해군 방위, 연방 법률의 시행 및 유지를 위한 무력의 통제……”
[63] “AND WHEREAS the Australian Communist Party, in accordance with the basic theory of communism, as expounded by Marx and Lenin, engages in activities or operations designed to assist or accelerate the coming of a revolutionary situation, in which the Australian Communist Party, acting as a revolutionary minority, would be able to seize power and establish a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64] ‘communist’ as ‘a person who supports or advocates the objectives, policies, teachings, principles or practices of communism, as expounded by Marx and Lenin.
[65] 러셀과 케인즈의 “내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이유” 참조하라. Russell, "Why I am Not a Communist", in “Portraits from Memory’; 케인즈, “소련에 관한 단상(1925) “설득의 정치경제학 Essays in Persuasion”중 (1931).
[66] Experience throughout the world has shown that the banning of one political party by a Government, irrespective of political ideology, has always been a prelude to suppression of other political parties and the smashing of Trade Unions with imprisonment of Trade Union Officials, in many countries without trial.
[67] 총독의 권한, S 61 of the Constitution provides:- "The executive power of the Commonwealth is vested in the Queen and is exerciseable by the Governor-General as the Queen's representative, and extends to the execution and maintenance of this Constitution, and of the laws of the Commonwealth."
[68] 판결이유에서 밝히듯이 형사법의 기본원칙이 도치될 수 있는 경우는 특수한 전쟁 상황에서나 허용될 예외적인 현상이다.
[69] ‘ethically correct, professionally sound, and politically very, very foolish.’
[70] 보수당 정권에서 호주 수상(1975-1983년)을 지낸 맬콤 프레이저는 자서전에서 국민투표 반대 투쟁을 이끌어 승리한 에바트 의원을 높이 평가하면서 아마 자신도 그때 반대표를 던졌을 것이라고 훗날 회고하였다. “He won, rightly. It was much to his credit; it said a great deal about principle and his readiness to support principles. Where do we see such courage today, such determination? Perhaps that is why bad policy has assumed a dominance in certain areas.” Simons And Fraser, Malcolm Fraser: The Political Memoirs, 2010, at 93.
[71] Australian Communist Party v The Commonwealth (1951) 83 CLR 1.
[72] “Military defence:s” 국방에 관한 일체 Subsection vi of section 51(the defence power) gives the Commonwealth government the power to make laws relating to 'The naval and military defence of the Commonwealth and of the several States, and the control of the forces to execute and maintain the laws of the Commonwealth'.
[73] There must be a real and substantial connection with the subject matter of power before a law can be held valid.
[74] 헌법 재판에서 원심에서 담당하는 법정 증거 조사를 통해 사실 확인의 판단까지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러한 사실 확인에 대한 임무는 필요치 않고 순전히 법률적 판단만으로 최종판결을 내릴 수 있는가에 대한 대법원이 판단을 말한다.
[75] "1.(a) Does the decision of the question of the validity or invalidity of the provisions of the Communist Party Dissolution Act 1950 depend upon a judicial determination or ascertainment of the facts or any of them stated in the fourth, fifth, sixth, seventh, eighth and ninth recitals of the preamble of that Act and denied by the plaintiffs, 1.(b) are the plaintiffs entitled to adduce evidence in support of their denial of the facts so stated in order to establish that the Act is outside the legislative power of the Commonwealth? 2. If no to either part of question 1 are the provisions of the Communist Party Dissolution Act 1950 invalid either in whole or in some part affecting the plaintiffs?", 판결문 at 129.
[76] Fact findings 사실 확정, 사실 인정, 사실 확인 등의 여러 단어로 쓰고 있다. 사실 판단은 배심원에 맡기고, 법률 판단은 판사가 행사하는 배심원 제도를 특징으로 하는 판례법 국가에서는 원심과 항소심의 구별, 사실 문제와 법률 문제에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대륙법 제도는 판사가 사실 판단과 법률 판단을 동시에 단독으로 행사하므로 fact or law에 대한 구분의 실익과 중요성은 판례법 국가들보다 낮다.
[77] The Communist Party Dissolution Act 1950 (Cth).
[78] “무죄추정 innocent until proven guilty”의 원칙은 정부가 범죄 입증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공산당 해산 법률은 정부가 누구든지 공산주의자로 혐의를 씌울 수 있고 또 혐의자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즉 “Guilty Until Proven Innocent 유죄추정의 원칙”을 도입하였다.
[79] 원고들이 확인을 구하는 헌법 소송이기 때문에 효력 범위의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한국의 헌법재판소법에 “헌법재판소는 제청된 법률 또는 법률조항의 위헌 여부만을 결정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또 구체적 규범통제의 범주에 속하는 절차에서 심판대상의 위헌여부는 그것이 법원의 재판에 전제가 될 것이 요구된다.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법원의 재판”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통제 기속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국의 헌법재판제도하고는 달리, 판례법 국가는 대법원이 모든 하급심을 직접 통제하므로 일단 선례가 확립되면 다음의 구체적 개별 사건에서도 (즉 일부 법률 조항만을 무효로 한다고 해도) 같은 효력을 나타날 것이다. 사법심사 judicial review 제도를 가진 영미법 국가들에서의 헌법 재판에서 법률 전체를 원천 무효로 선언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cf 미국의 1950년 공산당 해산 법률에서의 헌법 재판 결과 참조하라.) 연방대법원은 공산당 해산 법률이 원고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일부 무효가 아니라 공산당 해산 법률 전체가 원천적으로 위헌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행정부는 대법원의 판결을 다시 뒤집기 위해서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 개정의 방법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80] 헌법 소송에 참여한 원고들의 구체적인 인적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호주 공산당, 항만 부두 노조, 철도 노조, 건설 노조, 통합 기술자 노조, 선원 노조, 철강 노조, 탄광 노조. 그리고 이들 단체 원고들을 법적으로 대표하는 대표자 개인들 또한 원고로 참여하였다. 이들 단체는 법적으로 독립적인 소송능력을 가진 법인격 사단으로써 대표자 또한 소송의 당사자가 된다. 이들 단체들의 변론을 담당한 변호사들은 최고의 변호사들이었고 각자 별도 변호이므로 소송비용은 큰 편이었다.
