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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섬 달 밝은 밤에"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가"에 대한 새로운 해석

추홍희블로그 2014. 3. 19. 13:58

“한산섬 밝은 밤에” 이순신장군의 "한산도가" 대한 새로운 해석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장군의 한시를 노산 이은상선생의 번역으로써 국어교과서에 실려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한시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閑山島月明夜上戍樓 
 
撫大刀深愁時何處
 
一聲羌笛更添愁

 

 노산 이은상 선생은 저희 모교 중학교 교가를 지은 마산 출신의 유명한 시인입니다국정교과서에 올라있는 이순신 장군의 한시에 대해서, 그것도 한시의 대가이고 유명한 시인인 이은상이 번역한 것에 대해서 저는 노산의 번역에 대해 오역이 있음을 지적하며 맞짱을 떠볼까 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새로운 번역을 시도해 봅니다.

 

閑山島月明夜上戍樓 (한산도월명야상수루
=>
한산섬의 달 밝은 밤에 전쟁 지휘소 누각에 올라
撫大刀深愁時何處(무대도심수시하처
=>
큰 칼을 어루만지며 마땅한 공격 기회와 장소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데
一聲羌笛更添愁 (일성강적갱첨수)
=>
어디선가 들려오는 구슬픈 피리 소리에 나의 고민은 더욱 깊어져 간다!

 

 

1. 수루 => 전쟁 지휘소 누각

 

이은상의 번역은 “수루”라고 했는데 “수루”는 전선을 지키는 경계초소인 누각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와 같은 곳)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수루”는 한자이기 때문에 한글번역으로는 조금 미흡하다고 생각되어서 저는 “전쟁 지휘소 누각”으로 번역합니다

물론 이순신은 군대 “장군”으로서 수어장대(일본의 높은 성의 “천수각”과 같은 곳) 같은 높은 누각에 머물렀습니다.   검색을 해보니 이순신 장군이 머물렀던 관사 중에  보성의 "열선루(
列仙樓)"가 있었습니.

 

 2.  큰 칼 옆에 차고 => 큰 칼을 어루만지며

 

노산은 “撫大刀”(무대도)를 “큰 칼 옆에 차고” 이렇게 번역했는데, 한자 “撫(무)" 글자가 “어루만지다”의 뜻이 있음을 참조하면 노산의 번역은 오역에 가깝다고 보여집니다중국어와 영어 번역 사전에서 풀이한 뜻을 참조하면 분명합니다.  따라서 저는 한자 뜻을 그대로 살려서 문언 그대로 해석하여 “큰 칼을 어루만지며”로 번역합니다.

 

다음 그림과 같이  한자 ""(무) 글자의 뜻을 영어로 설명하고 있는 중국어 사전 참조하시라.

 

 

장군에게 칼이 갖고 있는 상징성

 

 지금은 총이 무기인 군대에서 칼은 살상 무기가 아니라 다만 상징적인 도구일뿐이지만 당시는 육탄전을 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칼은 군대의 상징 도구뿐만 아니라 생사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살상 무기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장군은 외적의 침입을 맞이하여 칼을 휘두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순신장군은 가을날 달 밝은 밤에 칼을 쓰지 않고 칼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이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실 수 있나요?  경계초소에서 적의 동향을 살피고 있으면서 결전의 날이 언제인지를 고민걱정하고 있는 이순신장군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칼을 쓰지 않고 칼을 위로 아래로 어루만지고 있다는 모습은 무슨 내용입니까?  이순신 장군의 입장에서는 “저 나쁜 일본놈들 왜군들의 목을 내 칼로 바로 단칼에 베어버리고 싶은데!!!” 하지만 지금 조선 해군의 전력이라곤 전함 12척밖에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생각해 보면 답답한 마음 가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칼을 어루만지는” 모습은 바로 그런 생각을 나타납니다. 마음으로는 당장 달려가서 왜군들의 물리치고 싶지만 자신이 맡고 있는 전방 군대 현실 처지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는 안타까움이 클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이순신이 누구입니까? 사즉생- 예수님의 마태복음 말씀처럼 죽음으로써 부활하겠다는 사즉생의 각오로 어떻게 하면 왜군들을 무찌를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고민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승리의 군사전략을 짜내느냐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슬픈 감상에 빠져서 시름에 차 있는 모습은 이순신 장군의 본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군대에서 행군 중이나 경계근무를 서고 있을 때 잠시 소총을 위로 아래로 만지작거렸던 모습을 상기해 보세요. 그리면 “무대도”의 뜻이 실감날 겁니다.