[81] Communist Party case (1951) 83 CLR 1 at 285.
[82] S 51 “The Parliament has power, subject to this Constitution, to make laws for the peace, order and good government of the Commonwealth with respect to:- … (vi) the naval and military defence of the Commonwealth and of the several States, and the control of the forces to execute and maintain the laws of the Commonwealth;……”
[83] Subsection vi of section 51(the defence power) gives the Commonwealth government the power to make laws relating to 'The naval and military defence of the Commonwealth and of the several States, and the control of the forces to execute and maintain the laws of the Commonwealth'.
[84] 공산당의 위협 수준에 대해서 대법원은 필요하다면 소송당사자들로부터 증거 채택의 과정 없이 직권 조사로써 증거를 채택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를 judicial notice라고 말한다. 다수의 대법관들이 국내외에서 공산주의가 위협이 된다는 내용을 사실 인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85] The High Court held that the High Court itself had to judge what the facts were.
[86] 다이시가 미국에서의 ‘위헌’의 의미를 설명한 내용과 동일하다. 즉 설령 법이 국가이익에 합당할지라도 의회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 ultra vires에 해당되는 경우 위헌법률이 되는 것이다. 다이시의 원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연방의회가 제정한 법의 경우 위헌이라는 표현은 문제의 법이 연방의회의 권한을 일탈하여 제정된 것으로 무효라는 의미를 가진다. 미국인들이 연방의회의 법이 국가이익에 합당한 좋은 법이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위헌’ 즉 월권에 의한 법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이야기하는 데 아무런 논리적 하자가 없다.”1915년판, Note VII.
[87] whether there was a sufficient connection between the Act and the defence power.
[88] 딕슨 대법관은 1925년 대법관에 임명되었고, 1952-1964년 대법원장을 지냈다. Latham 대법원장은 1922-34년까지 보수당으로 지역구 하원의원을 지냈는데 이 지역구를 멘지 수상이 물려 받았다. 보수당 정부에서 연방 검찰총장을 지냈고 1931-34년에는 부수상과 외무성장관을 지냈고, 1935년부터 1952년까지 대법원장을 지냈다. 레이셤 대법원장만이 반대의견을 개진한 것은 그의 정치적 경력과 배경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진다.
[89] 미국 공산당 케이스 (Communist Party of the United States v. SACB 367 U.S. 1 (1961) 판결문은 202페이지, 독일 공산당 KPD 케이스 판결문 (BVerfGE 5, 85)은 308페이지.
[90] 호주 대법관들은 공산당이나 공산주의의 위협이 분명하다는 것은 인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의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나 공산주의 이론의 위험성에 대한 고려를 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Dixon J, “If it is unnecessary to discuss the principles of communism, it is even less necessary to examine notorious international events.”, 판결문 at 197.
[91] 총독 Governor-General은 공식적으로는 의회의 수장이다 the head of the Australian parliament. 하지만 총독의 역할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고 그러한 상직적인 역할로써 모든 법률안이 정식 발효될 때 최종적인 서명을 하는 일 정도를 맡고 있다.
[92] a Constitution framed in accordance with many traditional conceptions, to some of which it gives effect ..., others of which are simply assumed. Among these I think that it may fairly be said that the rule of law forms an assumption.” 판결문 at 193.
[93] S 75(v) confers upon the High Court jurisdiction in all matters in which a writ of mandamus, prohibition or an injunction is sought against an officer of the Commonwealth.
[94] to pre‐empt the question of validity.
[95] 풀라거 대법관이 말한 “the stream cannot rise higher than its source.”의 비유법은 “강물은 그 원천보다 더 높이 흐를 수 없다”,“강물은 거슬러 올라가는 법이 없다”는 말로 직역되는데, 우리 속담의 “부모 없는 자식 없다”에 가까운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말은 만물의 탄생에는 근원 source이 있고 항상 그 근원과 배경을 잊지 말라는 뜻이 있듯이, 법률은 불쑥 땅에서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상위모법에 근거하고 있다는 법의 근원, 법의 근거를 의미한다. 상위법에서 위임한 권한의 범위를 벗어나서 법이 행사될 수는 없다는 그런 법률의 한계, 법적 제약을 뜻한다. 중세 유럽(16세기경)의 고서에서 들어 있는 함부르크 시 법전 계통을 보여주는 그림을 참조하라. 또 법 계통은 “가계도 family tree”로써 이해하면 보다 쉬울 것이다. 어떤 법의 출현은 그 법이 나온 근거 소스 source가 있기 마련이다. 법의 근거를 법원 legal source라고 말한다. 법의 권위 authority는 이러한 법의 소스에서 나온다.
[96] Lloyd v. Wallach [1915] HCA 60.
[97] Shrimpton v. The Commonwealth (1945) 69 CLR.
[98] 법률 선포 proclamation 는 법률안에 공식 서명을 하는 상징적인 행위를 말한다. 대통령에 정식으로 당선된 사람이 대통령으로서 정식 활동하는 것은 취임식을 통해서이다. 당선인의 취임식은 상징적인 행사로써 누가 거부할 권한이 없다. 마찬가지로 법률안이 정식 법률로써 효력을 발휘하는 시점은 법률안에 서명이 완료된 이후이지만 서명권자가 어떤 실질적으로 서명을 거부할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상징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호주 총독은 법률안에 서명권을 행사하는 헌법 기관이지만 상징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헌법 총독 조항 참조.
[99] 풀라거 대법관, 판결문, at 259.
[100] 법원은 법정 증거로 채택된 것에 한정하지 않고 법원 스스로 사실 여부를 직권으로 확정할 수 있다. 이를 ‘judicial notice’제도라고 한다. 대륙법계통의 법원에서 행하는 법원의 직접적인 사실 조사까지를 말하는 의미가 아니라 상식이나 공지의 사실들은 법정 증거에서 채택될 필요 없이 법원이 직권으로 사실 내용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일출이나 일몰시간 등 어떤 일상적인 법칙이나 공식 기록 같은 것은 사건 당사자에 의해서 법정 증거로 정식 제출되지 않아도 법원 직권으로 사실 판단에 있어서 증거로 채택할 수 있는 것이다. 공산당 케이스에서 공산당이나 공산주의가 국가 안전과 방위에 위협이 되는지 여부는 공산당 관련 증인들이 법정에 출두하거나 또는 문서 증거들을 통해서만 법원이 판단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시 말해 형사법정이 아닌 것이다.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판단은 ‘대법관의 인지 judicial notice’에 의해서도 판단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공산당 케이스를 통해서 볼 때 한국에서의 진보당 해산 재판에서 증거 입증의 방법과 기준을 민사소송에 준하느냐 형사 소송에 준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하게 다투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여기기 힘들다. 딕슨 J International tensions of the time and the recent serious dislocation of industry as notorious. 판결문 at 197. 맥티에르난 judicial notice of the fact that communists engaged in a range of nefarious activities 판결문 at 208-210. “The limitation of the principle of judicial notice to facts which are notorious - which are so clear that no evidence is required to establish them - appears to me to prevent a court from ever reaching a conclusion based only upon such facts with respect to an issue of actual or potential public danger calling for the exercise of the legislative powers now under consideration.” 판결문 at 164.
[101] to take judicial notice of the existence of an emergency of this grave character. …..For there are a number of well-known facts relating to the Communist Party which I think are either within judicial knowledge as historical facts or so well known that the Court may take judicial notice of them.” 판결문 at 208-210.
[102] 딕슨 J, “It is needless to enter into a discussion of the avowed principles of communism, whether in earlier stages of development or in their present state.”……If it is unnecessary to discuss the principles of communism, it is even less necessary to examine notorious international events.”, 판결문 at 197. 공산주의의 위협과 국방권의 관련성 판단을 위해서 공산당이나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사실 확정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대법원은 사실 판단을 내렸다. 전쟁시기가 아니라 평화시기이므로 그러한 공산주의 위협은 국방 문제까지 이르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103] 딕슨 대법관, 판결문, at 197.
[104] “The exercise of these powers to protect the community and to preserve the government of the country under the Constitution is a matter of the greatest moment. Their exercise from time to time must necessarily depend on the circumstances of the time as viewed by some authority. The question is — ‘by what authority — by Parliament or by a court?”, 판결문 at 142.
[105] “[It] did not follow that the legislation could be justified since its operation was not conditioned on whether communists and communist bodies did in fact constitute a threat. The legislature may have believed they did, and the preamble could be taken as evidence of that belief. But legislative beliefs were not enough. The incidental and implied powers could be exercised only if their exercise was conditioned on the existence of an actual and judicially examinable threat.”
[106] Winterton, Australian Constitutional Landmarks, CUP, 2003, at 108.
[107] “The Constitution was framed in accordance with "many traditional conceptions." 판결문 at 193-4.
[108] “The EU is based: freedom, democracy, respect for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and the rule of law.”, http://europa.eu/scadplus/constitution/objectives_en.htm#PRINCIPLES.
[109] 영국 헌법 (Constitutional Reform Act 2005) 1조에서 “the existing constitutional principle of the rule of law”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 법률에서 이 법의 지배 원칙에 대한 개념 정의 조항을 두고 있지 않다.
[110] 빙햄 Bingham, “법의 지배”, 김기창 역, 이음, 2013, 22-23쪽.
[111] “[t]he core of the existing principle [of the rule of law] is that all persons and authorities within the state, whether public or private, should be bound by and entitled to the benefit of laws publicly and prospectively promulgated and publicly administered in the courts.” 다이시가 설명하듯이, ‘법의 지배’ 원칙의 핵심은 ‘절차적 정의’에 있다. 로즈는 이렇게 주장한다: “법의 지배의 핵심은 절차적 정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 관용, 정의 같은 민주 사회의 필수 덕목에 꼭 필요한 (충분조건이 아니라) 것이다.” “the core of the rule of law is procedural: it is ‘a necessary, but not sufficient condition of other vital, civic virtues – freedom, tolerance and justice itself’ Laws, J, “The rule of law - form or substance?”, [2007] 4 Justice Journal 24. 학생들의 열띤 토론에 흔히 등장하는 ‘필요조건’인지 ‘충분조건’인지를 상기해 보고 법의 지배 원칙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교실에 책상은 충분 조건이고, 교실은 책상이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므로 교실은 필요조건이다.
[112] 1. The law must be accessible and so far as possible intelligible, clear and predictable, 2. Questions of legal right and liability should ordinarily be resolved by application of the law and not the exercise of discretion, 3. The laws of the land should apply equally to all, save to the extent that objective differences justify differentiation, 4. The law must afford adequate protection of fundamental human rights, 5. Means must be provided for resolving, without prohibitive cost or inordinate delay, bona fide civil disputes which the parties themselves are unable to resolve, 6. Ministers and public officers at all levels must exercise the powers conferred on them reasonably, in good faith, for the purpose for which the powers were conferred and without exceeding the limits of such powers, 7. Adjudicative procedures provided by the state should be fair, 8. The state must comply with its obligations in international law, the law which whether deriving from treaty or international custom and practice governs the conduct of nations. Bingham T, “The rule of law”, (2007) 66 CLJ 67.
[113] ‘사법부의 독립’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도 다이시가 설명했듯이 대륙법국가와 영미판례법국가의 의미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114] 영미법 국가의 정치제도가 내각제 전통이 지배하는 측면에서 “의회 우위 the sovereignty of parliament” 전통이 지배한다고 종종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사실 판례법 국가들은 “사법 심사”의 제도가 확립되어 있으므로 사법부 우위의 국가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115] Dicey, “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Law of the Constitution”, 1885
[116] (i) that the state possesses no ‘exceptional’ powers (ii) that individual public servants are responsible to (iii) the ordinary courts of the land for their use of statutory powers. 한국은 행정부 소속인 법무부가 관장 변호사 그러나 판례법은 사법부 통치국가다 다이시 표현대로 권력분립이 아니라, 변호사도 officer of the court 법적으로는 당연히 임명도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117] 어느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원칙뿐만 아니라 또 어떤 지위나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보통법에 따르게 되고 Everyone is subject to the law 또 재판권의 행사는 보통법원에 귀속된다는 것을 뜻한다. “법이 사람 위에 존재한다 Be you never so high, the law is above you." 미국적 표현으로는 “미국에서는 법이 왕이다 In American, the Law is king.”이라고 말한 토마스 페인이 잘 알려진 있다.