 

3.  심수시==> "공격의 기회와 장소를 고민하던 차에"

 

 노산은 “심수시 深愁時”를 “깊은 시름 하는 차에”라고 번역했습니만 저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결정적 공격의 기회를 고민하고 있는데” - 이렇게 번역함으로써 이순신 장군은 감상적이고 슬픈 애상감에 사로잡혀 있는 나약한 모습이 아니라 대신 왜적을 급습할 시기 또는 왜적을 언제 어느 때 어디에서 무찌르는 것이 가장 좋을지 공격의 시기와 그 적당한 장소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진솔한 군사전략가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군사전략을 놓고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당시 왜군의 침입에 맞써 불리한 전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전쟁터의 장군으로서의 이순신의 모습에 보다 진실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어와 목적어 관계

 

 나경원의원의 BBK 이명박사건에서 “주어가 없다”라는 우스개 소리로 허무맹랑 개그를 들려준 바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 말은 영어의 특징(주어와 목적어 관계가 분명하고 따라서 동사가 발달한 언어)하고는 다르게 주어와 목적어의 구분이 애매모호하고 동사보다는 형용사 부사가 발달한 언어입니다.

 

노산은 여기서 “때 ()”를 “깊은 시름을 하고 있는 차”라고 주어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로 파악하고 해석하였습니다.

 

중국어의 주어와 목적어의 배치는 우리말 어순배치하고는 다르게 즉 중국어는 영어처럼 목적어가 뒤에 나오잖아요? 그래서 최상의 때를 고민하고 있다는 해석이 보다 적절하다고 봅니다.  이렇게 해석함으로써 전반부 문장에서 “큰 칼을 어루만지며”를 보다 자연스럽게 이어받는 구절이 됩니다.

 

전방 경계초소에서 이순신장군이 그냥 시름에 차 있는 모습이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최적의 공격 기회가 언제일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모습으로 이해됩니다.

 

“때를 기다린다”는 의미

 

 우리들이 흔히 “때 를 기다린다”라고 말하잖아요?  “적당히 기회를 옅본다”라는 말에서의 그 때(적당한 기회)를 말할 때 시()자를 씁니다.

 

공세의 기회를 옅본다-이렇게 해석을 함으로써 이순신 장군은 슬픈 애상감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왜군이 침입한 현재 상황 즉 왜군을 코앞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의 초소에서 왜군에 대한 최상의 공격 시기가 언제일지에 대한 군사전략상의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달밤(달의 위치)는 바닷물 만조와 간조의 차이를 잘 알려줍니다. 이순신장군의 전략은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한 것 아니었습니까?

 

“때를 기다린다”는 해석은 당시 왜군과 이순신 해군이 대치하고 있던 “견내량” 의 상황을 보시면 더욱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대치상황에서는 함부로 먼저 치고 들어가면 불리하다는 것은 군사작전의 기본에 속합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은 달밤이기 때문에 높은 누각에서 내려다 보이는 섬들의 지형을 살피고 조류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왜적을 무찌를 수 있는 담대한 군사전략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군사전략으로 고민하던 이순신장군의 모습을 그가 “깊은 시름을 하고 있는 차에”로 번역하는 것은 약간 부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왜군의 전함은 600척이 넘는 가운데 조선의 군함은 단지 12척 밖에 남아 있지 않는 상태에서 이순신장군의 고민이 깊어지지 않았겠습니까?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황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의 전쟁 역전에 대한 군사 전략 전술을 논의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을 당시 상황 아니었을까요? 절대적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는 이순신장군이 어찌 슬픈 애상감에 젖어들리가 만무하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군사전략과 사즉생의 각오

 

 이순신 장군은 절망이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유명한 장계문 한 구절을 저는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금신전선 상유십이)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출사력거전칙유가위야) 지금 신에게는 싸울 수 있는 배가 12척이나 있사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에 임한다면 이 싸움을 이길 방책이 있사옵니다.