[118] 미국적 표현으로는 “미국에서는 법이 왕이다 In American, the Law is king.”이라고 말한 토마스 페인이 잘 알려진 있다.
[119] Ch IV, “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Law of the Constitution”, 8th ed. Macmillan, London.
[120] 이러한 다이시 Dicey의 관점은 독일 프랑스의 대륙법국가들에서 전제군주제의 국가 권력에 의해 개인의 자유가 크게 유린된 역사적 경험의 측면에서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진실된 의견은 영미판례법 국가들에서 대법원이 구체적 사건의 판결을 통해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온 역사를 고려한다면 충분히 입증된다. 반면 자의적이고 전제적인 행정부의 권력이 강화된 유럽 국가들의 역사를 보면 사법부의 독립 전통이 강하게 확립되지 못했고, 따라서 일반법원이 구체적인 사건에서의 판결을 통하여 기본적인 법원칙들을 하나 하나씩 쌓아 올려 갈 수가 없었다. 대신 나폴레옹 통일 법전, 2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 헌법 제정 등의 법역사가 말해주듯이 헌법을 제정하고 여기에서 일반적인 법원칙을 확립해내려고 시도했다.
[121] “It was a truly epochal.” “Reputation as a fearless defender of liberty under law was never higher.” Winterton, Australian Constitutional Landmarks, CUP, 2003, at 127*.
[122] 사법 심사를 배제하는 특별법 규정을 “ouster clause” 또는 “privative clause”이라고 부른다.
[123] 사법 심사 judicial review 헌법 원칙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해는 미국의 마버리 사건 Marbury v Madison을 참고하라.
[124] 딕슨 대법관 판결문 at 187-188. “History and not only ancient history, shows that in countries where democratic institutions have been unconstitutionally superseded, it has been done not seldom by those holding the executive power. Forms of government may need protection from dangers likely to arise from within the institutions to be protected. In point of constitutional theory the power to legislate for the protection of an existing form of government ought not to be based on a conception, if otherwise adequate, adequate only to assist those holding power to resist or suppress obstruction or opposition or attempts to displace them or the form of government they defend.”
[125] Speech at the Virginia Convention to ratify the Federal Constitution, 1788년 6월6일.
[126] “Attainder” 영미 판례법에서의 법률용어로써 “국민 기본권을 박탈하는 것을 뜻한다.” 판례법 국가들에서는 일찍이 사법부의 판결 없이는 누구도 기본권을 박탈할 수 없다는 원칙 즉 죄형법정주의가 정착되어 왔다. 미국 헌법 (Art I, s9, cl3)에서도 규정하고 있다. “No Bill of Attainder or ex post facto Law shall be passed.” 사법절차 없이 특정한 사람을 처벌하는 법률이나 소급입법의 제정은 입법부에 의한 사법권 행사로 삼권분리원칙에 위배되고 또 법의 지배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위헌이다. 한국에서는 1972년 유신헌법이 만들어지고 전제적 대통령에 의해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가 공포되었다.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을 부정ㆍ반대ㆍ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ㆍ발의ㆍ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 유언비어를 날조ㆍ유포하는 행위 등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비상군법회의 등에서 재판해 처벌하도록 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였는데 이러한 긴급조치들은 권력분립의 원칙과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 Bill of Attainder에 해당한다.
[127] Nullum crimen sine lege (no crime without law).
[128] Winterton, Australian Constitutional Landmarks, CUP, 2003, at 132.
[129] The Communist Party is the name of a world-wide movement which is organized as a political party in many countries and is the major and dominant party in the Union of Socialist Soviet Republics; the Australian Communist Party, like the communist parties in other countries, is a political party formed in accordance with Lenin's conception of a world-wide political movement which would strive to establish a proletarian dictatorship and to impose Marxism everywhere; and by reason of these circumstances the Australian Communist Party manifests strong sympathy with the foreign and domestic policy of the government of the Union of Socialist Soviet Republics. It follows that if war occurred in which that State was the enemy or there was imminent danger of such a war, the Commonwealth could take preventive measures against communists and communist bodies just as it could against alien enemies resident in this country. But I cannot agree with the view that at the time this Act was passed there was a situation which provided a constitutional foundation for this Act. (at 209).
[130] 미국의 판례 Korematsu v United States 323 U.S. 214 (1944)를 참조하라.
[131] Douglas, R. Cold War Justice? Judicial Responses to Communists and Communism, 1945-1955, (2007) 29(1) Sydney Law Review 43; http://www.austlii.edu.au/au/journals/SydLRev/2007/2.html.
[132] Communist Party case (1951) 83 CLR 1 at 169.
[133] Douglas, R. Cold War Justice? Judicial Responses to Communists and Communism, 1945-1955, (2007) 29(1) Sydney Law Review 43; http://www.austlii.edu.au/au/journals/SydLRev/2007/2.html.
[134]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 the implied constitutional freedom of political communication가 헌법상 기본권으로 확인되기까지에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Nationwide News Pty Ltd v Wills (1992) 177 CLR 1; Australian Capital Television Pty Ltd v Commonwealth (1992) 177 CLR 106; Lange v Australian Broadcasting Corporation (1997) 189 CLR 520.
[135] 거의 같은 시기에 독일헌법재판소는 공산당 해산의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과 비교하라.
[136] 한국에서는 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전제적 대통령에 의해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가 공포되었다.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을 부정ㆍ반대ㆍ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ㆍ발의ㆍ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 유언비어를 날조ㆍ유포하는 행위 등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비상군법회의 등에서 재판해 처벌하도록 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였는데 이러한 긴급조치에 대해서 대법원이 위헌무효로 판결한 때는 사후적인 2010년 12월 16일이다. (긴급조치 1호에 대해 위헌 판결 2010도5986). 판례법국가와 다른 정치 법제도와 법문화를 감안하더라도 호주 대법원이 1950년 당시 매카시즘의 한복판에서 공산주의자를 다루는 법률에 대해 위헌무효임을 선언했던 사건은 그 의미가 실로 대단한 것에 해당된다는 여겨진다. 한국의 긴급조치는 근거 법률도 없이 이루어진 초법적인 조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전면 금지하거나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대법원은 위헌무효를 사건 당시에서가 아니라 40여 년이 지난 2010년 이후에야 사후적으로 위헌 무효를 선언했을 뿐이다. 위헌무효의 선언 시점이 사건 당시가 아니라 사후적으로 거슬려 이루어졌다는 점은 차이가 크다.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대법원이 국민의 자유를 지키는 최후 보루의 역할을 담당해 온 판례법 국가들에서 현실적 측면에서 보면 사법부 통치 국가라고 이해된다. 판례법 국가의 법의 지배 전통은 행정부 독단이 종종 일어나는 전체주의 국가 체제하고는 크게 다른 점이라고 이해된다.
[137] Fullagar J, there was nothing preventing the States from banning the CPA in their own jurisdiction.
[138] 호주 헌법 51조 (의회의 입법권) “의회는 본 헌법에 의거하여 연방의 평화, 질서 및 선량한 통치를 위해 다음 사항에 대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가진다. (1). 타국과의 또는 주 상호간의 통상…….. (39). 본 헌법에 의해 의회, 의회의 원, 연방정부, 연방법원, 연방의 부처 또는 공무원에게 귀속된 권한의 행사에 부수되는 사안…..”
[139] 미국의 본드 의원 Bond v. Flyd 385 U.S. 116 (1966) 사건에서 미국연방대법원은 조지아주 의회가 의원에 관한 법률 제정권한은 가지고 있으므로 의원 자격 심사에 관한 기준을 둘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할 수는 있다고 해도 의원의 기본권 제약을 일반 국민들이 누리는 기본권 수준보다 더 열악한 수준으로 가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140] 호주연방헌법 128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헌법개정의 절차적 요건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헌법 개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상하원에서 절대 과반수로 통과되고, 또는 상하원 중 각자 재통과되고, (2) 국민투표에서 전체 국민의 과반수로 통과되고, 또 과반수의 주에서 주민의 과반수를 얻은 경우-이를 “이중 다수결 double majority” 제도라 부른다-헌법 개정안이 성공적으로 통과된다. 호주는 연방국가이고 각주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연방 전체에서 투표총수 중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하고 또 동시에 과반수의 주(즉 기본 6개주 중 4개주 이상)에서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보다 엄격한 요건을 규정하고 있다. 호주 연방의 각 주는 절대 인구수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데 만약 연방 전체 국민의 과반수만 획득하면 국민투표가 통과되게 하면 인구수가 적은 주의 의사는 보호받기 어렵기 때문에 인구수가 적은 주의 의견을 보호하기 위해서 과반수의 주에서 찬성해야 된다는 이중다수결의 요건을 규정하게 된 것이다. 국민투표의 구체적인 절차에 대해서는‘국민투표법(절차규정) Referendum (Machinery Provisions)Act 1984 (Cth)’을 참조하라. http://www.comlaw.gov.au/Details/C2013C00200.
[141] “Do you approve of the proposed law for the alteration of the Constitution entitled “Constitution Alteration (Powers to deal with Communists and Communism) 1951"?”
[142] Douglas, R. Cold War Justice? Judicial Responses to Communists and Communism, 1945-1955, (2007) 29(1) Sydney Law Review 43, at 51, 54. http://www.austlii.edu.au/au/journals/SydLRev/2007/2.html
[143] 다이시의 견해에 따르면, 미국에서 스위스에 기반을 둔 국민투표제도가 도입된 주된 이유는 정당 정치의 당파성과 정치적 부패 문제 때문이었다. 다이시는 국민투표의 기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국민투표는 현재 절대적 권위를 누리고 있는 의회다수당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통제장치가 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국민투표는 정당 정부가 노정시켜온 결함을 상당부분 치유해 줄 수 있는 제도이다. 국민투표의 장점으로 국민의 거부권은 그 자체가 민주적 제도인 동시에 그 소극적 성격 때문에 보수적 제도로 기능한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이며 유권자와 다수가 유지하기를 원하는 법이나 제도를 지속시킬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143] 다이시의 견해에 따르면, ‘국민투표 referendum’는 스위스에서 시작된 제도로 ‘국민의 거부권 the people’s veto”이라고 흔히 설명되는데 이는 국민투표가 유권자의 승인을 얻지 못한 중요한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방지하는데 그 주요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에서의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의 결과는 크게 대조된다. 한편 호주의 사례는 1952년 공산당 해산 국민투표에서 보여준 결과가 말해주는 것과 같이 다이시가 예견했던 대로 정당 제도가 가진 취약점을 치유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144] 1901년 1월 1일 발효된 호주연방헌법의 11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44번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나 헌법 개정의 국민투표가 성공한 경우는 단 8차례밖에 지나지 않는다.
[145] “The Communist Party Dissolution Bill would have fared very differently in the Commonwealth Parliament and the Caucus rooms if there had not been in the background a High Court which, over a period of nearly half a century, had shown itself a vigilant defender of civil liberties.” at 177
[146] 국민투표 부결을 주도하여 승리한 야당 당수 에바트 (1894-1965년) 의원의 회견문 중, “The consequences of a mistaken vote in an election verdict can be retrieved. But an error of judgement in this constitutional alteration would tend to destroy the whole democratic fabric of justice and liberty.”