이순신 장군은 선조임금님에게 사즉생의 각오로 싸우겠다면서 임금님의 명령까지 거부하고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면서 오로지 하늘의 뜻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순신장군의 “사즉생”의 각오는 예수님의 말씀 마태복음의 기록과 상통합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 10:39) Whoever finds their life will lose it, and whoever loses their life for my sake will find it.

 

이순신장군이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지금 같은 세상에서도 대통령 명령 앞에 어느 누가 감히 거역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전제군주제 국가에 가까운 우리나라는 차치하고 미국을 봅시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맥아더 원수도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순수히 노병은 조용히 물러갔습니다. 그렇게 전쟁에서 지휘관의 명령은 보통 때 조정 어전회의에서 문관들이 서로 토의하며 반대 의견을 개진하는 것과는 수준이 다릅니다. 그런데 오로지 이순신장군만이 그 당시 “짐이 곧 법”인 시대, 임금님의 말 한마디면 모두가 그대로 따라야 하는 절대군주 조선 왕정 시대에서 국왕의 지시와 명령에 대해서도 감히 “아니오 No”라고 분명히 외쳤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부한 죄로 이순신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전쟁 시기에는 자기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이순신장군 같은 세기의 인물은 설령 왕의 명령일지라도 그것이 부당하고 또 틀렸다고 판단한 순간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감히 왕의 명령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순신장군은 자기 스스로의 심사숙고를 통한 자신의 직업 전문가로서의 책임을 지는 판단 (신탁자로서)을 내린 것입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전쟁터에서 군사전문가로서 전문지식 그리고 죽음을 무릅쓴 책임 윤리로써 무장한 이순신장군에게 최고의 통치자는 하늘이었지 국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절대군주의 지시와 명령에도 목숨을 내놓고 거부했던 이순신은 죽음을 불사르는 용기를 가졌던 용맹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런 이순신 장군이 가을날 달밤에 둥근 달이 떴다고 한낱 슬픈 애상에 젖어 들리는 만무하였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참고로 하나 덧붙이면

 

 평화의 시기에 왕궁(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문관의 보고서에서도 감히 " No"라고 외칠 수 있는 관료가 나오기 힘든 세상에 그것도 최전방에 근무하는 전방지휘관 정도가 감히 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최고의 윤리도덕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이순신장군의 군사전문가로서 쌓은 전문지식 그리고 직업 군인으로써의 죽음을 무릅쓴 책임 의식 아니었을까요?

이순신 장군의 예처럼 최고의 전문 지식을 가진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책임 의식”의 윤리도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결론이 얻어집니다.

 

4.  하처일성갱적==> 어디선가 들려오는 슬픈 피리소리에"

 

 노산선생은 “何處一聲羌笛”을 “어디서 일성호가는”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저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구슬픈 피리 소리가”으로 번역합니다.  “일성호가”는 한자이기에 우리말 번역으로는 부족합니다. 羌笛(강적) 한자의 뜻은 “구슬픈 피리 소리”를 말합니다.

 

이순신장군의 한산도가에 대한 새로운 해석

 

閑山島歌

閑山島月明夜上戍樓
撫大刀深愁時何處
一聲羌笛更添愁

 

이 한산도가에 대해서 나는 다음과 같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보았다.

 

 한산섬의 달 밝은 밤에 지휘소 누각에 올라
 
큰 칼을 어루만지며 공격 기회와 장소를 고민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슬픈 피리 소리에 나의 생각은 더욱 깊어져 간다!

 

기존의 노산 번역과 나의 새로운 번역과의 차이점

 

 저는 이와 같이 이순신장군의 한시에 대해서 통상적인 교과서에 실린 대로의 해석을 거부하고 새로운 번역을 시도해봤습니다.

 

노산 이은상의 번역은 이순신장군이 근심 걱정하는 나약한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해석되는 반면 저의 번역은 이순신 장군이 군사 전략을 놓고 고민하고 있는 실제적인 모습과 그의 주도 면밀한 작전 수행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보다 진실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저 국정교과서에 나와 있다고 그리고 대가가 했다는 사실에 그저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저의 번역 또한 그만큼 설득력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자 합니다.  여담이지만 대가들이 했다는 번역들 가운데 틀린 것이 부지기수로 무시로 발견됩니다.