[147] 빙햄 대법관 법의 지배 개념 정의 참조. “To what extent is it consistent with the proper function of a court interpreting the Constitution to go beyond their essential, and generally agreed content, as a guide to the meaning of that text? This is a perennial problem, which may have significance in relation to the powers of the Parliament concerning judicial review of administrative action. The rule of law is not enforced by an army. It depends upon public confidence in lawfully constituted authority. The judiciary claims the ultimate capacity to decide what the law is. Public confidence demands that the rule of law be respected, above all, by the judiciary.” Gleeson 대법원장, 법원과 법의 지배 원칙, http://www.hcourt.gov.au/assets/publications/speeches/former-justices/gleesoncj/cj_ruleoflaw.htm.
[148] 사법부가 정치의 위력 앞에 굴복해 온 유럽 대륙법 국가들과는 비교된다.
[149] “Reputation as a fearless defender of liberty under law was never higher.”
[150] 1951년 6월 실시된 갤럽 여론 조사에서 공산당 해산 법률에 대한 찬성 여론은 80%에 달했다. Douglas, R., "A Smallish Blow for Liberty? The Significance of the Communist Party Case", (2001) 27(2) Monash University Law Review 253, at 253.
[151] Winterton, Australian Constitutional Landmarks, CUP, 2003, at 135.
[152] 이하 부분 번역은 “헌법학입문 (다이시 저)”을 잘 번역한 경새원의 “헌법학 입문” 한국어판 (안경환·김종철 옮김)을 전제한 것이다, 경세원에서 새로이 한문을 추가하여 새로운 번역판이 출간된 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153] “자유권이라 함은 법이 허용하는 모든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이다. 만약 어떤 시민이 법이 금하는 그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자유권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 권한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헌법의 직접적인 목적으로 정치적 자유권을 상정하고 있는 국가가 하나 있다.” 바로 그 나라가 영국이다.
[154] “볼테르가 이웃 나라에 은신처를 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상황이 자의권이라곤 발 붙일 수 없는 제도에 대한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서 이상은 자유로움 그 자체이며 결코 속박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좀더 너그러운 분위기를 숨쉬게 되고, 아무도 머리칼 하나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인신구속영장(1550-1790년 프랑스에서 행정부 발행)도 이유없는 구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당당히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시민들 사이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155] 삼부회의 소집 이후에도 국왕이 인신구속영장에 의해 행사되던 권한을 전부 포기하기를 명시적으로 거부하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56] 프랑스의 노예상태를 바라보는 영국인의 정서에 대해서는 을 참조. 왕족과 피붙이라는 이유만으로 살인할 수 있는 권한까지 보유했었던 프랑스 귀족들의 무가벌성과 페레스 경의 상황에 대하여는 토크빌 글 참조 이런 취지의 법의 지배의 이상은 국왕이나 그 공복들이 어떠한 사면권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거나 최소한 이와 긴밀한 관련성은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158] 밀, 대의제 정부론, p4.
[159] 미국 인권선언과 마찬가지로 권리청원과 권리장전이 외국의 헌법학자들에게 알려진 대로 권리의 선언 특히 그 유명한 1789년의 세계인권선언과 유사한 일반원칙의 공표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의 인권선언과 여타 나라들의 권리선언은 내용에 있어서 서로 유사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본에 있어서는 유사성보다 대조성이 더 두드러짐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권리장전과 권리청원은 외국에서 사용되는 의미에서의 “권리의 선언”이라기 보다는 국왕을 상대로 하는 소송에서 국왕의 행위가 불법적인 것임을 선언하는 국왕에 대한 사법적 선고라고 할 수 있다. 이 유명한 두 가지 문서 속에 들어 있는 각 조항들(거의 모든 조항)이 국왕의 대권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효력이 발생한 특정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미국 헌법에 포함된 권리선언도 대륙국가들의 권리선언과 실제로 많이 유사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미국 헌법은 18세기적 사고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헌법조문들로 입법부의 행위를 합법적으로 통제하려는 독특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소홀히 해서는 아니된다.
[160] 오늘날 영국에서 법 앞의 평등 원칙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해 있다. 폴록 경은 “의회는 1906년 노동조합 분쟁 처리법 Trade Disputes Act (the Act declared that unions could not be sued for damages incurred during a strike.)을 통해서 사용자 단체와 노동자 단체, 나아가 일정 범위 내에서 그들을 대리하는 자에게까지 특별한 면책권을 부여하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다. 법학은 정치계의 이 폭력적이고 몰지각한 활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우리는 단지 법원이 법적 정의의 원칙에 입각한 해결에 힘쓰고 있는 (어느 정도 성공한 합리적인 조치가 있기는 있었다) 문제들에 대하여 해외관할권을 통한 보다 심도 깊은 사법적 조치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161] 최소 5%득표율 기준 (정당 명부에서 최소 5%의 득표율을 획득하지 못한 정당은 비례대표제 의석 배분에서 제외된다)에 대해서 헌법재판소는 1979년 유럽의회1 51 BVerfGE 222 (1979), 263, 777 n.42, 779 n-67, 779 n.69 사건에서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했으나 2011년 유럽의회2 31 Neue Zeitschrift fur Verwaltungsrecht (NVwZ) 33 (2012), 263, 779 n.70. 사건에서 재판관 5-3의 다수의견으로 위헌 판결을 내렸다. 독일의 유럽의회 구성에서는 기준이 달리 적용된다.
[162] BVerfGE 107, 339, at 341-342.
[163] Rensmann T, Procedural Fairness in a Militant Democracy: The "Uprising of the Decent" Fails Before the Federal Constitutional Court, 4 German Law Journal 1117-1136 (2003), http://www.germanlawjournal.com/index.php?pageID=11&artID=332.
[164] 독일연방헌법재판소법 43조1항에 따라, 의회(상원과 하원 각각)와 행정부는 정당 해산 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165] Muller F, “Report-Bundesverfassungsgericht, FCC)-2003” in Annual of German & European Law-2004, eds Miller & Zumbansen 2006, 333. 급박하고 현존한 위험의 범위와 정도에 대해서는 4인의 반대 의견을 참조하라.
[166] Hanschmann F, Another Test in Procedural Democracy: The Oral Proceedings in the NPD Party Ban case before the Federal Constitutional Court”, German Law Journal 3/11 (2002, 11,1), available at http://www.germanlawjournal.com/article.php?id=204.
[167] “Die Verfahren werden eingestellt.” BVerfGE 107, 339. 헌법재판소의 주된 관심 쟁점은 국가정보부 요원들이 정당에 깊숙이 침투하였다는 사실이 절차적 정의를 위반하는지 여부에 있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헌법 기구인 정당에 대해서 국가가 감시하고 증거를 수집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에는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NPD 정당이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에 어긋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주된 관심 사항이 아니라 재판의 공정성 즉 국가 기관의 활동이 국민의 눈높이에 어떻게 비칠지에 대한 절차적 정의 측면으로 옮겨갔다고 해석된다.
[168] 적법 절차 Due Process 용어는 절차적 정의 procedural fairness; 자연법적 정의 natural justice 등의 다른 말로도 같이 사용된다. 절차적 정의 procedural fairness 개념은 미국 헌법에서 due process, 영국 헌법 원칙에서 natural justice으로 표현된다.
[169] 헌법은 정당 활동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국가 개입으로 자유롭다는 독일어 원문 표현은 strikte Staatsfreiheit, 영어 번역은 strict freedom from State interference. “압수 수색으로까지 진실을 꼭 밝혀내 엄히 처벌해야 한다”는 생각은 항상 옳은 것이 아니다. 로마시대 변호사 키케로의 법격언 “Cedant arma togae”은 “let arms yield to the toga: “let military power give way to civil power: 군대의 칼이 판사의 법복에 진다”는 뜻이다. 절차적 정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다음의 견해를 참고하라: “법이 곧 진실이자 정의일 것이라는 가정에서 벗어나자. 그것은 도착점이지 출발점이 아니다. 법은 진실을 담는 가장 안전한 그릇일 뿐이다. 급하다고 그릇을 먹을 수는 없지 않는가!”
[170] BVerfGE 107, 339.
[171] BVerfGE 107, 339. Rensmann T, Procedural Fairness in a Militant Democracy: The "Uprising of the Decent" Fails Before the Federal Constitutional Court, 4 German Law Journal 1117-1136 (2003), http://www.germanlawjournal.com/index.php?pageID=11&artID=332.
[172] Hassemer, Broß, Osterloh 재판관. BVerfGE 107, 339 at 361-378. Kommers, at 296-299, “NPD違憲政党訴訟と憲法裁判”, 現代法学, (2005), at 124-133 참조.
[173] 번역은 Kommers, at 296-299, “NPD違憲政党訴訟と憲法裁判”, 現代法学, (2005), at 124-133 참조했다. 각주는 저자의 설명이다. 그리고 판결문 원문에서의 판례 인용이나 원문 각주는 생략하였다.
[174] 여기 판결문 번역에서 “입헌주의 법치 국가 법원칙”이라고 번역한 이유는 “자유 민주주의 헌법 기본질서” 개념과 “법치국가” 법원칙 요건이 항상 동일한 내용이 아니고 따라서 판례법 국가의 “법의 지배 rule of law” 개념들과 비교해 볼 필요성이 있다는 저자의 강조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임을 참고하라.
[175]자기결정권은 영어로 self-determination 독일어로 Selbstbestimmungsrecht로 표현한다. “주민 스스로 투표를 통해서 국가의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주민 자치 the right of a nation’s people to control their own political processes”를 뜻한다. 국민 스스로의 운명을 국민들이 서로 동의하게 투표에 의해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혁명”과는 반대되는 의미를 갖는다.
[176] 예리한 무기, 양날의 칼의 독일어 원문 표현은 “die schärfste und überdies zweischneidige Waffe des demokratischen Rechtsstaats gegen seine organisierten Feinde”.
[177] “Das verfassungsgerichtliche Parteiverbot, die schärfste und überdies zweischneidige Waffe des demokratischen Rechtsstaats gegen seine organisierten Feinde, braucht ein Höchstmaß an Rechtssicherheit, Transparenz, Berechenbarkeit und Verlässlichkeit des Verfahrens. Dies gilt auch für das zu beurteilende Tatsachenmaterial. Nur eindeutige und offene Zurechnungen von Personen, Verhalten und Äußerungen entweder zur Sphäre der Antragsteller oder zu der der Antragsgegnerin ermöglichen es dem Gericht, eine verfassungsrechtlich vertretbare Entscheidung über Verfassungswidrigkeit oder Verfassungsmäßigkeit der Partei als Ergebnis eines rechtsstaatlich geordneten Verfahrens zu finden und zu verantworten.”, BVerfGE 107, 339 at 368.
[178] Sommer, Jentsch, Di Fabio, Mellinghoff 재판관. 판결문 BVerfGE 107, 339 at 378-394. Kommers, at 299-300, “NPD違憲政党訴訟と憲法裁判”, 現代法学, (2005), at 133-142 참조.
[179] BVerfGE 107, 339 at 378-380.
[180] “Es ist die Aufgabe des Bundesverfassungsgerichts, selbst für die notwendige Aufklärung des Sachverhalts zu sorgen. § 26 Abs. 1 Satz 1 BVerfGG bestimmt, dass das Bundesverfassungsgericht den zur Erforschung der Wahrheit erforderlichen Beweis erhebt. Dieser Untersuchungsgrundsatz begründet für das Gericht nicht nur das Recht, sondern auch die Pflicht, den entscheidungserheblichen Sachverhalt zu ermitteln.” at 388. “Darüber hinaus kann das Bundesverfassungsgericht weitere Ermittlungsmaßnahmen und Beweiserhebungen zur Erforschung der entscheidungserheblichen Umstände vornehmen.” at 389.
[181] At 380. “Denn das Gerichtsverfahren dient dem Rechtsstaatsprinzip gerade dadurch, dass es in gesetzmäßig förmlicher Weise die Ziele materieller Gerechtigkeit verwirklicht und Streit verbindlich schlichtet.” “Eine Prozessbeendigung ohne Aufklärung der abwägungsrelevanten Tatsachen widerspricht der besonderen Justizgewährpflicht aus Art. 21 Abs. 2 GG i.V.m. §§ 43 ff. BVerfGG und kommt deshalb nur ausnahmsweise in Betracht. Das Bundesverfassungsgericht wird von Art. 21 Abs. 2 GG als einziges Organ der freiheitlichen Rechtsordnung mit der Kompetenz und zugleich mit der Rechtspflicht betraut, auf Antrag über die Verfassungswidrigkeit einer Partei zu befinden. Es hat damit von Verfassungs wegen über ein Verfahren zu entscheiden, in dem es um die Wahrung von Grundwerten und maßgeblichen Voraussetzungen der Verfassungsordnung geht (vgl. Stern, a.a.O., S. 194 [198]). Mit Art. 21 Abs. 2 GG und der Ausgestaltung durch § 46 BVerfGG fallen die exekutive Aufgabe der Gefahrenabwehr und die richterliche Rechtserkenntnis in einer besonderen Pflicht zur Justizgewähr zusammen.” BVerfGE 107, 339 at 386.
[182] BVerfGE 107, 339 at 381.
[183] “konkreten Präventionszweck des Parteiverbotsverfahrens”, at 385. “präventiven Schutz” at 386. 예방적 성격 precautionary principle이 전투적민주주의 이론의 핵심에 속한다. KPD 케이스 BVerfGE 5,85 at 139을 참조하라.
[184] BVerfGE 107, 339 at 387.
[185] BVerfGE 107, 339 at 386.
[186] “Das Grundanliegen einer Verfassung, die sich nicht durch den Missbrauch der von ihr gewährleisteten Freiheitsrechte zur Disposition stellen lassen will und mit gleicher Entschiedenheit der Verächtlichmachung und Herabwürdigung von Menschen oder Gruppen von Menschen entgegentritt (Art. 1 Abs. 1 Satz 2 GG), wäre verfehlt, wenn der Senat ein Verfahrenshindernis annähme, ohne die konkrete Gefährlichkeit der Partei und mögliche Verstöße gegen den Grundsatz des fairen Verfahrens hinreichend aufzuklären, die rechtliche Bedeutung mit den Beteiligten zu erörtern und sodann die rechtlichen Belange gegeneinander abzuwägen.” BVerfGE 107, 339 at 388.
[187] 스페인 분리주의자 위헌 정당 심판 케이스 참조. Herri Batasuna and Batasuna v. Spain (Applications nos. 25803/04 and 25817/04), 유럽인권재판소 2009년 6월 30일 판결. http://hudoc.echr.coe.int/sites/eng/pages/search.aspx?i=001-93475; VONA v. HUNGARY, http://hudoc.echr.coe.int/sites/eng/pages/search.aspx?i=001-122183.
[188] 유럽인권재판소의 정당 해산 기준 또한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위험이 발생하기 전이라도 정당해산이 정당화될 수 있다. There needs to be a convincing and compelling reason as well as a pressing social need for the ban.
[189] 유럽인권재판소에 대한 상소 가능성에 대해서는 다음 자료를 참조하라: Hanschmann F, Federal Constitutional Court To Review NPD Party Ban Motion, 2 German Law Journal (2001), http://www.germanlawjournal.com/index.php?pageID=11&artID=104.
[190] United Communist Party of Turkey v. Turkey, 1998-I Eur. Ct.H.R. 1 (1998).
[191] 유럽통합의 사법적 질서 측면에서도 헌법재판소는 소송 종료를 선언하는 현실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헌법재판소 판결 다음 해인 2004년 9월에 실시된 주의회선거에서 NPD는 작센주에서 9.2%의 득표율을 얻고 주의회에서 진출하였다.
[192] Hanschmann F, Another Test in Procedural Democracy: The Oral Proceedings in the NPD Party Ban case before the Federal Constitutional Court”, German Law Journal 3/11 (2002, 11,1), http://www.germanlawjournal.com/article.php?id=204.
[193] 독과수 과실 이론 fruit of the poisonous tree doctrine은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법정 증거로 채택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파생된 2차적인 증거의 증거능력까지 배제하는 형사소송절차법원칙을 말하며 미국에서는 Silverthorne Lumber Co. v. United States, 251 U.S. 385 (1920) 판례에서 확립되었다.
[194] BVerfGE 107, 339 at 368.
[195] “[Germany] no longer needs to resort to illiberal measures in order to preserve its liberal character. Instead, German society can now concern itself with promoting the constituent elements of the free democratic basic order for all, trusting a citizenry now steeped in a vibrant democratic culture to pursue the best interests of a liberal society through the unfettered marketplace of ideas.” , Kommers, at 295.
[196] 부시 후보 2,912,790 득표, 고어 후보 2,912,253 득표.
[197] The court ruled that the Secretary, after “considering all attendant facts and circumstances,” “had not acted arbitrarily and had exercised her discretion in a reasonable manner consistent with the court’ s earlier ruling.”
[198] Bush v. Palm Beach County Canvassing Board, 531 U.S. 70.
[199] Gore v. Harris, 772 S2d 1243 (December 8, 2000).
[200] Chapter 1 of Title 3, United States Code (62 Stat. 672, as amended).
[201]“a desire for speed is not a general excuse for ignoring equal protection guarantees.”
[202] 법정의견, Bush v. Gore, 531 U.S. 98 (2000)
[203] “remedy which is impossible to achieve and which will ultimately lead to chaos.”
[204] 스티븐스 대법관 소수반대의견. Bush v. Gore, 531 U.S. 98 (2000)
[205] http://www.issues2000.org/Florida_Recount_Al_Gore.htm.
[206] 고어 후버는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하버드대 로스쿨에 새겨진 라틴어 원문은 “NON SVB HOMINE SED SVB DEO ET LEGE”.
[207] 이 표현은 미국에서 “성조기여 영원 하라” 이상으로 잘 알려진 노래 "America The Beautiful"의 가사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208] 다이시, 헌법학 입문 8판, 1915, 서론, 국민투표 도입 찬성론 단락.
[209] 이하 다이시, 헌법학 입문 8판, 1915, 서론, 국민투표 제도 부분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